소설리스트

85화. 좀 더 상부상조해 볼래? (85/173)


85화. 좀 더 상부상조해 볼래?
2022.04.23.


띵동!

「‘은발 적안에 목숨 건 사람’ 님이 후회 없는 생이었노라고 회고하며 두 눈을 감은 채 30만 주를 구매합니다.」

「카셀이 나라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이번만 외도하겠다며 주식을…….」

띵동!

「‘아가.들아. 보.아라’ 님이…….」

시스템 창 화면이 쉴 새 없이 번쩍거렸다.

하지만 내 신경은 온통 한 군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 손목을 두드리듯 어루만지더니, 이내 느긋하게 깍지를 껴 오는 카셀의 기다란 손가락에.

옷부터! 옷부터 입으라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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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

나는 돌아보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썼다.

그러다 결국 두 눈을 꼭 감았다. 나도 나를 믿을 수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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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그의 머리칼을 타고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이 내 손등 위에서 부서졌다.

그 선연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꼭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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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용감하더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속엔 청량한 향기가 실려 있었다.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를 가르고 두근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 이놈의 심장은 꼭 이럴 때 제멋대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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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멋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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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고마워. 근데 옷 좀……!”

손이라도 빼내려 했으나 실패였다. 아니, 오히려 카셀은 오히려 손을 더 꽉 얽은 채 감미로운 목소리로 더욱 야릇하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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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반했어.”

뭐라고……?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암흑의 길드장이……. 반전 매력을 가진 스무 살짜리 연하남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것도 심지어 전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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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무 말도 안 해, 응?”

카셀이 재촉하듯 물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안다고 해서 대답해 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이, 이러다 혹시라도 순찰 나온 용병에게 들키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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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 거기 있나?”

하필 그때, 저 멀리서 아주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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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이번엔 걱정을 듬뿍 담은, 다정하면서도 상냥한 목소리가 곧바로 뒤를 이었다.

동시에 카셀이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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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지긋지긋한 방해꾼들 같으니.”

내가 대답이 없어서 그랬는지,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에 다급함이 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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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군, 분명 인기척이 들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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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겠지……. 좀 더 안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아니, 저 두 사람은 왜 이럴 때만 저렇게 쿵짝이 잘 맞는 건데!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바위 위에 올려져 있던 커다란 수건을 잽싸게 펼쳐 카셀이 벗어 놓은 옷가지 위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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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은 못 참아. 이 기회에 내가 누군지 똑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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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참긴 뭘 못 참아!”

그리고 씩씩대며 가장자리를 딛고 나오려던 카셀의 어깨를 안고 샘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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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숨 참아……!”

풍덩!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물보라가 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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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흡……!”

가슴께까지 오는 물속에서 팔을 허우적대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찬물로 뛰어든 탓에 몸이 덜덜 떨렸다. 입술 사이로 계속해서 이를 부딪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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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팔을 문지르며 숨을 겨우겨우 내뱉었다. 눈 앞을 가린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 내자, 두 남자가 물소리를 듣고 다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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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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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펠리어트와 레어넌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외치며 한걸음에 뛰어왔다. 코앞으로 다가오는 데는 몇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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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러니까…….”

뭐라 변명할 거리를 궁리하는데, 수면으로 투명한 공기 방울이 뽀그르르 올라왔다.

혹시라도 볼세라 나는 재빨리 첨벙대며 씻는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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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좀 씻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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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그러자 펠리어트가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훑었다.

아니, 정확히는 목 끝까지 단추를 꼭꼭 잠근 내 옷을 바라본 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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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셔서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이 주위는 위험한데 이렇게 혼자 다니시면…….”

레어넌이 말끝을 흐리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안심한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미간에는 여전히 깊은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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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아까 불어온 바람 때문에, 옷 속이 온통 모래투성이가 되어 버려서요…….”

그때였다.

아까보다 큰 공기 방울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동시에 카셀이 내 다리를 탁탁 쳤다.

안 돼. 참아!

나는 물속으로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어 해초처럼 흔들리는 은발을 꾸욱 눌렀다.

죽어도…… 참아!

두 사람의 눈동자는 그런 내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긴 머리를 한데 그러모아 물을 쭉 짜내며, 레어넌을 향해 미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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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벗으려는데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들려서 저도 모르게 물속으로 뛰어들고 말았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양손을 다시 물속으로 내려서 풀어헤친 허리춤을 잡는 척하며 부끄러운 사람처럼 몸을 비비 꼬며 눈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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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다시 제대로 입든, 아니면 아예 전부 벗어서 말리든 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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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군.”

그러자 펠리어트가 헛기침을 하더니 얼른 뒤로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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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했습니다.”

뒷걸음질로 샘에서 황급히 멀어지는 레어넌의 얼굴은 몹시 붉었다.

두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보초를 설 테니 천천히 씻으라고 말하고는 빠르게 물러났다.

이윽고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들리는 거라고는 멀리서 용병들이 크게 웃는 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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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헉!”

카셀이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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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나, 진짜, 죽는 줄……!”

너른 어깨를 타고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꽤나 오래 숨을 참고 있었는지, 단단한 흉곽이 계속해서 크게 들썩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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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 카일 어디 있냐!”

확실하진 않지만 카셀을 찾는 듯했다.

멍하니 있을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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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

나는 잽싸게 샘 밖으로 나가 카셀에게 수건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손짓으로 펠리어트와 레어넌이 사라진 방향을 알려 주고는 반대쪽으로 달려 나갔다.

* * *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야영지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없이 뛰어오긴 했지만, 레어넌의 말대로 이 주위는 위험한 것들이 득시글하니 조금이라도 빨리 온 길을 되돌아가야만 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물 먹은 부츠 안에서 새어 나오는 찔꺽대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젖은 옷가지들이 몸에 달라붙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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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왜 내게…….”

입을 여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소매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른 땅 위에 계속해서 젖은 자국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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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내게.”

한탄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바람이 불어왔다. 차갑게 식어 버린 피부를 타고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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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련……. 엣취!”

말을 채 끝까지 잇기도 전에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왜인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결국 반쯤 쓰러지듯 서 있는 커다란 고목에 등을 기대고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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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펠리어트와 카셀에 이어 레어넌까지!

고원에 올 때까지만 해도 정말이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더 최악인 것은, 내 곁에는 호위를 자처하며 따라다니는 위너드까지 있다는 거였다.

나는 차분하게 심호흡하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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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인진 몰라도 카셀은 위너드에게 이를 갈고 있고, 위너드도 카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 게다가 카셀은 위너드를 정체불명의 흑마법사라고 생각하고 있어.’

어쩐지 머리가 점점 아파 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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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레어넌은 위너드를 내 일일 시종이었던 데우스 에반으로 알고 있는데, 펠리어트는 호위 기사인 윈켈 밀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고…….’

생각이 정리되긴커녕, 실타래처럼 자꾸만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한 나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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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개판 5분 전이잖아!”

절망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망했다, 난 망했어!

이 사태를 어쩌면 좋지. 응? 어쩌면 좋냔 말이야!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위너드를 끝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가슴이 너무 답답해 하늘에 뜬 밝은 달마저 원망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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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그때, 등 뒤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고개를 돌리니, 놀란 듯 입가를 가리고 서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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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곳에 계세요.”

세이블 릴리였다.

레어넌을 합류시킨 원흉!

나는 이를 갈며 물이 똑똑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대충 짜낸 뒤 그녀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다 젖어 버린 내 모습을 보고도 그녀의 얼굴은 태연자약했다. 역시 방금 놀란 건 연기였나 보다.

그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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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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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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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 놀리냐? 어? 놀리는 거냐고!

제법 날카롭게 되물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뭐라고 쏘아붙일까 하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흰 수건을 발견하고는 그마저도 포기해 버렸다.

어쩐지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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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나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수건을 낚아챘다.

그걸로 머리카락을 꾹꾹 누르듯 말리면서 걸음을 옮기자, 세이블도 기다렸다는 듯 나와 보폭을 맞추며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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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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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쩌다 보니 둘만 있게 된 상황에서, 나는 왜 레어넌을 끌어들였냐는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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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시엘로 단장에게서 보고를 받았는데 말이야…….”

안 그래도 이 문제를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세이블과 단둘이 얘기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좋았다면 좋은 거지.

휑 한 벌판엔 우리 말고 사람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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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우리 뒤를 미행하고 있다던데.”

그 말에 세이블이 발걸음을 멈췄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무감한 보랏빛 눈동자 위로 길고 긴 검은 머리가 휘날렸다.

그걸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살며시 걷어 내는 동작이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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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너도 알고 있었구나.”

그녀의 반응을 보고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시엘로 단장을 고용한 건 나니, 단장이 내게만 정보를 공유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에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 없어 따로 보고받을 것도 없었는데, 최근 반드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한 일이 발생했다.

용병 중에서도 발 빠른 사람들로만 구성된 소수의 정찰대로부터 수상한 남자를 보았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자는 우리의 행동은 물론, 우리가 향하는 길을 전부 하나하나 유심히 지켜보는 모양이었다.

또한 그의 곁을 지키는 서너 명의 호위들이 모두 엄청난 실력을 지닌 것으로 보아 적어도 도적이나 평민은 아닌 듯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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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고용한 사람들도 시엘로 용병단만큼이나 유능하다고 들었어. 그러니 너도 이미 얘기를 들었겠지.”

세이블은 말없이 걸음을 옮겨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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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네가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일부러 무시하고 있는 것 같고.”

나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내 말이 틀렸어?’ 하고 재차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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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일이고, 로렐라 님께 해가 가진 않을 겁니다.”

그녀의 대답은 내 예상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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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차피 서로의 목표만 이루면 그만 아닌가요? 그 과정에서 상대의 발목을 잡거나, 민폐를 끼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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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런데 나도 나름대로 알아본 게 좀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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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요?”

줄곧 다른 곳을 향해 있던 세이블의 눈동자가 비로소 내 얼굴에 닿았다.

드디어 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구나!

그녀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욱 가라앉아 있었고, 또 무척이나 서늘했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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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네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보를 손에 넣어야 한다던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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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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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저 가보를 네 원수의 손에 넘겨주고 싶지 않아서 마음이 급한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수건을 꼭 말아 쥔 채 더욱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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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면 네 가문의 영지에서 원로 회의가 소집된다더라고. 서부에선 원로회 입김이 어마어마하다지? 사람을 죽여도 원로회가 묵인하면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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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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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금방 눈치챌 수 있었지. 거기가 바로 네 복수의 무대란 걸.”

세이블은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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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를 이용해 네 입지를 다지는 것 말고도 그걸 위해 할 게 많겠지. 시간을 맞추려면 당연히 마음이 급할 수밖에.”

세이블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무섭게 핏발이 선 눈동자를 보니, 절대로 호의적인 웃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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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렇게 보지 말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

나는 대충 마른 머리를 정리하며 마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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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수, 내가 도와줄게. 혼자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잖아? 내가 손을 더하면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어?”

여기서부터가 본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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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거기서 하고 싶은 대로 날뛰기만 하면 돼.”

물론 내 목적은 따로 있었다.

세이블이 제안을 수락하게 만든 뒤, 나중에 그 빚을 받아 낼 예정이었다.

내 계획을 위해서는 세이블이 필요하니까. 그것도 서부의 실세인 릴리 가문을 짱짱하게 제압한 그녀의 힘이.

고원에서 서로 물건만 찾고 헤어지지 말고, 좀 더 상부상조해 보자 이거지. 솔직히 이 정도면 우리는 꽤 손발이 잘 맞는 사이 아닌가?

하지만…… 상대는 세이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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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저거 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지극정성으로 캔을 따 줘도 머리 한 번 못 쓰다듬게 하는 배은망덕한 고양이 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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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공짜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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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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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그것도 라이벌 사이에, 어? 내가 널 도와 멋지게 복수에 성공하면 네 주가는 더욱 올라갈 테고……. 아니, 잠깐. 이거 어째 내가 좀 불리한 것 같은데?”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능청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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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일단 그 대가가 뭔지나 말해 봐요.”

세이블은 입술 한쪽을 삐딱하게 끌어 올린 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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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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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절대 아니야.”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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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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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차피 이제 주식도 별로 없을 거고.”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세이블의 입이 어쩐지 딱 멈춰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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