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설마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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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설마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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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설마 아니겠죠?
2022.04.02.
나와 세이블은 말을 달리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방향을 확인했다.
피 냄새를 맡았으니 여기저기서 짐승이 몰려들 거라는 시엘로 단장의 말처럼, 쉬지 않고 나타나는 맹수들을 처치하느라 용병들의 팔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들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선 최대한 정확한 길로 향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막 고원에 발을 디뎠을 뿐이니, 벌써부터 힘을 빼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웨즈 다리 쪽을 가리키는군요.”
다시 한번 나침반을 확인한 세이블이 내게 그걸 건네주더니 지도를 둘둘 말아 품에 넣었다.
“그럼 도적단의 촌락을 지나는 것도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소리네.”
“어쩔 수 없죠. 예상했어요.”
그녀는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한 손엔 검을 뽑아 든 채였다.
너른 평야는 말 위에 앉아 있으면 시야 확보가 수월했다. 나는 고삐를 고쳐 쥐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땅 위를 빼곡히 뒤덮은 억새가 바람에 이리저리 한들거리는, 어찌 보면 평온한 풍경이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수풀 사이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이리들이 펄쩍 뛰어오르며 사람들을 향해 달려드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갱! 하는 울음과 함께 피 냄새가 풍겼다. 그런데도 짐승들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지도를 꺼내 방향을 확인하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움직일게요.”
내 말에 시엘로 단장이 둥글게 흩어져 우리를 감싼 용병들에게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냈다.
일제히 말을 움직여 말발굽 소리가 울리자 주변의 풀숲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광경이었다.
‘우리가 움직인다는 걸 눈치챘구나.’
긴장을 풀지 않고 말고삐를 더욱 단단히 감아쥐던 찰나.
“조심하십시오!”
바로 앞에 있던 용병이 창을 고쳐 잡으며 외쳤다.
동시에 푸른 망토가 눈앞에서 그림처럼 펄럭였다.
날카로운 검날 위로 눈부신 햇빛이 번쩍인 순간, 붉은 선혈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쿵, 소리와 함께 족히 3m는 되어 보이는 이리 한 마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용병들이 틈 없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동을 위해 말을 움직인 틈을 타 달려든 모양이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저 날카로운 발톱에 찢겼을 걸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번개처럼 나타난 남자는 나지막이 숨을 내쉬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절대 먼저 앞서가지 마.”
정말 호위라도 된 것처럼 내 곁에 딱 붙어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았던 위너드였다.
“되도록 나랑 속도를 맞춰.”
그는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검을 허공 위로 두어 번 털어 내며 신신당부했다.
피는 검뿐 아니라 위너드의 몸 여기저기에도 묻어 있었다. 망토와 신발은 물론, 얼굴을 가린 복면에까지 핏방울이 튄 흔적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불쑥 걱정이 차올랐다.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검을 배웠다고 말하는 걸 듣긴 했지만 얼마나 배운 건지, 그리고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내가 검을 모르니 더더욱 그랬다.
나는 말의 속도를 약간 늦추며 오른쪽에 바짝 붙어 있는 위너드에게 속삭였다.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러다 진짜로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뭘 당해?”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다칠까 봐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어쩌다 보니 호위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은 아니잖아.”
그렇게 둘러댄 건 어디까지나 펠리어트 앞에서 무사히 넘어가기 위해 한 말이었다.
“실력 좋은 용병들이 주변에 가득 있으니까…….”
네가 직접 나서서 위험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색의 무언가가 나와 위너드 사이를 쏜살같이 가르며 날아갔다.
선두에 선 용병단장에게 돌진하던 맹수가 풀썩 쓰러지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화살이라는 걸 알았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왔고, 짐승들은 그때마다 어김없이 픽픽 쓰러졌다.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움직여.”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검은 말 위에 앉은 펠리어트가 어느새 왼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간에 내가 엄호해 줄 테니.”
펠리어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한마디만 툭 던졌다.
‘신들린 듯한 활 솜씨는 조금도 녹슬지 않으셨군요. 공작님께서 몸소 땀 흘리는 모습을 보니 예전에 함께 전장을 누비던 때가 생각납니다.’
펠리어트 곁에서 호탕하게 웃던 시엘로 용병단장의 말이 떠올랐다.
물론 그가 얼마나 활을 잘 다루는지는 나도 잘 안다. 사냥 대회 때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까.
그렇긴 한데…….
‘그에겐 아직 마물에게 당한 상처가 남아 있잖아.’
그걸 알고 있는 건 아마도 나뿐이겠지. 만약 나를 돕다가 상처가 또 덧나기라도 하면, 그래서 다치기라도 하면 그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용병단을 소개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왜 이렇게…….”
“왜냐니. 그게 무슨 의미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혼잣말이었는데, 들은 모양이었다.
“아, 아니야.”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선은 여전히 검은 장갑을 낀 그의 손에 둔 채.
“……조심하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벌써 파악한 모양이었다. 펠리어트는 걱정 말라는 듯 고요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을 들으니 무겁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아까 당황한 나머지 펠리어트에게 당장 돌아가라고만 했지, 제대로 고마움을 표한 적은 없다는 게 떠올랐다.
“매번 이렇게 큰 도움을 줘서 정말 고마워.”
대답 대신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눈빛 또한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때였다.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무언가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한 번.
위너드는 묵묵히 앞을 바라본 채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배는 빠른 속도였다.
동시에 왼쪽에 있던 펠리어트도 재빨리 화살을 당겼다.
조용한 침묵이 계속되는 가운데, 양옆에서 쉴 새 없이 바람이 일었다.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연신 넘겨 가며 두 사람의 동작을 눈으로 좇았지만 이내 포기했다.
둘 다 너무 빨라서 시선으로 따라가기조차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둘이 내기한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렇게 경쟁하듯 구는 거야?
덕분에 도통 포기를 모르던 이리 떼들이 점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을 가하는 놈들조차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언제든 공격할 수 있도록 창을 고쳐 쥔 용병들은 그저 머쓱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기껏 출정했는데 힘을 쓸 일이 없으니 민망할 테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기다란 통을 괜히 고쳐 맸다.
‘이건 언제 쓰지?’
통 안에는 카셀에게서 받은 화살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사냥 대회 때 썼던 것처럼 마법이 걸린 화살이야. 이건 짐승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맞출 수 있어. 맞추고 싶은 대상이나 위치를 속삭이기만 하면 돼. 오로지 누나의 목소리에만 반응할 테니까.’
고원은 위험하니 꼭 가져가라며 내게 잔뜩 안겨 준 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게다가 카셀이 준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허리춤에 달고 있는 이 작은 가죽 가방 안은 마도구와 더불어 각종 마법이 담긴 작은 병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회복 약까지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일대일로 과외까지 받았는데.
‘이것들도 써 보고 싶다.’
물론 쓸 일이 없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나는 어쩐지 아쉬움을 느끼며, 달그락거리는 병들을 손안에서 가만히 굴렸다.
* * *
저 멀리 커다란 돌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잇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억지로 땅을 반으로 쪼개어 떼어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리는 하나의 조각품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
다리 입구 앞쪽으로 둥그렇게 둘러친 커다란 방벽이 보였다.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파편들이 잔뜩 박혀 있는 것이 거대한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듯했다.
벽 안쪽으로는 쓰러지기 직전의 판잣집들이 보였다.
“다리를 건너려면 무조건 자신들을 통과하도록 아주 노골적으로 설계를 해 놓았군요.”
시엘로 단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다리를 건너려면 방벽 너머 판잣집들을 가로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날아서 지나가든가. 물론 어느 것이든 불가능한 소리지만.
줄곧 침묵을 지키던 세이블이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자 시엘로 단장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희가 먼저 들어가서 진압할 테니…….”
“그건 안 돼요.”
그녀는 드물게도 몹시 단호히 말했다.
“아주 적은 숫자지만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제국민들도 몇몇 살고 있어요. 목숨을 담보로 잡힌 탓에 도적들의 수발을 들며 억지로 이곳에 머물고 있죠.”
그 말에 용병들이 여기저기서 웅성댔다. 순간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시엘로 단장조차 침묵했다.
용병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돈을 버는 용병단은 제국민이 아닌 사람들이 태반이다. 외국인이 죄 없는 제국민을 다치게 하는 건 중죄에 해당했다. 이는 자칫하면 의뢰인도 곤란해질 수 있는 문제였다.
이 와중에 누가 도적이고, 누가 일반 사람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일이고.
“구미가 당길 만한 물건을 가져왔으니, 길을 터 달라고 협상해 보죠.”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긴 한데……. 동의하기에 앞서 궁금한 게 있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구미가 당길 만한 거라니?”
그러자 세이블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도적 떼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게 뭐겠어요?”
그녀의 안장에 주렁주렁 달린 주머니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비슷한 크기의 둥근 가죽 주머니들은 하나같이 묵직해 보였다.
“내가 가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펠리어트가 즉시 나섰지만, 세이블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공작님께서 가시면 바로 소문이 날 거예요.”
“왜지?”
“저 마을에는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들도 여럿 있으니까요. 틀림없이 공작님 얼굴을 알아볼 겁니다.”
“탈영한 병사가 숨어들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확실한 정보입니다.”
그러나 당장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펠리어트가 몇 번 더 채근했다. 안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세이블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의 태도 덕분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회귀한 덕에 알게 된 정보라면 당연히 말할 수 없겠지.’
여태까진 짐작뿐이었지만, 고원에 온 이후엔 거의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곳에 가보가 잠들어 있다는 정보뿐만이 아니라 황실의 보물이 묻혀 있는 것, 그리고 그걸 찾을 수 있는 나침반이 길드에 있다는 사실도 미리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고원의 지도까지 들고 왔다. 이런 위험한 곳의 지도는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제 목표는 제가 여기에 왔다는 게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찾아 이곳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가 직접 가죠.”
* * *
세이블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용병 한 명이 전령을 자처했다.
부락에서는 그녀가 말한 대로 방벽 밖에서 기다리던 용병에게 금세 답을 건네주었다.
우리는 모두 병들고 아픈 사람들뿐이라 불안하니, 호위 병사들의 출입은 허가할 수 없다는 답변도 예상대로였다.
물론 순 거짓말이겠지만.
결국, 용병들은 모두 밖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세이블은 부락 안으로 들어서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둔 단도를 들키지 않은 덕분에 한결 마음이 놓인 탓이었다.
빼앗길 것을 우려해 허리에 찬 장검은 미리 용병에게 맡기고 들어왔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무기가 없어서인지 놈들은 다행히 별다른 수색을 하지 않았다.
물론, 여자라 얕본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거라면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도 대비할 수 있겠지.
세이블은 재킷을 갈무리하는 척 단단한 날붙이를 손으로 슬쩍 쓰다듬고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부락 안쪽으로 갈수록 코를 찌르는 고약한 악취가 더욱 심해졌다.
길은 피인지 오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진창이었으며,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와 함께 기분 나쁜 시선들이 쉬지 않고 온몸을 훑었다.
세이블은 옆을 곁눈질했다. 겁을 먹은 탓이 아니었다.
자신과 동행하겠다고 나선 로렐라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두의 반대, 특히 펠리어트와 호위로 분한 안내자의 반대에도 결국 제 뜻을 관철했다.
물론 고작 몇 미터 거리의 방벽 밖에는 무장한 용병들이 있고, 후보의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달려올 안내자도 있으며, 심지어 펠리어트 공작까지 부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서 이를 갈며 활을 겨누고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렵지 않은 건 아닐 텐데.
시선을 눈치챘는지 로렐라가 고개를 돌려 세이블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보란 듯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저 혼자 와도 되었을 텐데요.”
하지만 세이블은 일부러 매몰차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디까지나 제 일이니까요.”
“황실의 보물을 찾아야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로렐라가 무슨 섭섭한 말을 하냐는 듯 몸을 가까이해 작게 속삭였다.
그녀도 허리에 찬 주머니를 빼고는 허전한 차림이었다. 아까 자신의 안내자에게 무어라 속삭이며 줄곧 메고 있었던 긴 통을 맡기던 모습이 떠올랐다.
“괜찮아. 고원에 함께 발을 들인 이상 우린 파트너라고. 서로 도와야 하는 사이 말이야.”
로렐라의 목소리는 제법 듬직했으나 고원에 들어선 이후, 그녀가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쥐어 본 일조차 없겠지.
여차한 순간엔 도적들의 검을 뺏어서라도 자신을 보호해야 할 텐데, 그럴 수나 있을까.
‘그런데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지.’
세이블이 작게 혀를 찼다.
그러나 희한한 일이었다.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어쩐지 점점 누그러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게 혼자보다는 나은가. 그런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이 살짝 들려 올라갔다.
조금 더 지나니 작게나마 농담을 던질 여유마저 생겨났다.
“설마 주식을 팔기 위해 따라온 건 아니겠죠?”
제가 말하고도 우스워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주식이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눈을 빛내는 로렐라에게는 딱 들어맞는 농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어깨를 움찔거리는 거지?
“그, 그게…….”
급기야는 말을 더듬기까지.
세이블은 황당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네?”
“어?”
“……네?”
“으응?”
세상에서 가장 간결하지만, 수도 없이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두 사람만의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