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방해하지 않을 테니2022.03.30.
세이블은 밤새도록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호위도 없이 홀로 길을 나선 이유는 이제부터 그녀가 하려는 일이 아주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동이 막 트려는 시각, 세이블은 약속 장소 근처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늘을 뒤덮은 커다란 나뭇가지들로 인해 사방은 여전히 밤처럼 어두웠다. 밤새 이슬을 흠뻑 머금은 축축한 이끼들로 땅은 미끄럽기 짝이 없었고, 짙은 안개 때문에 바로 앞에 튀어나온 나무뿌리조차 보이질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안전하게 말에서 내려 직접 고삐를 잡고 걷는 쪽을 택했다.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조급했으나,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다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니까. 그렇게 얼마간 걸었을까. 양쪽으로 거대한 암석이 우뚝 솟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얼핏 보면 그대로 길이 막힌 듯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오른쪽 끝에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만한 좁은 틈이 있었다. 세이블은 주저 없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행여나 말이 뒷걸음질 쳐 틈새에 끼어 버리는 일 없도록 고삐를 더욱 단단히 잡고서. 어느새 발밑의 땅도 이끼가 덮인 축축한 흙에서 사락거리는 부드러운 모래로 변해 있었다. 가다 서다 하는 말을 겨우 이끌고서 점점 좁아지는 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자,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송골송골 돋은 땀을 식혀 주었다. 더불어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일찍 오셨군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로렐라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때마침 또다시 불어온 바람에 의해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만큼이나 붉은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휘날렸다.
“안녕, 세이블.”
로렐라가 웃으며 다가왔다. 승마 복장과 흡사해 보이는 간편한 바지와 부츠 차림이었다. 어깨에 멘 자그마한 화살통과 허리춤에 달린 고급스러운 가죽 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방금 용병 단장의 전서구가 막 도착한 참이야. 네가 고용한 사람들과 무사히 합류했고, 고원에 안전하게 발을 들일 준비는 모두 끝내 놓았대.”
그녀가 내민 쪽지에는 그 말대로 냄새를 맡고 찾아온 맹수들과 근처를 서성이는 사령들은 다 같이 힘을 합쳐 제거해 놓았으니,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겠다는 글귀가 짤막하게 쓰여 있었다. 쪽지 맨 아래쪽에 적힌 시엘로 용병단장의 사인도 보였다. 세이블은 그걸 보면서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용병단과의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도 용맹하기로 소문난 시엘로 용병단과. 덕분에 일정을 맞추느라 서둘러야 했던 건 세이블 쪽이 되었다. 늦으면 혼자 떠나겠다는 엄포를 놓았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세이블은 로렐라의 곁에 서 있는 남자 쪽으로 말없이 흘끗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고 얼굴은 복면으로 턱부터 코 위쪽까지를 전부 가린 사내. 꽁꽁 감싸다시피 해서 정체를 숨겼지만, 그녀는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후드 사이로 보이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덕분이었다. 어깨를 단단히 감싼 견갑과 쇠로 만든 장화, 그리고 허리에 찬 기다란 검집까지. 언제나 황족들이나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정복을 차려입고 다니더니, 마치 호위 검사 같은 저 의상은…… 뭐지?
“빨리 가자.”
어리둥절하고 있는 새 말을 이끌고 다가온 위너드가 그녀들을 재촉했다. 문득 그의 손에 들린 둥근 무언가에 눈길이 갔다. 나침반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속의 작은 바늘은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고원 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세이블의 시선을 눈치챈 위너드가 보란 듯이 한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세 사람은 용병들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끝도 없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오를수록 숨이 모자랐다. 고도가 높아진다는 방증이었다. 발을 뗄 때마다 입에서 가쁜 숨이 흘러나왔지만, 말을 탈 수도 없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에둘러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말을 타고 지나가려 하면 떨어질 게 분명한 아슬아슬한 길. 하지만 이것만이 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로렐라는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의 안내자에게 연신 애원하듯 중얼댔다.
“위너드. 허억, 우리 수, 순간 이동…… 제발…… 헉.”
“안 된다고 했잖아. 다른 후보에게 적용할 수는 없어.”
“그거, 거짓말은…… 아니겠지.”
“후우, 나도 힘들다고.”
비록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퍽 사이가 좋아 보였다. 이윽고 정상에 섰을 때, 발아래 드넓은 평야가 나타났다. 그 너머로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협곡과 말라 버린 강줄기가 끝도 없이 뻗어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평평한 대지 위로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와 뾰족한 바위 언덕들을 돌아보며 세이블은 눈을 빛냈다. 가문의 실권을 빠르게,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쥘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그리고 전생에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갔던 물건. ……그 보검이 바로 저곳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그걸 떠올리자마자 칼에 찔렸던 왼쪽 가슴에 찌르르한 느낌이 퍼져 내려갔다. 그때의 고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해, 난 세이블은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이번 생엔 기필코 먼저 손에 넣고야 말겠어.’
한편 세이블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로렐라의 입가에도 오싹한 미소가 걸렸다.
‘황가의 보물이라…….’
오찬 직후 황후를 따라 입장했던 아름다운 응접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세상 둘도 없이 휘황찬란한 공간이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텅 비어 있던 유리 기둥이 더욱 눈에 띄었다. 그곳에 있어야 할 보물을 찾아다 주면 황후는 아마도 기뻐할 게 분명했다. 자신이 예전에 한 말에 대해선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고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겠지. 하지만 황후가 주는 상 따위는 필요 없었다. 원하는 건 딱 한 가지였다. 다시는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설 것이다. 설령 황후라 해도.
‘한없이 무시했던 나를 더 이상 그렇게 대할 수 없게 된다면, 그녀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할까.’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로렐라는 다시 한번 벼르며, 손톱자국이 남도록 거세게 주먹을 쥐었다. 시선도, 그리고 향하는 방향도 같으나 이렇듯 각기 다른 각오를 다지는 두 사람이었다.
“드디어 반응한다!”
……아니, 세 사람이었다.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나침반을 보며 위너드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내려가자고!”
생각에 잠겨 있던 세이블과 로렐라는 깜짝 놀라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위너드는 벌써 쏜살같이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로렐라! 빨리!”
“어어.”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로렐라가 헐레벌떡 발을 내디뎠다. 세이블도 엉겁결에 그들의 뒤를 따랐다. 급한 와중에도 자신의 후보를 잡아 주기 위해 멈춰 서던 위너드가 들으란 듯 외쳤다.
“드디어 나머지 100만 주를 받아 낼 날이 머지않았어!”
* * *
“어서 오십시오, 로렐라 님.”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시엘로 단장이 급히 사람들을 헤치고 내게 다가왔다. 나를 지나쳐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간 세이블도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오시는 길은 평탄하셨습니까?”
“아, 네에. 덕분……에요.”
하지만 나는 시엘로 단장에게 제대로 답하지도 못하고 그저 놀란 눈으로 그의 어깨 너머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임시로 쳐 놓은 듯한 하얀 천막이었다. 그 안에는 늑대와 이리로 보이는 수많은 짐승의 사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얼핏 봐도 예전에 셰릴 백작저에서 본 늑대 박제보다 배는 더 컸다. 그뿐만 아니라 송곳니와 발톱 역시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길고 날카로웠다. 주위에는 이미 까마귀 떼가 찾아와 음산하게 울어 대며 어서 만찬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세이블의 시선도 맹수들의 사체에 고정되었다. 눈빛을 보니 그녀도 그 크기와 숫자에 놀란 듯 보였다.
“미리 약을 넣은 생고기를 던져 유인했습니다. 고원 내부로 들어서면 틀림없이 더 출몰하겠지만, 적어도 이 주변은 안전합니다.”
내 안색을 살피던 시엘로 단장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의 부하들 또한 이 상황이 무척이나 익숙한 듯싶었다. 동료와 담소를 나누며 송곳니로 목걸이를 만드는 자도 있었고, 찬란하게 솟아오른 태양을 등진 채 이마에 땀을 훔치며 물을 시원하게 들이켜는 자도 있…….
어? 잠깐만. 나는 재빨리 눈을 비볐다. 어쩐지 내가 아는 얼굴을 본 것 같은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반신반의하며 방금 전보다 더 세게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아니, 저 남자가 왜 여기 있어?”
잘못 본 게 아니라 진짜였네. 순간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터졌다.
“허.”
곁에 서 있던 위너드의 입에서도 실소가 흘러나왔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닌가?!
“실은 저 중에 절반은 전부 공작님께서 직접 화살로 잡으신…….”
시엘로 단장의 말을 전부 다 듣지도 않고 나는 곧장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펠리어트!”
그제야 펠리어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왔군.”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손에 들린 물통을 다시금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러더니 단숨에 그것을 비웠다. 새벽부터 수고하느라 진땀을 흘린 다른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앞머리도 조금 젖어 있었다. 검은색 셔츠의 소매는 전부 걷어붙인 상태고, 고급스러운 부츠 끝에 핏자국이 튄 게 보였다. 아마도 그의 피는 아니리라.
“……용병단에 사람이 부족한 것 같아서.”
한참 만에 흘러나온 대답에 곁에 서 있던 시엘로 용병단장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숨을 내쉰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펠리어트를 통해 용병단을 소개받은 만큼, 그가 계획을 미리 알고 있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미리 대비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이, 밤새 용병들과 함께 짐승들을 잡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어야지!
“펠리어트 공작님, 이런 곳에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세이블은 완벽한 예를 갖춘 인사를 품위 있게 건넸다. 반면 위너드는 꾸벅하고 묵례를 건넨 게 전부였다. 그는 내 손에 나침반을 쥐여 주고는 그대로 펠리어트를 지나쳐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 다다른 뒤에야 그곳에 몸을 기댄 채 묵묵히 팔짱을 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정말 호위다워 보이긴 했으나, 복면 위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어쩐지 불퉁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펠리어트의 등장에, 세이블이 내게 해명하라는 듯 차가운 눈빛을 보낸 탓이었다. 그걸 눈치챈 사람은 나만이 아닌 듯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니 걱정 마. 당신이 용병 계약을 비밀에 부쳤듯, 나 역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왔으니까. 이상한 소문이 새어 나갈 일은 절대로 없다는 걸 보장하지.”
펠리어트는 그러면서 재빠르게 덧붙였다.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거야.”
“……그래, 도와줘서 고마워. 하지만 여기까지야.”
단호하게 선을 그었으나 그는 완강했다.
“고원은 위험한 곳이야. 저 짐승들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용병단만이 아니라 개인 호위까지 고용…….”
“그럼 개인 호위를 하나 더 고용했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그는 세이블에게도 양해를 구하려는 듯 자신이 있으면 일이 훨씬 쉬워질 거라고 짧게 던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이 직접 나서서 그렇게 말하니, 그녀도 더 이상 딱히 무어라 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 그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나마 수하를 다 떨쳐 내고 혼자서 온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무심코 내뱉을 뻔한 한숨을 삼키며 그에게 엄포를 놓았다.
“알겠어. 당신 뜻대로 해. 대신 절대로 내 일을 방해해선 안 돼.”
“물론.”
“만약 방해된다고 생각이 들면 즉시 돌아가라고 할 거야.”
“약속하지.”
펠리어트는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들여 만든 조각상 같은 얼굴에 퍼진 부드러운 미소를 보자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휴우.”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세이블과 함께 조금 떨어진 천막 근처로 용병단장들을 호출했다.
“저는 세이블 님을 모시는 에녹이라고 합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그 말에 아까 위너드에게서 건네받은 나침반을 들여다보았다.
“우선 서쪽으로 갈 거예요.”
그 말에 에녹이란 자가 눈을 찡그렸다. 듣자마자 이런 반응을 하는 걸 보니 고원을 잘 아는 모양이었다.
“웨즈 다리를 건너야겠군요. 그렇다면 분명 그자들을 마주칠 텐데.”
“그자들이라니요?”
“고원에서 유일하게 부락을 형성해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쪽은 마수들도 덜 나타나고 고원을 빠져나가기에도 좋아서요.”
아무리 지리적 위치가 좋아도, 맹수들과 사령이 판치는 이런 위험한 고원에서 부락을 형성했다니. 바깥보다 여기가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거겠지. 아마 먹고살기 힘들어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잡히는 즉시 사형당해야 마땅한 극악무도한 죄수일 테다. 고원의 악명을 떠올려 보면 역시 후자 쪽에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저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바삐 가야만 했다.
“최대한 조용히,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접근하죠.”
“알겠습니다.”
시엘로 단장이 내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나는 그를 따라 말이 있는 곳으로 얼른 걸음을 옮겼다. 세이블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나란히 보폭을 맞췄다. * * * 회색빛 머리칼을 지닌 한 남자가 용병들이 대기하고 있던 천막 쪽으로 다가왔다. 시엘로의 곁에서 보필하는 부단장 자켈이었다.
“가자. 다들 준비는 마쳤나?”
물을 필요도 없이 대부분의 용병들은 벌써 출발 준비를 거의 마친 참이었다. 펠리어트 공작 또한 저만치 말을 몰고 나가 있었다. 부단장 자켈은 바람에 나부끼는 공작의 검은 망토를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맹수 떼를 향해 고고히 활시위를 당기던 공작의 모습이 뇌리에 선했다. 그야말로 백발백중.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커다란 짐승들이 화살에 꿰뚫려 픽픽 쓰러졌다. 신들린 듯한 활 솜씨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틀림없었다.
‘정말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다니까.’
그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단원들이 머물렀던 자리를 재빠르게 체크했다. 언제나 그렇듯 단검 한 자루조차 흘리지 않았다. 산처럼 쌓여 있는 짐승들의 사체는 자연적으로 처리될 것이다. 이 근방 까마귀들이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오를 테지. 꼼꼼하게 점검을 마친 자켈은 맨 마지막으로 말에 올라 점점 멀어져 가는 일행의 뒤를 재빠르게 쫓았다. 이윽고 맨 뒤에서 조용히 행렬을 따라가는 한 남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용병단에 들어온 신입이었다.
“어이, 이봐.”
재빠르게 말을 몰아 그쪽으로 다가간 자켈이 신입에게 말을 붙였다.
“어때. 일은 할 만하냐?”
“네.”
참으로 곱상하게 생긴 놈이 성격은 어쩜 이렇게 무뚝뚝한지. 네, 아니요 말고 다른 말은 웬만해서는 하질 않았다. 신입은 빨간 머리 아가씨로부터의 의뢰가 들어온 그 날, 용병 일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었다. 사실 이런 때 새 인력을 받는 건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몇 가지 테스트를 거친 결과, 그가 용병단의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을 만큼 남다른 칼솜씨를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단검을 장난감 삼아 자란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어딘가 모르게 범상치 않은 눈빛까지. 다른 건 몰라도 주춤거리다 맥없이 죽거나, 위험한 상황에서 동료들을 버리고 나 몰라라 도망가는 부류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소작농 출신임을 증명해 주는 서류도 제대로 확인했고 말이야.’
실력도 엄청나고, 신분까지 분명하니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켈은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 조용히 말을 모는 신입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험한 일에 자원하다니.
‘부모님 두 분은 모두 지병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으시고, 제 밑으로 어린 동생이 다섯 명이나 있어서…….’
면접 때 담담한 목소리로 개인적 사정을 토로하던 녀석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만약 자신이 녀석이었다면, 솔직히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외모는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으니까.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발에 루비 같은 두 눈. 정말 낯간지럽지만, 그를 본 순간 자켈의 머릿속에는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절로 떠올랐다. 자켈은 외모를 이용해 돈을 버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신입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용병 일은 무척이나 고되고, 위험한 데에 비해 박봉이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서 정직한 땀방울을 흘려 가족을 건사하는 일만큼 자랑스러운 일도 없는 법이지.
‘이런 놈들을 보면 어쩐지 챙겨 주고 싶단 말이야.’
자켈은 코를 쓱 문지르고는 솥뚜껑만 한 손으로 신입의 등짝을 힘차게 내려쳤다.
“가자, 신입!”
“네.”
녀석은 여느 때와 같이 무뚝뚝한 대답을 내뱉고는 그를 따라 열심히 박차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