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안 돼? 아니, 돼!
(8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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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안 돼? 아니, 돼!
2022.04.20.
나는 눈앞에 선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잠깐만. 이, 이 사람은…….
“안녕하세요, 레어넌 베르하르트 단장님.”
모두가 굳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세이블이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곳엔 어쩐 일이신지요?”
하지만 한 박자 늦게 말을 잇는 걸 보니, 그녀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임무 수행 중입니다.”
레어넌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무척이나 무뚝뚝했다.
“그러는 여러분은 여기서 대체 무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줄곧 내게 고정된 눈동자도, 어쩐지 좀 화가 난 듯 보였다.
“찾고 있는 게 있어서요.”
세이블이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단호한 말투에선 더 자세한 내용은 말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반면에 나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진 모르겠지만, 들키면 안 되는 것을 들킨 듯한 느낌이었다.
말을 고르느라 입술만 벙긋거리는 사이, 레어넌의 등 뒤에서 사령들이 또다시 기어 나오는 게 보였다.
“아!”
용병 중 누군가가 그쪽을 손가락질하며 외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레어넌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공중에 크게 원을 그리듯 검을 한 번 휘두를 뿐이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서 눈부신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이윽고 아름다운 검을 타고 마치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더니 발아래로 물결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다.
빛에 닿은 사령들은 쩍쩍 갈라지더니 이내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와아!”
그토록 우리를 괴롭게 하던 사령이 한 번에 정리되었다. 순간 내 입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는 세이블조차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볼 정도였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레어넌과 두 눈이 마주쳤다.
평소처럼 다정하기 그지없는 눈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다정함만이 아니라,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레어넌 단장님.”
그때였다. 밝은 빛을 내는 검을 바라보고 있던 세이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임무 중이시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단원들과 함께 마물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레어넌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단원들이라니.
……어디에?
눈에 힘까지 주고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한참 살피자, 비로소 황량한 모래 들판을 가르며 말을 탄 남자 둘이 미친 듯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렇군요.”
나와 함께 그 광경을 보던 세이블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표정 변화조차 없이 말을 이었다.
“갑작스레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이 정말 무례하고 죄송한 일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혹시 저희를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응? 뭐라고?
“보시는 대로 사령들이 끝도 없이 기어 나와 고립되다시피 한 상태입니다. 단장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훨씬 더 빠르고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야! 세, 세이블……!
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얼른 세이블의 팔을 잡았다.
‘기사단이 고원 근처에 얼씬거리면 소문나서 안 된다며!’
입술을 마구 뻐끔거리며 그녀의 단독 결정에 무언의 항의를 보냈지만, 세이블은 그저 눈을 접어 생긋 웃을 따름이었다.
‘기사단의 임무까지 우리가 관여할 수는 없죠.’
뻔뻔한 미소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게다가 여길 돌파하는 방법 중에, 이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해결 방법이 있나요?’
물론 알지, 나도 안다고!
세이블의 말대로 기사단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끼리 돌파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아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
하지만 레어넌 단장은 위너드를 만난 적이 있다. 그것도 내가 일일 외출 시종으로 고용했던 데우스 에번이라고 알고 있다고!
나는 눈동자를 굴려 위너드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행여 후드가 벗겨질까 봐, 망토의 앞섶을 꼭 부여잡은 채로.
그런 그를 주위 용병들이 이상하다는 듯 흘끗거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사라지게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지금 와서 그럴 순 없었다.
펠리어트의 저택에서부터 호위라고 말을 맞춰 놓았는데 유령처럼 불쑥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면, 괜히 더 수상하고 이상할 테니까.
어쩌지? 위너드한테 가면이라도 쓰라고 할까? 이제부터 복면과 너를 한 몸처럼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그때 또다시 그 지긋지긋한 놈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습을 반도 드러내기 전에,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레어넌이 아까 한 동작을 똑같이 되풀이한 덕분이었다.
“알겠습니다. 뭘 찾고 계신진 모르겠지만, 기사단은 제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지켜 드리겠습니다.”
레어넌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동하시지요.”
실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말이었다. 몇몇 용병들이 천군만마라도 얻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건 세이블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의 눈은 조금 다른 의미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점점 생기를 잃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나밖에 없는 듯했다.
* * *
우리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사령들의 땅을 벗어났다.
모든 건 당연히 레어넌 단장 덕분이었다. 물론 그의 단원들도 최선을 다해 우리를 에스코트해 주었지만, 딱히 나설 틈이 없었다.
대륙 최고의 성기사 앞에서 사령들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그저 바람 불면 꺼지는 촛불처럼 그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어느새 고원 저편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각.
아직 어두워지려면 시간이 조금 더 남았지만, 일찌감치 야영지를 찾아 자리를 잡기로 했다. 낮에 사령들을 상대하느라 용병 대부분이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니까.
용병들은 익숙한 듯 밤이슬을 피할 천막을 금방 완성했고, 불침번을 설 순번 또한 일사천리로 정했다.
비로소 마음을 좀 놓아도 될 만한 상황이건만,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말을 아꼈다.
눈이 달려 있다면 누구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침묵 속에서 날이 선 시선을 주고받는 레어넌과 펠리어트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앉아 감격에 찬 얼굴로 ‘전장에서 함께 싸운 분들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고 눈치 없이 떠들던 시엘로 단장조차도 결국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나 또한 레어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오늘 누구보다도 열심히 움직인 펠리어트에게 물을 가져다준 것 말곤 그들에게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괜히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하긴, 두 분은 전장에서도 좀 데면데면하긴 했어…….”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잖아.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나?”
세이블…… 어쩔 거야, 이 분위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 사이에 꼭꼭 숨어 있는 푸른 망토가 보였다. 위너드였다.
그는 레어넌이 자리 잡은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 너도 불안하겠지.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할 건…….’
아까부터 줄곧 마음에 걸렸던 그 용병.
대체 어디에 있지?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다들 비슷한 망토를 두르고 앉아 있어서 한 번에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모닥불 사이를 열심히 누비고 있는데…….
“자, 이제 네 차례다. 갔다 와도 좋다.”
우렁찬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덩치 큰 남자가 누군가의 등을 퍽 소리 나게 때리는 것이 보였다.
큰 소리를 낸 사람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시엘로 단장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부단장 자켈이었다. 그런데 맞은 사람은 누구지?
“네, 형님.”
등을 맞은 사람이 손바닥으로 맞은 곳을 문지르며 일어나더니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바로 저 목소리야! 게다가 커다란 키랑 호리호리하면서도 탄탄한 체형까지!
확신에 찬 나는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 * *
후드를 쓴 남자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헉.
나는 얼른 걸음을 멈추고는 근처 덤불에 얼른 몸을 숨겼다. 벌써 다섯 번째 반복하는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들키진 않은 것 같다.
혹시나 들키진 않을까 숨소리도 죽이며 덤불 뒤에서 잠시 대기했다.
그러고 있으니 곧 무언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혹여 소리라도 들릴까 최대한 조심조심 뒤로 돌았다. 듬성듬성 엮여 있는 덤불 사이로 찬란하게 빛나는 은발이 눈에 들어온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미쳤나 봐, 진짜!
“카셀!”
나는 큰소리로 외치며 덤불 밖으로 뛰어나갔다. 눈앞에 별빛을 가득 담고 출렁이는 아름다운 물결이 보였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그러나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을 받으며 그가 천천히 돌아본 순간, 거짓말처럼 말문이 막혔다.
허리까지 오는 샘 한가운데에서 젖은 은발을 쓸어 넘기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카셀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미, 미안!”
나는 황급히 눈을 가린 채 뒤로 돌았다. 무언가 잘못한 사람처럼 손안에서는 땀이 배어났다.
“씻는 줄 몰랐어……! 아니, 근데 왜…….”
여기에서 씻고 있냐고!
횡설수설하는 와중에도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 들켰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내가 막내거든. 원래 용병단에서는 막내가 제일 마지막에 씻는 거야.”
“뭐? 막내라니…….”
믿을 수 없는 말에 고개가 반사적으로 뒤를 향했다.
“헉.”
헐벗은 몸이 또다시 시야에 가득 담겼다.
“아, 안 돼.”
「‘은발 적안에 목숨 건 사람’ 님이 30만 주를 구매합니다.」
「돼!」
주식이 팔리는 소리조차 묻힐 만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황급히 고개를 바로 했다.
“하아,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려 했는데…….”
첨벙첨벙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정말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
결정적일 때 등장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보다 대체 언제부터 용병 노릇을 하고 있었던 건데? 아니, 심지어 레어넌 단장이 합류했는데, 만약 그가 널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이 계속해서 떠올랐지만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첨벙거리며 물을 가르는 소리가 내게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뭐, 따지자면 이것도 결정적인 순간인 건가?”
또다시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리고…… 젖은 손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 * *
같은 시각.
옹기종기 모인 용병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위너드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깜짝 놀란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그의 곁에 있던 건 모두 레어넌과 펠리어트 사이의 숨 막히는 침묵을 피해 멀찌감치 떨어진 모닥불 앞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좀 좁지요?”
용병 하나가 옆쪽으로 엉덩이를 밀며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로렐라 아가씨의 개인 호위 윈켈. 아니, 위너드는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아니야. 지금 주식 잘 팔고 있고…….”
그는 자신을 이상한 듯 바라보는 용병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스르륵 주저앉은 것도 잠시.
“아니, 아무리 그래도!”
위너드는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윈켈 씨는 대체 언제부터 호위 일을 하신 겁니까? 보아하니 검을 오랫동안 잡은 손이 틀림없군요.”
옆에 앉아 있던 용병이 어느새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가 가 볼 데가……!”
위너드가 어떻게든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했지만 무리였다.
“검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던데, 언제 시간 날 때 대련 한번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는 시엘로 용병단에서도 검술 실력이 가장 좋기로 소문난 자였다.
고원에서의 활약 덕분에, 위너드는 사실 용병들에게서 무척이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
전투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니만큼, 그가 레어넌이나 펠리어트에게 견주어도 지지 않을 실력의 소유자라는 걸 모두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차 한 잔 더 하시지요.”
좀처럼 빠져나갈 길이 없어 위너드가 입술만 초조하게 깨무는데, 설상가상으로 시엘로 단장이 그의 손에 투박한 찻잔을 쥐여 주었다.
양손이 다 잡혀 버렸으니, 손가락을 튕기기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차를 마실 때가……!”
“윈켈 씨. 개인 호위는 그만두고, 우리 용병단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단장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콸콸 채워 주고는, 그 잔에 자신의 잔을 건배하듯 부딪혔다.
“보수는 호위 일보다 몇 배를 더 쳐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스카우트한다.
이글대는 그의 눈빛 속에, 뜨거운 의지가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