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구해다 주면 되잖아2022.03.19.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로렐라였다.
“그 말은 그냥 넘길 수 없겠는데.”
그녀는 검은색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는 롯지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 얼음 같은 눈초리에 방금까지만 해도 지지 않고 위너드에게 대들며 소리치던 롯지가 찔끔 놀라 얼른 시선을 피했다.
“나도 네 주인인 세이블 릴리만큼이나 나침반이 필요해. 황실의 보물을 꼭 찾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런데 내가 가짜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고?”
로렐라는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내 롯지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의 미소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너무나 싸늘해 보여서 꼭 악마가 웃음 짓는 것 같았다.
“만약 나침반이 가짜라면 원인은 딱 하나밖에 없어. 카셀이 거짓말을 한 거야. 제국에서 제일 악명 높다는…… 검은 뱀 길드의 길드장이 말이야.”
음산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파르르 떨던 롯지가 세이블의 무릎을 꼭 껴안았다. 마치 그게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방금 네가 한 말, 정말 책임질 수 있겠어?”
턱을 괴고 롯지를 가만히 쳐다보는 로렐라의 입가엔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테이블 위로 쏟아지듯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이 마치 피처럼 보였다.
“그렇고말고.”
어느새 오만한 미소를 되찾은 위너드가 다시 로렐라의 옆에 거만하게 앉으며 말했다.
“그 위험한 뱀굴에 몸소 발을 들여 줬는데도 감사는 못 할망정, 어설픈 수작으로 감히 내 후보를 음해하다니. 너무 경우 없지 않나?”
물론 웃고 있는 것은 입뿐, 그의 두 눈에는 여전히 살벌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 덕분에 롯지는 마치 작은 강아지처럼 겁에 질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세이블의 주식을 지키기 위해 큰소리쳐 보았지만, 그녀로서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분하면서도 무서운 감정을 어쩌지 못해 롯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울음만 꾹 삼키던 그때였다.
“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죠.”
세이블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가? 카셀이 내게 거짓말했을 수도 있다는 게?”
로렐라가 즉시 반문하자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러고는 발치에 앉아 있는 롯지의 분홍색 머리칼을 몇 차례 쓰다듬어 주더니 차분하게 얘기를 이었다.
“조금 더 확실히 검증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그 말에 기가 막힌 위너드는 약간 찌푸린 얼굴로 세이블과 롯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침반이 정말 작동되는지 고원에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하지만 세이블은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나머지 100만 주는 그 이후에 드리죠.”
“뭐?”
위너드의 입에서 또다시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껏 의뢰를 성사시켜 주었더니, 이제 와서 멋대로 말을 바꾸시겠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헛웃음을 흘리더니, 바닥에 깔린 카펫 문양을 잠시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길드에 거부당했는지 알 것 같군.”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싸늘한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숨길 수 없는 화가 드러났지만, 세이블의 표정에는 변화조차 없었다.
“파기가 아니라, 거래 조건을 바꾸겠다고 한 것뿐이에요.”
그녀는 침착한 태도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없던 일로 해도 좋아요. 나침반이 없으면 물건을 찾느라 시간을 좀 많이 허비하게 되겠지만, 저 역시 100만 주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차분하게 내려앉은 말에 위너드는 팔짱을 끼고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200만 주나 되는 주식을 양도하는 것에 거리낌 없이 동의했을 정도니, 그녀가 얼마나 나침반을 원하는지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저렇게 말한다는 건, 이쪽도 나머지 100만 주를 쉬이 포기 못 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거다. 틀림없이. 세이블은 여전히 몸을 꼿꼿하게 편 채 또박또박 이야기를 이어 갔다.
“로렐라 님은 어쨌든 100만 주를 얻었고, 더불어 마엘라 고원에 황실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비밀까지 듣게 되었죠. 이 정도면 이미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중간에 거래를 파기한다 해도, 충분한 이득을 주었으니 자신이 비난받을 이유가 하등 없다는 태도였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위너드 역시 더 따지지 못하고 사나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세이블은 사실 거래 자체를 중지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저 롯지의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고원에서 보물을 찾는 일은, 세이블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중에 일이 잘못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어선 안 되고, 후회할 만한 여지를 남기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려면 이쪽에서도 상대가 원하는 카드를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한다. 나침반을 얻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그만 놓쳤던 부분을 롯지가 일깨워 준 것이었다.
“몇 번이고 얘기하는 거지만, 황실의 보물을 포함한 다른 보물엔 관심 없어요. 어차피 제겐 돌멩이나 다름없으니 발견하더라도 절대로 손대지 않겠단 약속은 꼭 지키죠. 나침반도 제가 원하는 물건을 찾고 나면 반드시 돌려드리겠어요.”
그녀는 ‘더더군다나 이건 검은 뱀 길드의 것이니, 당연히 안전하게 반납해야겠죠?’라고 덧붙이며 살짝 너스레를 떨었다.
“나머지 주식도 틀림없이 양도하겠어요. 제 모든 걸 걸고 약속하지요. 뭣하면 그쪽 안내자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감시하셔도 괜찮고요.”
세이블은 속으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안심했겠지.’
로렐라는 말이 없었고 무심한 표정에서는 여전히 어떤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이블은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거래가 성사되리라는 것을. 로렐라 메이레드는 불과 얼마 전에 100만 주나 되는 거액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쉽게 획득하지 않았던가.
“아니, 안 돼.”
그런 경험을 맛본 이상 로렐라는 절대로 거절하지 못하…….
“네?”
순간 세이블은 저도 모르게 말을 살짝 더듬었다.
“아, 안 된다니요?”
“나도 같이 고원으로 가겠어. 그럼 간단하잖아?”
로렐라는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되는지도, 우리 둘이서 함께 확인하는 게 좋겠어. 혹시 알아? 멀쩡히 잘 작동했던 걸 뒤늦게 와서 가짜였다고 트집 잡을지.”
방금 받았던 터무니없는 의심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속내가 엿보였다. 하지만 세이블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그래서 그쪽 안내자에게 감시해도 좋다는 조건을 단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 또한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거야. 네가 어서 가보를 찾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도 하루빨리 황실의 보물을 손에 넣고 싶어 마음이 좀 급하거든.”
세이블은 거래 내내 자신이 찾는 것이 ‘가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로렐라가 그걸 알고 있는 건 여동생 부부의 이야기를 엿들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세이블은 그녀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 따져 묻지 못했다. 먼저 말문을 연 위너드 때문이었다.
“로렐라, 진심이야?”
위너드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은 채,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거긴 엄청 위험하다고.”
왜 그런 개고생을 자처하려는 건데. 로렐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초록빛 눈동자 속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머지 100만 주를 양도받는 게 조금 뒤로 미뤄진 것은 위너드로서도 마뜩잖은 일이었으나, 어쨌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쉽게 손에 들어올 것이었다. 황실의 보물도 마찬가지였다. 길드장 녀석이 나침반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이상, 고원의 다른 보물들은 사실상 그의 손아귀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 정보는 결국 로렐라 덕분에 알게 된 것이니, 그 대가로 황실의 보물을 달라고 충분히 협상 가능하지 않나? 주식도 보물도 전부 세이블과 카셀의 손을 빌려서 받으면 그만인데, 이런 수월한 방법을 설마 몰라서 이러는 거야? ……게다가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거기까지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저 여자가 원하던 물건을 찾아서 나침반이 진짜라는 걸 확인 할 때까지만 기다리면…….”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라며? 그건 세이블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 아니야? 만에 하나 세이블이 고원에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결국 우리도 주식을 받지 못할 텐데?”
“…….”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녀의 말에, 결국 할 말을 잃고 말았지만. 반듯하고 예쁜 세이블의 미간에도 작은 주름 하나가 생겨났다. 자칫 잘못하면 귀찮은 혹을 달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당혹스러움은 뒤로 밀어 둔 그녀는 마치 아이를 대하듯 침착하게 로렐라를 달래기 시작했다.
“로렐라 님, 고원은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에요. 저 역시 호위 없이 갈 생각이 없고요.”
“나도 호위가 필요하단 건 당연히 알고 있어. 그러니까…….”
“기사단이나 제국의 병사들은 절대 안 돼요. 그런 사람들이 고원 근처에 얼씬거렸다가는 바로 소문이 날 테니까요.”
세이블이 급히 말을 끊은 건, 얼마 전 로렐라와 함께 황궁에 온 레어넌 기사단장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는 제국 최고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데다가 검술 또한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동행한다면 그 누구보다 든든한 호위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로렐라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니 도움을 청하기에도 적격이겠지. 하지만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고원에 간다면, 계획은 엉망이 될 게 뻔했다. 수도는 물론이고, 고원을 주시하고 있는 릴리 후작가에도 소문이 퍼질 테니까.
“입이 무겁고 아주 훈련이 잘된, 믿을 만한 용병단을 고용해야 해요. 기사단이 아니라요.”
이런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한다니. 세이블은 답답한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려면 큰돈이 필요하죠. 적어도 천 골드는 넘게…….”
“돈이라면 충분히 있어.”
“믿을 만한 용병을 구하는 건,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세이블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변했다.
“전쟁이 끝난 뒤 대부분의 용병단이 다른 나라로 떠난 덕분에 제국 내에서 접촉할 수 있는 단체는 그리 많지 않아요. 게다가 그들과 계약하려면 인맥이 필요하죠.”
“인맥이라니? 어떤 인맥?”
“적어도 용병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국경을 수호하는 변경백 정도는 되어야겠죠. 그게 아니라면 그들과 전장에서 연을 맺은 가문이라든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무작정 고원으로 가겠다는 로렐라를 향해 세이블은 조소를 흘렸다.
“한 가지 더. 설령 인맥이 있다 해도 용병을 소개받는 게 알려지면 곤란해요. 사교계는 물론이고, 설령 황실이 물어도 비밀에 부쳐 줄 만한 믿음직한 친구가 있으신가요?”
“…….”
“비밀이 새어 나갈 것 같다면, 전 함께 갈 수 없어요. 그건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로렐라는 입을 다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이블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그녀가 용병을 모으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르니까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지. 만약 자신도 여동생처럼 가문의 이름을 등에 업고 있었다면, 좀 더 일이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가문에 알려져서는 안 될뿐더러,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믿을 만한 용병 단체는, 암흑 길드와 달리 제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수상한 사람의 의뢰 따윈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검증되지 않은 이들을 고용할 수도 없었다.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무리가 고원에 가서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로렐라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한 숱한 악행을 저질러 왔다.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고, 배신하며 여기까지 계획을 끌어왔는데……. 고작 이런 일로 그걸 망칠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로렐라 님의 호위를 구하기 위해 기다려 줄 시간 같은 건 없어요. 제가 말한 조건에 맞게 진행하지 않으면 함께 갈 수…….”
“그래, 잘 알겠어.”
그때, 로렐라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세이블의 말을 끊었다.
“계약해 올게.”
“네?”
“제대로 된 용병, 구해 오겠다고.”
“그게 무슨…….”
과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에 화가 나기보단 이루 말할 수 없는 황당함이 밀려왔다. 대체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하던 세이블은,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물었다.
“사교계는 물론이고, 황실이 물어도 입을 열지 않을 친구가…… 정말 있으시다고요? 거기다, 용병단에 말을 해 줄 정도의 위치인?”
물론 로렐라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사교계와 황실을 배제하면서까지 그녀를 도와줄 ‘권세 높은 귀족 친구’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어, 글쎄. 그 사람을 친구……라고 할 수 있나?”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린 것도 잠시.
“아무튼, 말하면 도와줄 거야. 게다가 사교계든 황실이든 별로 친하지 않으니까, 이런 일을 부탁하긴 안성맞춤이지.”
로렐라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활짝 미소 지었다.
“게다가 나 역시 그 사람이 곤란할 때 도와준 적이 있고, 또 비밀도 지켜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