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당분간 자리를 좀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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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당분간 자리를 좀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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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당분간 자리를 좀 비워야겠다
2022.04.13.
황량한 모래바람이 부는 고원과는 달리, 세실리카 제국의 수도에는 며칠째 비가 오고 있었다.
오늘도 비가 올 모양인지 하늘엔 잿빛 구름이 가득했지만, 황궁의 첨탑은 여전히 찬란한 금빛을 잃지 않았다.
세실리카의 황궁은 아름답기로 소문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동쪽 끝에 위치한 ‘새벽의 탑’이었다.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그 탑은 깃발이 휘날리는 뾰족한 첨탑 아래에 있는, 마치 드레스 자락을 부풀리는 파니에 같은 우아한 돔 모양의 지붕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돔 아래의 커다란 창문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 탑의 안은, 겉모양보다 훨씬 환상적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시각각 달라지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바닥 무늬 역시 변하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용도에 맞게 꾸며진 화려한 방들로 가득했다.
진귀한 술과 차, 그리고 궐련이 가득 들어찬 살롱은 물론, 커다란 소파와 구름처럼 폭신한 침구가 놓인 휴식 공간, 그리고 황제가 각별히 신임하는 측근을 부를 때 사용하는 개인 알현실까지.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는 이 공간에 드나들 수 있다는 건 가히 특권이라고 부를 만했다.
따라서 새벽의 탑은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권력욕을 부추기는 원흉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이 남자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폐하.”
개인 알현실 문을 빠져나온 그는 다시 안쪽을 향해 절도 있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흔들림 없는 반듯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었다.
온갖 화려한 장식들로 가득한 곳인데도, 그 무엇도 남자보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새벽의 탑을 나오자, 황실 시종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전갈을 건네준 자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자를 따라 별관으로 향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장님.”
흰 정복을 입은 남자가 별관의 티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 여인이 우아하게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바로 멜로즈 백작 부인이었다.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갑자기 뵙자고 청한 건 제 쪽인걸요.”
담백하기 그지없는 레어넌 단장과는 달리, 부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침 단장님께서 오늘 폐하를 뵈러 오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다행이었습니다. 알현은 잘 마치셨는지요?”
“네. 한데 무슨 일 때문에 뵙기를 청하셨는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레어넌 단장이 다소 무뚝뚝한 어투로 물었다.
부인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눈앞의 남자를 탐욕스레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묶은 금발은 하얀색 정복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평소의 다정한 미소와는 달리 무표정한 얼굴 또한 기개가 넘쳐 시선을 끌었다.
언제 보아도 탐이 나는 사내다. 딸들의 반려자가 되어 준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몰려오는 아쉬움을 애써 감춘 백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실은 단장님께 한 가지 부탁을 청하려 합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아직 공표된 건 아니지만……. 돌아오는 추수 감사제에 황후 폐하께서 황궁의 보물들을 모아 큰 전시회를 여실 생각을 하고 계세요.”
“전시회를요?”
“네. 언제나 황실의 좋은 벗이 되어 주시는 귀한 손님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특히 전쟁 때 지원을 아끼지 않아 준 동맹국의 귀빈들을 위해,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황궁의 서쪽 정원 일부를 공개할 예정이라십니다.”
멜로즈 부인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배포가 큰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영광스럽게도 이번 전시회의 모든 계획을 제게 일임해 주셨답니다. 황후 폐하는 물론, 지체 높은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꼭 성공시키고 싶습니다.”
레어넌은 백작 부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날, 보물을 개방된 정원에 함께 전시하려고 합니다. 평생 가도 보지 못할 진귀한 물건을 구경할 기회니,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겠지요. 하지만…….”
부인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걸 보니,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귀한 보물을 정원에 장시간 놓아 두는 것은 위험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황궁 내 정원이라고 해도요. 그래서 말인데, 전시회의 보안을 성기사단에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희에게요?”
“네. 정원 내부에 세워 놓을 장식장 주변에 도열해 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울 겁니다.”
멜로즈 부인은 생긋 웃으며 재빨리 덧붙였다.
“당연히 직접적으로 순찰을 도는 건 황궁 병사들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귀하신 기사단원 분들에게 모든 일을 부탁드릴 순 없죠.”
레어넌은 부인의 속마음을 곧바로 눈치챘다.
제복을 갖춰 입은 성기사단원들이 아름다운 정원 한가운데에 놓인 보물들과 함께 도열해 있다면 확실히 그럴듯한 그림이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황실의 보물을 지키는 성기사단원들의 모습은 매우 상징적이기까지 했다.
에크레투스 성기사단의 이름은 제국뿐 아니라 외국에도 크게 알려져 있으니, 나라 안팎으로 금세 많은 이야기가 퍼져나갈 테다.
특히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가문들의 이름을 누르기에도 안성맞춤이겠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몇몇 가문은, 일반 국민은 물론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황실만큼의 인기를 누렸다. 혹시 그것이 황권의 약화로 이어질까 봐, 황실은 굉장히 초조한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황제와 가까운 사이인 레어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무척이나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니 황후는 전시회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무척이나 반길 것이며, 이후 황실의 위엄을 세워 준 멜로즈 부인에게도 큰 칭찬을 내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레어넌은 입을 굳게 다물고 백작 부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쉽게 승낙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자 멜로즈 부인은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단원 전부를 동원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정원을 채워 주실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답니다.”
“그건 곤란하겠군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께 말씀드려 후에 큰 치하를 내릴 수 있도록……. 네?”
그가 망설임 없이 단칼에 거절하자, 멜로즈 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많은 단원의 공력이 소모되었습니다.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단원이 있음은 물론, 부서지고 망가진 장비를 재점검하느라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시회 경비는 황궁의 일반 병사들에게 일임하시는 게 좋겠군요.”
“하, 하지만 모처럼 황후 폐하께서 계획하신 행사라……!”
멜로즈 부인은 저도 모르게 황후를 들먹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레어넌은 그마저도 가차 없이 잘랐다.
“성기사단은 제국의 심장을 지키는 곳이나 다름없습니다. 큰 전쟁을 겪은 뒤라고 해도 빨리 기강을 되찾지 못하면 이는 분명 또 다른 위험으로 이어질 겁니다.”
늘 부드러웠던 그의 눈빛 또한 매섭게 변해 있었다.
“전시회의 경비는 다른 분들이 충분히 대신할 수 있지만, 성기사단이 하는 일은 누구도 대신하지 못합니다. 황후 폐하도 분명 이해해 주실 겁니다.”
“…….”
“기대에 부응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부인의 입은 풀로 딱 붙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눈동자는 어쩔 줄 모르는 듯 이리저리로 배회했다.
그런데도 레어넌은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더했다.
“먼저 일어나 봐도 되겠습니까?”
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하게 변한 백작 부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레어넌은 묵례를 한 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멜로즈 부인에게 말한 것처럼, 성기사단이 무척 바쁜 건 사실이었다. 전쟁 후 내부를 다시 정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장에 나가느라 하지 못했던 일들이 잔뜩 밀려 있었으니까.
그중 가장 급한 것이 바로 마물에 관한 제보였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터전은 물론, 목숨마저도 위협받을 수 있는 일이라 성기사단은 그것들을 빠르게 조사하고 알맞은 조치를 해 나가는 데 총력을 다했다.
레어넌은 제국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마물 제보를 일일이 살피는 것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마물의 등급에 따라 경중을 분류한 뒤, 심각하리만치 위험한 상황은 본인이 직접 나서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지부장들에게 알려 처리를 맡겼다.
물론 그가 나서야 할 만큼 위험한 마물이 출몰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기에, 대부분은 처리 후 보고를 받았다.
“단장님께서 이런 험한 곳까지 오시다니…… 송구합니다.”
성기사단 제복을 입은 남자가 레어넌의 곁에서 민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기사단의 수많은 지부 중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지부장이었다.
그러나 레어넌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바로, 발아래 펼쳐진 평평한 고원이었다.
그간 있었던 일들이 뇌리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황궁의 오찬이 끝난 뒤, 로렐라는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해 보였다. 그 우울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생생했다.
그녀는 티를 내긴커녕, 평소처럼 밝은 미소로 그를 대해 주었지만 모를 수 없었다. 일거수일투족, 계속 그녀를 지켜봤으니까 작은 표정 변화 하나도 모두 알 수 있었다.
그저 자신의 기우이길 바라면서, 레어넌은 그날 황후가 준비한 뒤풀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았다.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이자, 베르하르트 가문의 차기 가주인 그에게 진상을 파악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부인을 통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커다란 분노에 휩싸였다. 동시에, 로렐라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저 즐겁게 해 주고 싶어 데려간 자리였는데, 그런 일을 당하게 만들다니.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한편으론 상처받았을 그녀의 마음을 치유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상처가 될까 싶어 쉽사리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저 속만 끓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서신을 주고받았다.
하루하루 머릿속만 계속 복잡하던 중,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서쪽 지방에서 열리는 한 모임에 초대되어 로렐라가 잠시간 저택을 비운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몰랐겠지만, 거긴 성기사단의 지부가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애타는 그의 마음을 하늘이 알아주기라도 한 것인지, 마침 같은 시기에 지부 회의가 잡혔다. 본래라면 부하를 보냈겠으나, 레어넌은 만사를 제치고 지부 회의에 직접 참석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열리는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혹시 시기를 잘못 알아 한발 늦은 것일까?
레어넌은 더 지체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곧장 돌아가, 실례를 무릅쓰고 로렐라의 저택을 찾아갔다. 그러나 집사는 그녀가 서쪽 지방의 모임에 갔다는 말뿐이었다.
참석할 거라는 모임엔 참석하지 않았고, 저택에도 돌아오지 않다니. 그럼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제아무리 레어넌이라 해도 이런 상황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로렐라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제국 전체에 퍼져 있는 성기사단 지부는 물론, 그의 명령을 따르는 다른 기사들까지 합치면 레어넌은 수천 개의 눈을 갖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앞엔 얼마 지나지 않아 두툼한 서류가 도착했다.
모든 직속 산하 단체와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는 사설 기사단, 그리고 영지와 마을의 안전을 책임져 주는 기사들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는 지역민들로부터 취합한 정보였다.
물론 허락 없이 남의 뒤를 캐는 건 파렴치한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땐,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끌려간 것도,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다.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몹시 서운했다.
모임에 간다던 그녀가 왜 하필 북부에서 모습을 드러냈는지, 왜 용병이 필요했던 건지. 자신에겐 어째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건지.
수많은 감정이 요동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오랜 고민 끝에 레어넌은 로렐라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마음을 열라고 그녀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냥 기다리자. 그녀가 말해 주기를.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내 감정을 확실하게 전하자.
언젠가부터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그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되고 싶다고.
그런데…….
‘그녀가 고용한 용병단들이 향한 곳.’
그의 앞으로 도착했던 서류를, 레어넌은 수십 번 읽어 내려갔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위험한 곳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솜씨 좋은 용병단을 고용한다 해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곳이었다. 성기사단장인 레어넌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단원들을 이끌고 고원으로 직접 향하기로 했다.
“일단 보고된 건 하급 마물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고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지부장이 자기만 믿어 달라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원 밖으로 기어 나오지 않도록, 경계를 따라 성력을 확실하게 쳐 두면…….”
“아니.”
하지만 레어넌은 단칼에 말을 잘랐다.
“내가 직접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