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카셀 아니고 카일
(81/173)
81화. 카셀 아니고 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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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카셀 아니고 카일
2022.04.09.
펠리어트가 쓰는 활은 체임버스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중 하나였다.
웬만한 궁수들도 버거워할 만큼 평범한 활보다 훨씬 크고, 무게도 배는 더 무거운 것이었다. 위력도 그 이상으로 강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 활을 든 채로, 높은 나무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어딘가를 겨냥 중이었다.
귀하신 몸이 행여나 다치기라도 할까 봐 염려한 시엘로 단장이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수포였다. 심지어는 밑에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건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다.
애초에 방해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동행을 허락받았는데, 아무래도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이 그녀를 에워싸는 것이 보였으니까. 그는 지체하지 않고 화살을 줄에 걸었다.
로렐라는 주변을 살피더니 세이블 릴리의 손목을 잡은 채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 쪽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킬킬거리며 거리를 좁히는 도적들을 보고, 그의 손아귀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 활시위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만큼 거세게 당겨졌다.
하지만 화살은 날아가지 못했다. 그녀와 도적 두목 모두 쓰레기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섣불리 먼저 공격했다간 도리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사각지대로 들어가다니.
그나마 다행히 쓰레기더미엔 그들의 움직임이 보일 만큼의 빈틈이 있었다.
저 정도의 틈만 있어도 놈을 쓰러뜨리기엔 충분했다.
‘다섯 발이면 퇴로를 만들기엔 충분하겠군.’
갑자기 동료들이 쓰러지면 놈들은 십중팔구 당황해 우왕좌왕할 것이다. 그렇게 로렐라에게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고, 그사이 시엘로 단장이 바로 진압에 들어가면 문제없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펠리어트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잡동사니들 사이로 보이는 아주 작은 구멍을 향해 날카로운 화살을 겨냥했다.
그때였다.
로렐라가 서 있는 부근에 삽시간에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방으로 도적들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주변을 메운 연기 때문에 안을 확인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거친 욕설과 함께 활시위를 느슨하게 했다. 식별되지 않는 상황에서 잘못 화살을 쐈다간 로렐라를 맞출 수도 있다.
이젠 일이 커지든 말든, 직접 안으로 들어가 진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벽 근처에서 대기하던 시엘로 단장도 같은 생각인지 용병들을 향해 다급히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급히 움직인 탓에 딛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어떤 것도 그를 지체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한데 그 순간, 묘한 광경이 눈에 밟혔다.
방벽 근처에서, 한 남자가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있었다.
‘저자는 분명…….’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을 보니 로렐라가 고용한 호위 검사가 틀림없었다. 그의 팔에 매달린 화살통도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여전히 연기로 가득한 방벽 안쪽에서 무어라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호위가 또다시 활을 쏘았다.
주인이 위험한데 허공에 활을 쏘는 호위라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그 모습을 오래 살필 시간은 없었다. 머릿속엔 그저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으니까.
“당장 안으로 들어간다!”
뛰어내리다시피 땅으로 착지한 펠리어트가 거칠게 소리치며 방벽 쪽으로 달렸다.
용병들이 날카로운 갈고리가 매달린 밧줄을 가져왔다. 그것을 방벽에 걸기 위해 모두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팔을 휘두르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무언가 날아오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벽 한쪽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펠리어트는 반사적으로 망토를 들어 눈 앞을 가렸다. 먼지와 파편들이 머리 위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여기저기서 콜록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너진 방벽 사이로,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다들 괜찮은가?!”
시엘로 단장이 거칠게 외쳤다.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으니 각별히 조심하라!”
갑자기 방벽은 왜 부서진 거며, 방금 날아온 건 뭐였지?
하지만 펠리어트는 의문을 품을 새가 없었다.
누군가 무너진 방벽을 넘어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로렐라!”
그 또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부서진 벽을 넘어 안쪽으로 급히 뛰어 들어간 순간.
그의 눈앞에 상상도 하지 못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의 발치에 무릎 꿇고 싹싹 빌고 있었다.
로렐라는 남자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흐악!”
그저 그뿐인데도, 그의 입에서는 공포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발 목숨만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로렐라가 머리칼을 쓸어 올리더니 성가시다는 듯 어딘가를 향해 고갯짓했다.
“빨리 저거나 열어.”
바로 다리로 향하는 문이었다.
“네, 넵……!”
큰 소리로 대답한 남자는 차마 일어날 힘도 없는지 엉금엉금 기어 문 쪽으로 향했다.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남자와 로렐라를 말없이 바라보던 펠리어트는, 단장의 목소리가 들린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다들 무사하십니까!”
단장을 선두로, 용병들 모두가 우르르 방벽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로렐라의 고개도 펠리어트를 향했다.
비로소 그를 알아본 붉은 눈이 커진다 싶더니.
“모두 무릎 꿇고 땅에 이마가 닿도록 고개를 조아려라!”
그녀는 도적들을 향해 서슬 퍼런 고함을 질렀다. 무척이나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감히 눈을 뜨는 자가 있다면, 전부 돌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러자 도적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사시나무 떨리듯 몸을 떠는 놈도 있었다.
펠리어트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는 사이, 로렐라가 곁으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재빨리 그의 망토 후드를 꾹꾹 누르듯 잡아 씌웠다.
“누가 알아보면 어쩌려고!”
“잠깐. 이게 대체…….”
“얼굴, 얼굴부터 가려!”
방금까지 태연자약했던 것과는 달리, 숨이라도 넘어갈 듯 다급한 목소리였다.
* * *
무사히 다리를 건넜을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로렐라 일행은 다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천막을 쳤다. 저 멀리 도적들의 부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눈으로 확인되는 거리였다.
용병단장과 펠리어트는 도적들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잠자리를 마련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세이블은 딱 잘라 만류했다.
‘조금만 더 가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령이 출몰할 겁니다.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밤보다는 낮에 이동하는 게 나아요.’
펠리어트가 또다시 날카롭게 반문했다.
‘근거는 뭐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펠리어트로서는 도적들의 야습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하지 않은 세이블의 말을 믿고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이블도 워낙 쉽게 물러나지 않아 두 사람의 팽팽한 기 싸움이 이어졌다.
결국 그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로렐라밖에 없었다. 그녀는 밤에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는 이유로 세이블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녀가 나서자 펠리어트도 얌전히 수긍했고, 용병들은 능숙한 솜씨로 잠자리를 뚝딱 완성했다. 비록 건량으로 해결하긴 했지만, 식사도 배불리 마쳤다.
보초를 설 순번까지 정하고 난 뒤, 용병들은 줄곧 궁금했던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로렐라가 허리에 차고 있는 작은 주머니였다.
“호오, 대단합니다!”
“저도 마법 도구들을 종종 보긴 했지만, 이런 건 처음 보네요.”
고원에 숨어 강도질로 근근이 먹고살아 가는 도적과는 달리, 용병들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마물을 퇴치하는 성기사단의 힘을 지척에서 지켜보기도 했고, 신비한 힘을 지닌 마법사들과 함께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힘에 익숙한 만큼, 그들은 그녀가 가져온 도구들의 가치를 잘 알았다.
“황실 마법사도 그 정도 범위의 마법을 병에 담기는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군요.”
“실력이 몹시 뛰어난 자인가 봅니다. 심지어 이렇게 종류가 이렇게 많은 걸 보니.”
한참이나 마법이 담긴 병들을 차례로 들여다보던 시엘로 단장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괜찮으면 제게도 소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희 용병단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로렐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자신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리를 까닥대며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 * *
불침번을 서던 이가 가물가물한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야심한 시각.
얼기설기 엉성하게 엮인 나뭇가지들로 덧대어진 부서진 방벽 근처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셀의 부탁을 받고 찾아온 시드였다.
그는 고원에 출몰하는 각종 방해물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사람처럼 매우 말끔한 모습이었다.
한시가 급하다는 카셀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순간 이동 마법 도구를 쓴 덕분이었다.
‘어디 있지?’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시드의 눈에 곧 익숙한 얼굴이 포착되었다.
카셀은 동강 난 통나무의 잔해를 방석 삼아 앉아 있었다. 혼란한 틈을 타 그가 직접 부숴 버린 방벽의 일부였다.
“왔어?”
인기척을 눈치챈 카셀이 반갑게 눈을 찡끗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은발은 부드럽게 흔들렸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이 미친놈아.”
시드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데도 카셀은 예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내일이면 사령들의 땅에 들어가게 된다잖아.”
“…….”
“게다가 오늘 하나를 써버렸고.”
시드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며 카셀의 손에 작은 주머니를 말없이 쥐여 주었다. 그 안을 가득 채운 건, 보랏빛 연기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내가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사령을 제거하는 마법이 들어 있는 이 병은, 개당 마차 세 대 정도의 가격에 거래되는 거였다. 그런데 한 병도 남기지 말고 길드에 있는 걸 전부 가져다 달란다. 이 많은 걸!
그뿐이랴. 날이 밝기 전까지 반드시 가져다 달라는 명령 때문에 순간 이동 마도구까지 써야 했다.
고작 이런 일에 쓴 돈이 얼마인지. 그것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사랑에 한 번만 더 빠졌다간 길드가 아주 거덜 나겠네. 거덜 나겠어!
심지어 이렇게까지 해 주고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르지 않는가. 시드로서는 그것도 이해가 어려웠다.
“카셀, 대체 왜 네가 왔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시드는 누구보다도 카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자기애가 강한 카셀이, 본인의 정체까지 숨기고 남몰래 뒤를 쫓아다닌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걱정되어서 따라왔다고 하면 되잖아.”
하지만 카셀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왜?”
“……그러면 결정적인 순간에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잖아.”
그는 보기 드물게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움이 역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짠 하고 나타나 그녀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다, 이 말이지?
이걸 응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시드는 고민하길 포기했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문제니까.
그때였다. 임시로 덧댄 방벽이 조금 흔들린다 싶더니, 그 위로 누군가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저 새끼야.”
카셀이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구?”
“누나를 위협한 대머리.”
“아…… 그래?”
살기 띤 붉은 눈동자를 본 시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웬일로 그냥 뒀네?
평소라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감히 누나에게 손댄 새끼 어쩌고 해 가면서.
하지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아까 누나가 이야기하는 걸 살짝 들었는데,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 같더라고.”
카셀은 말끝에 하아, 하고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정말 많은 걸 참고 있구나.
시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카셀이 인내를 배우다니.
……솔직히 평생 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이것이 사랑의 힘인가?
진심으로 감동한 그가 코끝을 쓱 문지른 그때였다.
“으히힛!”
어디선가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 대머리 남자였다.
그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마구 킬킬대더니 이내 손에 횃불과 작은 통을 들고 망가진 벽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통 안에 든 무언가를 나무 주변에 뿌려 대기 시작했다.
진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가 횃불을 뽑아 든 순간, 도적 여러 명이 다급히 달려와 남자의 사지를 덥석 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두목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워낙 상황이 긴박한 탓에 부하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그를 거칠게 다뤘다. 땅바닥에 짓눌렸는데도, 해괴한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대머리는 부하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울먹이며 외쳤다.
“나를 죽여다오!”
뭐지? 좀 이상한데? 원래 저런 놈인가?
의문도 잠시.
옆에서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셀……?”
어느새 그의 입가엔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치 악마와도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순간 시드의 머릿속에 여러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해 괴롭게 정신을 놓았다가도, 이성이 돌아오면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던 놈들 말이다.
카셀은 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지은 표정도 이런 미소였다.
……설마 아니겠지.
그놈들은 카셀의 이름을 팔아 멋대로 큰 부를 축적했거나, 길드를 배신한 자였다. 저런 선량한 도적 두목이 아니라…….
아니, 물론 도적을 선량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친놈 곁에 있다 보니 나까지 미쳐 가나 봐!’
시드가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리며 혼란스러워하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일! 어이, 카일! 인마, 어디 있냐!”
그러자 카셀이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나 갈게! 부단장 형님이 부르셔서.”
그 말만 남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카셀!”
순식간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시드는 다시 한번 크게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카셀! 야!”
하지만 카셀. 아니, 카일은 조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