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수작 부리지 마2022.03.16.
수도의 북쪽 성곽 근처에 있는 한 보랏빛 건물은 그 근방에서 가장 높고, 커다란 건축물이었다. 외관도 무척 아름다운 데다가 1층엔 제법 유명한 상점들이 여럿 들어와 있어 언제나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이 다름 아닌 ‘검은 뱀 길드’의 본부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애초에 의뢰인은 따로 지정한 접선 장소에서 만났고, 본부의 위치를 알아낼 만큼 능력 있고 간이 큰 손님은 없다시피 했으니까. 따라서 마치 귀족 저택을 떼 오기라도 한 것처럼 잘 꾸며진 커다란 응접실은 그저 구색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곳에, 오늘은 정말 드물게도 낯선 방문자가 한 명 있었다. 카셀의 승인하에 출입을 허락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마셨다. 꼿꼿하게 쭉 편 자세에서는 기품이 넘쳐흘렀으며, 머리 장식은 물론이고 몸에 걸친 드레스도 고급스러운 것뿐이었다. 누가 봐도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가 틀림없었다. 극악무도하기로 유명한 길드의 본부 안에서 차를 마시는 귀족 영애라니. 상당히 이상한 그림이었지만 그녀는 사실 검은 뱀 길드원들 사이에서 단연코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있다는 흑마법사 제르모어에게조차.
“……어떤가, 에본.”
응접실의 벽난로 안쪽. 로렐라가 보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두 개가 꿈틀거렸다. 검은 뱀 길드와 계약을 맺은 제르모어와, 그의 가장 유능한 조수인 에본이었다.
“무언가 발견한 게 있는가?”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제르모어 님.”
“……역시 그렇군.”
면목 없다는 듯한 조수의 목소리에, 제르모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여자가 정말 흑마법사와 계약을 맺었다면, 저희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요.”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조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르모어 역시 몇 번이고 직접 확인해 봤으나, 로렐라 메이레드에게는 그 어떤 마력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계약을 맺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표식조차도.
“게다가 비를 멈추게 했다니, 그런 능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조수 에본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건 제르모어에게도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스승보다 더한 실력자가 존재한다는 말을 조수로서 끝맺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로렐라 메이레드 곁에 붙어서 이상한 술수를 쓰는 새끼를 찾아내라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더디지? 제르모어, 그러고도 네가 대륙 최고의 흑마법사야?’
날카롭게 자신을 책망하던 카셀 베스페라의 목소리가 제르모어의 귓가에 생생히 울려 퍼진 순간, 또다시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에본.”
“네, 스승님.”
제르모어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그놈을 반드시 찾아내야겠다.”
그가 몸담고 있는 어둠만큼이나 시커먼 동공 속에서 초승달처럼 생긴 노란 문양이 섬뜩하게 빛났다. * * *
“누나!”
카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응접실 문을 벌컥 열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예쁘게 차려입은 로렐라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나침반을 찾기가 무섭게, 지금 만나러 본부로 가겠다는 로렐라의 서신을 든 전서조가 날아온 것이다. 그 한 줄에 카셀은 다급하게 마도구를 하나 사용했다. 순식간에 원하는 장소로 이동시켜 주는 그 마도구는 길드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값비싼 물건 중 하나였지만, 뭐 그런 게 중요한가. 나침반을 찾은 지하 석실은 본부에서 너무 멀어 돌아가려면 한나절이 넘게 걸릴 텐데. 그랬다간 로렐라가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누나가 날 만나러 본부까지 직접 찾아왔는데! 부랴부랴 오면서도 정말로 자신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을까 싶었는데, 진짜였다. 카셀은 꿈만 같은 광경에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역시 꿈이 아니구나. 현실을 확인한 그의 입술 끝이 배시시 올라갔다.
“약속도 하지 않고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혹시 바쁜데 방해한 건 아니야?”
“아, 바쁘긴 무슨. 마침 한가하던 참이었어.”
사실은 한가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돌아가 버릴까 웬만한 성 한 채 값의 마도구를 써 버렸다는 걸 알면 시드가 입에 거품을 물겠지만……. 뭐, 그러라지.
“내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건…….”
“알아. 이것 때문이지?”
카셀은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으며 작은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물건을 꺼내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무로 깎아 만든 작은 나침판이었다. 얼핏 보기엔 다소 엉성하고, 조잡한 느낌마저 주었지만 그걸 바라보는 로렐라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이거구나!”
“그런데, 누나.”
흥분한 로렐라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당기자마자, 카셀이 다시 나침반을 쏙 가져가 버렸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뭐? 어떤 거?”
“왜 그렇게 세이블 릴리를 위해 나서 주는 거야?”
기다리겠다던 그녀가 연락도 없이 대뜸 길드에 찾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로렐라에겐 급한 일도 아닐 텐데,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세이블 릴리가 로렐라 메이레드에게 그토록 특별한 존재인가? 사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로렐라가 각별히 신경 쓰는 사람은 전부 카셀의 질투 대상이었다. 그녀가 아끼는 하녀나 집사도 그렇고, 함께 일을 하는 디저트점의 사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만 예뻐해 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카셀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고민하는 기색이 얼핏 스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질투는 나지만 심술궂게 보이기는 싫어 나침반을 다시 슬그머니 탁자 위로 올려놓으려는데, 그녀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사실…… 세이블 때문만은 아니야.”
“응?”
“내게도 필요한 물건이라서.”
궁금증에 눈이 동그랗게 커진 그의 앞에서, 로렐라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제외하고, 세이블에게 들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걸 열심히 경청하던 카셀이 말없이 손 안의 나침반을 만지작거렸다. 마엘라 고원에, 세이블 릴리가 원하는 물건 외에도 황실의 보물이 묻혀 있다니. 그녀가 나침반을 이용해 황실의 보물을 찾고 싶어 한다는 건 이해했다. 그것도 자신이 가지려는 게 아니라, 황실의 품에 돌려주기 위해서.
“그럼 누나는 공을 세우고 싶은…… 아니지.”
그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를 보곤 고개를 저으며 급히 말을 바꿨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야.’
그럼 대체 이유가 뭘까. 이쯤 되니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갑자기 그래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야?”
“…….”
“조금 이상해서 그래. 원래 의뢰를 할 때는 솔직함이 생명이거든? 그러니까 가감 없이 이야기해 줘.”
그 말에 로렐라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대답했다.
“맞아. 단순히 공을 세우고 싶은 게 아니라, 자존심이 좀 상해서 말이야.”
자존심이 상해? 그렇다면 혹시…….
“황족들한테 본때를 보여 주고 싶다, 뭐 이런 건가?”
“음, 비슷해.”
그녀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카셀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진심인가?’
그녀는 귀족이다. 몰락했다고는 해도 백작가의 일원이며, 그녀의 하나뿐인 오빠가 돌아올 일은 없으니 나중엔 아마 작위를 물려받아 백작이 될 것이다. 그럼 더욱이 견고한 그들만의 세계에 들어가겠지. 그런 그녀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정점에 서 있는 게 바로 황실이다. 아니. 사실 귀족이 아니더라도, 권력 그 자체인 황실을 상대로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만 빼면 말이야.’
검은 뱀 길드를 일망타진하겠다며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건 황실은 그에게 있어 천적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카셀은 멍하니 로렐라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고는 곧 방긋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눈은 오늘따라 유독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심이구나.’
그러니까 정말로,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황족의 코를 으깨 주겠다 이거지? 물론 그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카셀은 그렇게 이해했다.
‘이 누나…… 진짜 미쳤나 봐!’
그는 미친 듯 뛰어 대는 심장 부근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야말로 완벽한 그의 이상형이었다.
* * * 세이블이 메이레드 저택을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불과 얼마 후였다. 며칠도 걸리지 않을 테니 믿어 보라며 장담한 대로, 로렐라가 진짜 나침반을 가지고 온 것이다.
“좋아요.”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진 나침반을 바라보던 세이블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약속대로 의뢰를 성사시켜 주어 감사해요.”
그러자 건너편 소파에 앉아 있던 로렐라 메이레드의 안내자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뭘. 우리가 더 고맙지.”
여전히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이제 그쪽도 마지막 약속을 지켜야지?”
언뜻 섬뜩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위너드의 목소리에, 세이블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흔쾌히 약속했던 일이다.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거니와, 이제 와서 신중하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로렐라에게 말했던 대로, 그녀에게 ‘주식’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다만 마음이 조금 편치 않은 것은, 자신의 안내자인 롯지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도와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던 작은 소녀가, 석상처럼 굳어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세이블에게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안쓰러웠고 한편으론 미안했다.
‘시간을 끌어 봤자 롯지만 괴로울 뿐이야. 빨리 거래를 마치는 게 낫겠어.’
그렇게 생각한 세이블은 롯지에게서 시선을 떼고 말했다.
“좋아요. 그럼 약속한 대로…….”
그때였다.
“잠깐만요!”
갑자기 롯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응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소녀에게 향하자, 안타까울 만큼 몸을 떨던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세이블 님! 이게 가짜면 어떡해요!”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이었다. 세이블조차 그녀가 이렇게 크게 소리를 치는 걸 처음 보는 탓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식을 받기 위해 아무렇게나 만든 가짜를 가져왔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자 위너드가 웃기지 말라는 듯 코웃음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애송이에게서 받는 걸 내 눈으로 직접 지켜봤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뭐?”
“당신은 누구보다 주식을 타, 탐내는 사람인데……!”
롯지는 사납게 그를 노려보고는 얼른 세이블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이블 님. 막상 고원에 갔는데 나침반이 작동을 안 하면 그땐 어떻게 해요, 네? 200만 주나 내어줬는데, 그런 억울한 일이 생기면요……!”
“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파악한 위너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지금 장난하나.”
그는 낮게 읊조리더니, 재빨리 나침반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롯지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케인으로 소녀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이상한 수작 부리지 마. 이제 와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전례 없이 살벌한 기운이 스몄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선 미약한 살기까지 느껴졌다.
“내가 무슨 짓까지 할지 궁금하다면 어디 한 번 그래 보든가.”
위너드는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어린 소녀를 상대로 너무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은 협박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롯지는 어린 소녀이기 이전에, 그와 같은 안내자였다. 쪼끄만 게 발칙하게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머리를 썼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이 여자아이가 얼마나 훌륭한 안내자인지 보여 주었다. 주식 양도는 양 후보자가 모두 마음 깊이 동의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불합리함을 느끼면 불가능했다. 방금 롯지의 발언으로 세이블의 마음속에 ‘속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주식을 받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시스템이 정해 둔 규칙을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한 것이다.
“수작이 아니라 당연한 의심이죠.”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른인 데다가, 키까지 무척 큰 위너드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어 있었지만, 롯지는 어깨를 발발 떨면서도 지지 않았다.
“보물을 찾아주는 나침반이라는데, 소, 솔직히 좀 허접해 보이고……!”
“진짜 안 되겠군.”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른 위너드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그때였다.
“잠깐.”
“잠깐만요.”
안내자들끼리 옥신각신하는 사이, 짧게 눈빛을 교환한 두 여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