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본때를 보여 주겠다 (80/173)


80화. 본때를 보여 주겠다
202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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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나는 스멀스멀 밀려오는 민망함을 애써 외면한 채 그녀를 향해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러자 세이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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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직접 가죠.’

 
세이블이 펠리어트를 제치고 나섰을 때, 나는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나마 허공을 향하는 걸.

아마도 ‘언니 멋져! 언니 날 가져요!’ 하며 주식이 팔린 거겠지.

그러니까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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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다고! 황궁의 보물도 찾고, 주식도 팔 거야!’

내가 다 가질 거야!

그렇게 거듭 다짐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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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누추한 곳에 찾아온 손님이 누구신가 했더니…….”

어느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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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눈 호강 좀 하겠는데.”

대머리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덩치가 큰 남자였다. 그가 두목인 듯 호위까지 대동했으며, 곁에는 재갈을 입에 물고 으르렁대는 늑대 두 마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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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뭘 대접해야 귀하신 분들 성에 차려나.”

그는 우리를 연신 기분 나쁘게 훑어보며 킬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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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라도 대접할까?”

그러자 세이블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툭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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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니 용건만 간단히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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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 좋지. 내 방에서 느긋하게 술이나 한잔하면서 얘기하면 되겠군.”

두목이 아랑곳하지 않고 히죽거리기만 하자 세이블이 후드를 벗었다. 그러고는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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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죽고 싶지 않다면.”

서슬 퍼런 기색에 남자가 순간 움찔했다.

나도 지지 않고 옆쪽에 쓰러져 있는 통나무 위로 쿵! 소리가 나도록 한 발을 얹은 채 거칠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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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정말 더럽기 짝이 없군! 돼지도 혀를 빼물고 죽을 것 같은 곳이야!”

띵동!

「‘이 구역 주접킹’님이 응원의 손뼉을 치며 로렐라 님의 주식을 1000주 구매합니다.」

「귀염뽀쨕걸크가 나가신다♡ 울 언니 하고 싶은 거 다해……♡」

그야말로 귀염뽀쨕 한 주식이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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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이러길 바란 건 아닌데…….’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서, 그런 노림수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두목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를 일제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 여잔 뭐야?’라고 말하듯 황당한 눈빛으로.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기세등등하게 올렸던 발을 조용히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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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즈 다리를 건너야겠어요.”

그사이 세이블이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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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세는 충분히 지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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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통행세?”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세이블을 훑어보았다. 처음 느꼈던 소름 끼치는 시선은 아니었으나, 탐색하는 듯하여 다른 의미로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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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아가씨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화끈하시네.”

하지만 웃는 낯도 잠시, 그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음산하게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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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골드. 당연하지만, 한 푼도 깎아 줄 수 없어.”

뭐? 500골드?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와, 칼만 안 들었지 이놈들 순 강도잖아! 아니지, 아니야. 이 사람들은 원래 강도지, 참…….

내가 놀라서 황당해하는 사이, 세이블은 망설이지도 않고 자루 하나를 턱 던졌다. 꽤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두목의 고갯짓에 수하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달려들어 주머니를 풀고 재빠르게 금화를 세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수하 중 하나가 낄낄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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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 정확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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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문을 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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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좋아.”

하지만 세이블의 말에도 남자는 괜히 손끝만 튕기며 딴청을 피웠다. 어쩐지 불길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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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들만 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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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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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있는 호위 병사들의 몫은 안 냈잖아.”

남자가 밉살맞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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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너희들 몫이고, 호위 병사들까지 데려가려면 더 내야지. 난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까 호위 병사들도 500골드만 받을게.”

말도 안 되는 계산이었다. 모든 사람의 통행세로도 500골드는 과한데, 그게 고작 우리 두 사람의 분이었다니.

하지만 세이블은 또다시 자루 하나를 더 던졌다. 말릴 틈도 없이 재빠른 동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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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까…….”

허공에 뻗은 손이 무색했다. 생각도 안 하고 내고 보다니, 얘는 돈이 썩어 나나!?

속이 답답했지만 이미 줘 버린 것, 하는 수 없었다. 손해는 막심해도 결과적으로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으면 됐지.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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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제 남은 건 딱 하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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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뜻밖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니, 아직도 남은 게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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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멋대로 죽인 짐승들의 값을 쳐주셔야겠어.”

남자는 이제 웃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커다란 도끼를 빼 든 채 위협적으로 휙휙 돌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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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사체 때문에 까마귀들이 밤새 울어 대는 통인데,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두둑하게 챙겨 주셔야겠어. 내가 굉장히 아끼는 놈들이라서 말이야.”

아끼긴 개뿔. 그럼 데려와서 이 앞마당에다 풀어 놓고 키우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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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고 싶으면 가진 걸 다 내놓으셔야지.”

두목은 시커먼 치아를 드러내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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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안 내놔도 상관없어. 아가씨들이 험한 꼴 보기 전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사분들이 아주 두둑하게 주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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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세이블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당연했다. 저들은 우리를 순순히 보내 줄 마음이 전혀 없다. 아마도 은화 한 닢 남지 않을 때까지 모조리 뜯어내려 할 것이다. 우리를 인질 삼아서라도.

심지어는 그러고도 문을 열어 주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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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지나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군요.”

혹시라도 갑자기 달려들까 봐 긴장하고 있는데, 세이블이 내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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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을 쓰죠. 조금 귀찮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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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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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죽일게요.”

……네?

지금 뭐라고?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입술조차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소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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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를 대비해 특별히 고용한 자들이 있으니 금방 끝날 거예요.”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보랏빛 눈동자에는 마치 불꽃 같은 기묘한 이채가 일렁였다. 목소리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 진심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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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안 돼.”

나는 황급히 세이블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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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 님이 참견할 일이 아니에요.”

그녀는 싸늘하게 일갈하며 나를 쳐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아니, 얘 좀 봐. 왜 내가 참견을 못 해!?

네가 그러면, 내 계획은 상상 이상으로 꼬여 버릴 수도 있는데!

어째서냐고?

황제가 제정한 법을 어긴 자는 그 어떤 공로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황실의 규칙이 있으니까!

그중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사사로운 이유로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문제는, 여기서 ‘사사로운 이유’라는 게 황제의 자의에 따라 해석이 너무나도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찾아낸 보물을 앞세워 황궁에 입성하게 되면, 당연한 말이지만 황제는 보물을 찾은 경위를 자세히 듣고 싶어 할 것이다.

당연히 도적 떼에 관한 이야기도 묻겠지. 용병단들도 알고 있는 이 흉흉한 무리에 관한 소문을 황궁에서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실토할 때,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령 비밀로 한다 해도 영원히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물론 골칫덩어리인 도적들을 깨끗하게 없애 주었다고 공을 치하할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론 진압하지 않고 죽여 버렸다고 벌을 내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날 황제의 기분에 모든 걸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더 최악은, 황후가 중간에 나서서 ‘법을 어겼다’라는 이유로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건 결국 황실에 보물만 꿀꺽할 기회를 주는 것밖엔 안 된다. 내가 개고생을 한 보람도 없이!

그사이, 도적들은 우리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작게 혀를 찬 세이블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맞붙인 채 입술에 가져다 댔다. 휘파람을 불려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입술을 덥석 막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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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구나. 내 정체를 드러내는 수밖에!”

세이블의 눈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휘둥그레했다. 대체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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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제발 한 번만 나한테 맡겨!’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마음속 외침을 전했다.

난 꼭 황궁에 당당하게 입성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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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나서지 않으려고 했건만…….”

그녀의 입에서 손을 뗀 뒤, 그대로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위엄 있게 천천히 말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뒤쪽에 몇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리를 지켜볼 용병들의 눈을 피하기에 딱 안성맞춤인 장소가 있었다.

통나무로 만든 벽 아래 타다 만 나뭇가지와 버려진 천막 같은 잡동사니들이 산처럼 쌓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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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라면 시야를 가릴 수 있겠지.’

방벽 너머 높게 솟은 나무 위에서 펠리어트든 시엘로 단장이든 누군가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텐데, 지금 모습을 봤다간 먼저 공격을 감행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걸 위해서라도 사각지대에 있어야만 했다. 내 큰 그림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도적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히죽대며 토끼몰이라도 하듯 나와 세이블을 에워쌌다.

장애물에 내 몸이 완전히 가려진 뒤, 나는 곧장 망토를 벗어젖혔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허리까지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세이블은 무슨 속셈이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지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그냥 믿어 주길 바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 끈을 슬쩍 풀었다.

오묘한 빛을 담고 있는 작은 유리병들이 달그락대며 부딪히는 순간,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잘될까? 확신은 없었지만 세이블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분명 먹힐 거다.

그사이, 도적들은 도망갈 틈도 없이 우리를 에워쌌고 두목이 음흉한 눈빛으로 킬킬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쥐고 있는 도끼의 날이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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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히만 있으면 나쁘게 대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표정을 관리한 채로 주머니 안에서 주사위 모양으로 생긴 작은 유리병을 손에 쥔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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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이분이 누군지 알고 그렇게 무례한 건지 모르겠군요.”

갑자기 세이블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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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서지 않으면 사지가 찢겨 죽게 될 겁니다.”

눈치챘다, 눈치챘어! 역시 세이블이야!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한쪽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내게는 틈을 봐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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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카셀의 태평한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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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한 방이면 반경 500M 안의 사령들을 전부 없앨 수 있어. 연기가 엄청나게 피어오르겠지만,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으니 안심해.’

 
떨리는 마음으로 가격을 물었을 때, ‘글쎄, 마차 세 대쯤?’이라던 천진난만한 대답도.

아오, 아까워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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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원하면 그렇게 하시지요. 할 수 있다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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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비틀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그 말을 후회하게 해 주지.”

헛되게 쓰일 돈만 생각해도 화가 나는데, 비꼬는 말까지 들었더니 절로 분노가 우러나왔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말하자 남자가 심상치 않다 생각했는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유리병을 발밑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척 봐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색 연기가 퍼져 올랐다. 마치 화산이라도 폭발한 것처럼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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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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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수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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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님! 어디 계십니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기 속에서 도적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두목 또한 황급히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우왕좌왕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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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세이블은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가까이 있는 그녀의 얼굴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두목은 오히려 그 말에 마음이 급해졌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음산하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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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힘이여. 저자의 왼쪽 목 옆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남겨둔 채 스치거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언가가 남자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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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억!”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연기를 가르고 자신에게 똑바로 날아오는 화살을 본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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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여기 오기 전 위너드에게 화살을 들고 최대한 가까이 있어 달라고 말하길 잘했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봐 있는 힘껏 크게 소리친 건데 생각대로 되어 줘서 다행이었다.

두목의 비명을 들은 다른 도적들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쳤으나, 가까이 다가오진 못했다. 연기가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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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것들이……! 죽여 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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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의 오른쪽 목 옆!”

나는 넘어졌다가 도끼를 꽉 쥐고 일어나며 눈을 부라리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외쳤다.

그러자 그가 급히 숨을 삼키더니 날아오는 화살을 보곤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공중에서 날아가던 화살이 갑자기 휙, 방향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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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이익!”

신음 소리와 함께 통나무 벽에 화살이 퍽, 하고 박혀 들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목이 꿰뚫렸을 만큼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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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어딜 맞춰 줄까.”

나는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남자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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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까이 오지 마!”

그는 창백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댄 채 마구 소리 질렀다. 공포로 인해 사지가 굳어 버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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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마법사!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거야……!”

혼비백산한 모습을 보며 나는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처럼.

하지만 바로 정색하고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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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의 가랑이 사이, 손가락 반 마디 아래.”

화살은 내 말을 착실하게 따라 주었다.

탁!

쌩하니 날아온 화살이 통나무를 깊게 파고든 순간.

그의 바지 한가운데가 젖어 드는 게 보였다.

그 광경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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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중에 전부 회수해 가려고 했는데.’

저 화살은 버려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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