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왜 그걸 이제 이야기해?2022.03.12.
교양 있는 웃음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황궁 악단이 연주하는 우아한 선율이 홀 안에 퍼져 나갔다. 눈앞에 놓인 음식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나는 도저히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런 훌륭한 결과를 내다니. 들을수록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황후가 내게 지그시 시선을 맞춘 채 낯간지러운 칭찬을 늘어놓았다. 식사가 시작된 이후 내내 이런 태도니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아닙니다, 폐하. 다행히 운이 따라 주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운 또한 그대의 실력이자,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레어넌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이 맞습니다.”
“역시 레어넌 단장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죠? 운도, 실력이라는 것을.”
황후는 반색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로렐라 님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곁에서 지켜봐서 잘 압니다.”
여전히 상냥하고, 예의 바른 태도였지만 주장을 관철하는 목소리는 몹시 확고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기다렸다는 듯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습니다. 성공은 본디 노력하는 사람의 몫이죠.”
“레어넌 단장님이 그리 말씀하실 정도라니, 나중에 부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시겠어요? 괜찮다면 두 분이 함께요. 그 자리에 저희 아이들도 꼭 좀 참여시키고 싶군요. 여러 각도에서 성공을 배울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나는 한 명 한 명 일일이 눈을 맞추며 살짝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때 황후가 마치 새로운 걸 깨달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황실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인재겠지요. 젊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레어넌 단장.”
시선을 여전히 레어넌 단장에게 둔 채 말이다.
“그 부분은 황후 폐하의 고견에 깊이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 말에 일순 공기가 변하는 듯했다. 아까 끼어들지 못했던 사람들도, 저 멀리 앉아 있는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한 건, 곤란에 처한 나를 보며 웃음을 참는 세이블을 제외하고 딱 한 사람뿐이었다. 내게 자리를 빼앗겨 구석 자리로 밀려난 멜로즈 백작 부인.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희게 질려 있었다. 물론 내가 열심히 노력한 일을 누군가 주목해 주고, 알아주는 건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황후가 내게 관심을 보이면 보일수록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황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던지는 귀족들이나 싸늘하게 식은 눈을 내리깐 멜로즈 백작 부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황후의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지금껏 늘어놓은 달콤한 칭찬 속에 영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나는 우아하게 샐러드를 입에 넣는 황후를 남몰래 살폈다.
“오늘 앤디브가 참 맛있군요. 쌉싸름하면서도 아삭아삭해서 입맛을 돋우기에 더할 나위 없어요.”
……역시 지금도. 요리에 곁들인 채소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아까 운이 아니라 실력 어쩌고 하던 때보다 훨씬 더 생기 있게 느껴졌다. 대체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보란 듯이 하는 이유가 뭘까. 결국 나는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에 불편한 마음을 내내 어찌하지 못한 채 식사를 마쳤다. 손꼽아 기대했던 디저트도 보기엔 무척 훌륭했지만, 도통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똑같았다. 레아에게 어땠는지 말해 주기로 했는데, 이걸 어쩐다…….
“슬슬 식사도 마무리된 것 같으니, 자리를 옮겨도 괜찮을까요?”
그때, 황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양해를 구하듯 황제를 보았다. 그러자 황제가 너그러이 웃으며 다들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더니 시종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드디어 그 시간이구나.’
오찬이 끝나면 황후는 참석해 준 부인들과 영애들만 데리고 가볍게 티 타임을 즐긴다고 한다. 그녀가 유독 아끼는 장소인 황궁 가장 깊숙이 자리한 특별한 응접실에서. 황궁 오찬에 초대받은 건 처음이지만, 레어넌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어서 나 역시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여전히 황제의 말 상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레어넌과 살짝 눈짓을 주고받은 뒤, 나는 시종들의 안내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세이블은 나보다 몇 발자국 앞에서 다른 영애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을 간 끝에 도착한 응접실 안을 보고 나는 그만 체면도 잊은 채 입술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그곳은 응접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홀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넓었다. 큰 창문을 장식한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와 화려한 샹들리에가 시선을 압도했다. 응접실에 있는 모든 것이 빛나 보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건 벽면을 장식한 둥근 기둥 모양의 유리 장식장이었다. 그 안에는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금으로 만든 수십 쌍의 술잔과, 주먹만 한 보석이 박힌 커다란 왕관들, 족히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듯한 검까지. 마치 유명한 박물관에 온 듯한 착각에 잠시 사로잡힌 그때였다.
“멜로즈 백작 부인, 이리 오세요.”
어느새 테이블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황후가 우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그녀의 바로 옆자리였다. 식사할 때 내가 앉은 곳과 똑같은 위치.
“폐하……!”
멜로즈 백작 부인은 감격해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며 외치더니 바람처럼 그 옆에 앉았다. 익숙한 관례인지 사람들은 황후가 부르기 전까지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멀뚱히 서 있었다. 덕분에 나도 눈치만 보며 설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손수 앉을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누군가는 환히 웃었고 누군가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내 이름이 불린 것은, 자리가 딱 하나 남은 시점이었다. ……황후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듯한 맨 끄트머리 자리였다. * * *
“그 일을 맡아서 해 주겠다니, 멜로즈 부인처럼 든든한 사람이 곁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좀 걱정이군요. 굉장히 성가시고 어려운 과정이 될 텐데…….”
“아닙니다.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영광입니다. 반드시 성사시켜 보이겠습니다.”
멜로즈 부인의 들뜬 목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더불어 황후의 웃음소리도 몹시 만족스러운 듯 한층 더 높이 올라갔다. 무슨 일을 말하는 건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황후와 멜로즈 부인은 금방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나는 여전히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든 채, 새하얀 레이스가 깔린 티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까 내게 그랬던 것처럼, 다들 중간중간 틈이 생길 때마다 멜로즈 부인을 향한 찬사를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부인은 처음과는 달리 그런 칭찬 같은 건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아니,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 따윈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그저 결의에 찬 눈동자를 빛내며 황후와의 대화에 몰두했다. 테이블 중간쯤에 앉은 세이블은 다른 사람처럼 멜로즈 부인에게 아첨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처럼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주변을 살피다 문득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내게 자신의 아이들을 부를 테니 꼭 좀 이야기를 들려 달라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맞닿자마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러더니 곧 입꼬리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나는 입안 가득 차오르는 씁쓸함을 넘기기 위해 시선을 피하고 조용히 찻잔을 기울였다. 방금 새로 받은 찻물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잇속을 따라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 나 또한 사교계엔 저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딱 한 가지 내가 간과했던 것이 있다면, 이곳엔 황후가 있다는 점이었다. 평범한 사교계와는 달리 유일한 법이자, 권력으로 군림하는 자. 나는 오늘 그 권력에게 아주 보기 좋게 이용당했다. 어쩌면 황후는 오찬이 시작되기도 전, 자신이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던 멜로즈 부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주 약간의 손짓, 그리고 짧은 말 한마디를 이용해 부인을 고립시켰다. 그것만으로도 너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위협이 멜로즈 부인에게 충분히 전해졌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새 찻잔을 내려놓은 황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도 부랴부랴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드디어 오찬 행사가 모두 종료되었다. 황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천천히 문 쪽으로 걸었다. 처음 오찬장에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가장 마지막까지 황후를 기다려야 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레이디 메이레드.”
내 앞에 선 황후는 기품 있게 미소 지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황후 폐하.”
“레어넌 단장과 함께 또 와 주길 바라요.”
나는 최대한 예를 갖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유독 힘주어 말한 것을 알면서도 티 낼 수 없었다. 이런 순간에 감정을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그때 황후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게 많을 테니까.”
순간, 무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내 머리를 거세게 내리친 것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황궁에는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장소가 많이 있답니다.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 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곳들이지요.”
그녀는 오해 말라는 듯 상냥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레어넌 단장은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그와 함께라면 폐하께서도 레이디 메이레드의 출입을 허락해 주실 거예요.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의 입술 끝이 기계처럼 올라갔다. 마치 스위치를 누르면 얼굴이 바뀌는 가면을 쓴 것처럼. 나는 표정을 관리하려 애를 썼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에 경련이 일 정도였다. 정말로 좋은 경험을 했으면 하는 마음에 황후가 이렇게 얘기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레어넌과 동행하지 않으면, 내게 황궁에 출입할 기회 같은 건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겠지. 만찬장에서 날 추켜세워 준 것 역시 황제의 총애를 받는 레어넌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 주려는 목적이었던 게 틀림없다. 그는 자신을 향한 칭송보다, 주변 사람들이 잘되는 일에 더욱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걸 황후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더불어 마음에 들지 않는 멜로즈 백작 부인의 행동을 입맛대로 다듬을 일회용 도구로서도 안성맞춤이었을 테고.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오늘 하루 내가 받았던 수많은 찬사와 호감은 사실 내가 아니라 레어넌의 것이었다. 실제로 레어넌이 없는 자리의 나는 그 누구와도 섞이지 못하고 동떨어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건…… 북부 사교계도 똑같으리라. 펠리어트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내게 잘해 줄 이유가 있었을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게 많을 테니까.’
황후의 목소리가 심장을 서늘하게 관통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건 비단 사교계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받고는 있지만 결코 내 것이 아닌 것. 심지어 거기에 내 목숨까지 달려 있는데……. 황후는 내게서 휙 등을 돌려 이미 문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당당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마치 불이 붙은 숯을 삼킨 것처럼 데일 듯 뜨거운 열기가 몸 안쪽에서 피어올랐다. * * *
“양도하겠어요.”
세이블이 말한 순간, 시스템 창 위로 밝은 푸른 빛이 크게 한 번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보유하고 있던 주식이 훅 줄어들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진 아주 짧은 거래였다.
“하하, 100만 주 잘 받았어.”
줄곧 여유작작하던 로렐라 메이레드의 안내자가 기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롯지는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 그렁그렁 눈물방울을 매달고서 짐짓 사나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시선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반면에 세이블은 표정 변화도 없이 로렐라 메이레드를 관찰하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웃고 화내고, 짧은 순간에도 수십 번씩 변하던 로렐라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내내 무표정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메이레드 백작저를 찾은 순간부터 100만 주를 건네준 지금까지. 말도 한마디 없이 그저 딱딱하게 굳은 사람처럼 앉아 있는 게 전부였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건 자신뿐만이 아닌 듯했다.
“왜 그래? 기쁘지 않아?”
그녀의 안내자도 걱정스러운 듯 질문했으나 로렐라는 무언가 다른 생각에 골똘히 빠진 것처럼 보였다. 로렐라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세이블이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다 다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나머지 100만 주는 나침반이 제 손에 들어오는 그때 양도하겠어요.”
“물론이지. 곧 원하는 대로 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번에도 대답한 건 로렐라가 아니라 그녀의 안내자였다.
‘곤란한데.’
세이블은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로렐라 때문에 미간을 찡그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가 로렐라에게 정말로 바라는 것은 고작 길드장에게 의뢰를 해 주는 게 아니라 나침반을 받아 내는 거였다. 그런데 당사자가 저렇게 의욕이 없다니.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곤 들었지만, 길드장인 카셀 베스페라는 누구보다 변덕이 심하고 속을 알 수 없기로 유명했다. 언제 말을 바꿔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로렐라 메이레드가 자신의 일처럼 모든 걸 걸고 나서 주지 않으면 곤란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길드장이 나침반을 들고 올 때까지 마냥 넋 놓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재촉하는 건 그리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로렐라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세이블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동생인 에어리스는 이미 마엘라 고원으로 갈 채비를 어느 정도 마친 상태였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실제로 찾는 데에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면서도 냉정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반드시 동생 에어리스보다 먼저 가보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 조바심이 매사에 침착한 세이블조차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마엘라 고원은 혼자서, 혹은 호위 몇 명만 데리고 진입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반드시 전문적으로 훈련된 용병단이 필요했고, 용병의 숫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아버지의 지원을 받게 될 동생과 달리, 세이블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혼자 준비해야만 했다. 그것도 모든 걸 철저히 비밀로 한 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소문나지 않게끔 비밀리에 충분한 숫자의 용병을 모으는 건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였다. 안 그래도 고원에 가려면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이 많은데 언제까지 이렇게 나침반을 받는 일에 신경 써야 하는지.
‘가장 최악의 상황은, 주식만 내준 채 모든 게 없었던 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야.’
세이블은 잠시 고민하다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그 나침반은 저뿐만 아니라 로렐라 님에게도 아주 유용하게 쓰일 거예요.”
그 말에 로렐라의 고개가 비로소 천천히 들렸다. 세이블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카드를 꺼냈다.
“마엘라 고원에는 제가 찾는 보물만 묻혀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오찬회 티 타임 때 로렐라 님도 보셨을 텐데요. 황후 폐하와 함께 차를 마셨던 그 화려한 응접실 말이에요. 빈틈없이 채워진 장식장에 딱 한 군데만 비어 있었죠.”
그 이야길 꺼내자마자 로렐라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곳이 있었던 게 기억나.”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세이블은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그날 로렐라가 당한 일은 그녀도 전부 지켜보았다. 황후의 행동 하나에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무참히 떨어져 내린 것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겠지만,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두 찬사를 보내던 일을 잊을 순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누리고 싶다는 욕심이 들 수도 있겠지. 영원히 모른 채로 살아간다면 모를까, 한 번 달콤한 맛을 본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이다. 처음부터 대놓고 주식을 달라고 요구하던, 무언가를 쟁취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는 로렐라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세이블은 그녀가 적극적으로 거래에 임하게 만들기 위해 절대로 외면할 수 없을 만한 미끼를 던졌다.
“원래는 황실의 심장이라고 불리던 커다란 다이아몬드 펜던트가 들어 있던 자리죠. 아주 오래전, 전란 속에 잃어버린 보물이에요. 그게 마엘라 고원에 있어요.”
“……그게 정말이야?”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세이블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로렐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걸 찾아준다면 황후 폐하. 아니, 황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수 있…….”
그때였다.
“왜 그걸 이제 말하는데!”
로렐라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큰 목소리였는지 곁에 앉아 있던 그녀의 안내자조차 흠칫 놀랄 정도였다.
“일단 어디 멀리 가지 말고, 여기 아우레아에서 기다려 줘. 아니, 뭣하면 우리 집에서 머물며 대기해도 좋아.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게 무슨……. 여기서 기다린다고 길드장의 확답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물론 그렇지. 그래서 내가 가서 직접 받아오려고 해.”
“……네?”
갑자기 백팔십도 달라진 모습에 세이블은 어이가 없는 나머지 저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재미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행동력이 빠를 줄은.
“알겠어요. 제겐 어차피 필요 없는 것이니 찾게 되면 로렐라 님께 드리도록 하죠. 그거라면 황후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세이블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우아하게 귀 뒤로 넘기며, 보기 드문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총애라니? 무슨 소리야?”
“네?”
이어진 영문 모를 소리에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내가 원하는 건 전혀 다른 거야.”
비장한 목소리 사이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눈을 들어 마주친 로렐라의 붉은 눈동자는,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