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어쩐지 불안한 기분2022.03.09.
‘그 이야기를 왜 꺼내선.’
세이블과 얘기하는 내내 쏟아지는 레어넌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그녀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입가에 서린 다정한 미소는 변함이 없었으나, 어떤 거래인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그렇지만 레어넌은 캐묻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먼저 얘기해 주길 기다리겠지. 그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성격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제가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해요.”
만찬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세이블이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살짝 올라가 있는 입술 끝은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빨리 받아 주면 되잖아! 레어넌이 또다시 반짝이는 눈으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게 느껴져 일단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블은 무척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이미 카셀에게 말을 전했고, 나름대로 긍정적인 답을 얻었다고 적은 서신을 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했다. 동생보다 먼저 가보를 찾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건 그녀의 사정이고 이쪽은 이쪽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카셀은 아무 대가 없이 나침반을 빌려주겠다고까지 했는데, 그런 그를 계속해서 재촉하는 것보다는 믿고 기다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카셀에게 대신 의뢰해 주면 넘기겠다던 주식도 아직 받기 전인데, 이런 식으로 압박 줘도 되는 거야? 나는 불만에 찬 눈빛으로 세이블을 흘끗 쏘아보았다. 그녀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곁에서 우아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 한가운데에는 기다란 테이블이 자리했다. 그 위론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은 식기가 줄지어 세팅되어 있었다. 테이블의 맨 끝, 이 연회의 주인이 앉을 상석 자리에는 번쩍거리는 금 식기가 두 쌍 놓여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붉은 비단에 각각 금빛 사자와 은빛 매를 수놓은 화려한 의자도 한눈에 들어왔다.
‘사자는 황제를, 매는 황후를 뜻한다고 했지.’
황궁에서 주최한 조찬이라기엔 생각보다 조촐한 규모였으나 그만큼 아무나 초대받을 수 없는 행사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건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사람들의 차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입은 옷은 물론,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이 값비싸 보였다. 위너드가 걸어 준 목걸이가 아니었으면 너무 수수해 보일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종들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이블은 이미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각자의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내 자리는…….
‘맙소사.’
나는 나란히 의자를 뺀 채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시종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레어넌은 몹시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의자에 앉았다. 금빛의 사자를 수놓은 의자와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레어넌의 자리였다. 내가 앉을 곳은 바로 그 옆이었고. 이 정도면 황제와 황후가 어떤 걸 가장 먼저 먹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며, 와인은 몇 잔을 마시는지까지 전부 지켜볼 수 있을 정도로 코앞이었다.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부담되는데…….
“앉으세요, 로렐라.”
복잡한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레어넌은 뒤에 서 있는 시종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싶었지만,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오늘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낄 수나 있을까?
“베르하르트 단장님, 오랜만이군요.”
어색하게 자리에 앉는데, 내 건너편의 누군가가 레어넌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돌리니 희끗희끗한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지닌 부인이 우리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운 눈매와 다소 욕심이 많아 보이는 인상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황후가 앉을 곳과 가장 가까운 자리이면서도 마치 자신의 집처럼 편안해 보였다. 본 적 있는 여자였다. 정확히는 황궁 무도회에서 황후의 바로 뒤에 서 있었던 탓에 모를 수 없었다.
“멜로즈 로겔 백작 부인, 안녕하십니까.”
레어넌이 부드럽게 화답했다. 유독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한 이유는 아마 날 위해서겠지.
‘멜로즈 백작가의 안주인이었구나.’
멜로즈 가문의 실권자는 백작이 아니라, 그의 부인이라는 것도. 그녀가 황후의 의전장으로 사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도 다른 부인들에게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백작 부인, 소개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알고 있습니다. 로렐라 메이레드 님이시지요? 근래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분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는군요.”
그녀는 부드럽게 레어넌의 말을 끊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자칫하면 무례할 수 있는 일인데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그런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예를 갖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멜로즈 백작 부인.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 부인은 앉은 채로 고개를 까딱여 내 인사를 받아 주더니, 자신의 옆에 앉은 두 명의 젊은 여자에게 살짝 고갯짓했다. 그녀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예법서에서나 나올 법한 자세로 나와 레어넌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리사 멜로즈입니다.”
“저는 리에트 멜로즈라고 합니다.”
세 여인이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모녀지간인 듯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세 사람 다 무례하기는커녕 몹시 예의 바르게 인사했는데, 그녀들에게선 왠지 모르게 나를 향한 반감이 느껴졌다. 기분 탓이라고 하기엔 다소 노골적인 적의도. ……내가 혹시 뭘 잘못했나? 고민도 잠시. 나는 그 적대감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단장님께서도 제 딸들과는 처음 인사 나누시지요? 전쟁 중에 부상을 입은 제 오빠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의 간호를 직접 지휘하겠다며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통에 둘 다 승전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했답니다.”
멜로즈 백작 부인은 앞에 앉은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레어넌만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자식 자랑 같아 조금 부끄럽습니다만, 딸들이 어찌나 지극정성인지 아들의 회복 속도가 무척 빠르답니다. 의료 지식에 해박해 다른 기사들로부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칭찬도 들었지요.”
“아이, 어머니. 과찬이세요.”
그 노골적인 눈빛과 말투를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두 딸 중 누구라도 베르하르트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거머쥐길 바라 마지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당연히 내가 눈엣가시 같겠지.
“멜로즈 소백작의 회복 속도가 빠르다니 다행이군요.”
하지만 레어넌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하는 게 전부였다. 그 대신 잽싸게 말을 붙여 온 건, 아까부터 우리 쪽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던 주위 사람들이었다.
“정말 멜로즈 백작가는 타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가문이군요. 깊은 존경을 보냅니다.”
“그러게요. 하나뿐인 아드님은 몸소 전장에 나가 제국을 구하고, 백작 부인께서는 황실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물이시니……! 앞으로 멜로즈 가문에는 분명 홍복만이 이어질 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멜로즈 백작께선 전쟁 때문에 황폐해진 국경을 재건하는 일에 자원까지 하셨잖습니까. 지금도 그 척박한 곳에서 구슬땀을 쏟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멜로즈 백작가는 황실뿐만 아니라, 이 제국에 없어선 안 되는 분들이십니다.”
여기저기서 기다렸다는 듯 칭송과 찬사가 쏟아졌다. 덕분에 멜로즈 백작 부인의 입가가. 아니, 턱 전체가 위로 들려 올라갔다.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눈초리 역시 더욱 또렷해졌으나, 나는 별로 마음에 담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황궁 시녀에 불과했던 멜로즈 백작 부인이 황후의 최측근 자리인 의전장을 맡게 된 건 전쟁이 터진 직후라고 들었다. 그 파격적인 영전의 대가로 가문의 재산을 모두 전장에 쏟아부은 것은 물론, 하나뿐인 아들까지 등 떠밀 듯 전쟁으로 보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결과 아들은 부상을 입었고, 심지어는 보태기로 약속한 재산이 모자라 백작이 직접 국경으로 가 부족한 만큼 몸으로 때우는 중이라던가? 멜로즈가를 속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여럿이었지만, 나는 별로 비난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게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뭐라고 하겠어. 하지만…….
“이 테이블 장식은 멜로즈 백작 부인께서 내신 아이디어라지요? 어쩐지, 여태까지 참석했던 연회 중 단연 돋보인다 했어요.”
“오늘 후식을 책임질 제빵사도 부인께서 힘을 쓰신 덕분에 섭외할 수 있었다고 들었어요. 이런 완벽한 재원이 곁에 있다니, 황후 폐하께서는 정말 축복받은 분이세요.”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칭송은 점점 아첨으로 변해 갔다. 이쯤 되니 오늘의 주인공은 멜로즈 부인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정도까지 오면 보통은 부담스러워하거나 자제를 시킬 타이밍이건만, 그녀는 오히려 뿌듯하다는 듯 미소 지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때, 문밖을 지키던 시종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말을 멈춘 채 몸가짐을 바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레어넌도 마찬가지였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선 황제와 황후는 맨 끝에서부터 인사를 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들의 자리 바로 옆인 내 차례는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잘 와 주었소.”
치맛자락을 양손에 쥔 채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내 위로, 짧고 굵은 화답이 던져졌다.
“그대가 로렐라 메이레드군요.”
그 뒤에 이어진 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인자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후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유달리 주목을 받았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레어넌과 함께 왔기 때문이겠지.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레어넌, 오랜만이구나. 말하지 않으면 발길조차 하질 않으니, 자주 얼굴을 비치라고 명이라도 내려야 하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레어넌 단장이 참석해 준 덕분에 오찬장이 더욱 환하게 빛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이 제국의 앞날처럼 말이지요.”
“과찬이십니다, 황후 폐하. 이렇게 훌륭한 모임에 초대해 주셨는데, 어찌 빠질 수 있겠습니까.”
레어넌은 잔뜩 굳은 나와는 달리 이런 자리가 몹시 편한 듯 자연스러웠다.
“과연, 그렇다면 앞으로도 황후에게 오찬을 자주 열어 달라 부탁해야겠군.”
“폐하께서 명하신다면 하루가 멀다고 열어야지요.”
황제와 황후가 가벼운 농담을 한차례 주고받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들이 터졌다. 황제는 자리에 앉아도 좋다는 명을 내리며, 화려한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도 모두 각기 착석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이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긴장을 풀긴커녕,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는 게 고작이었다. 황후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그녀가 낀 레이스 장갑의 정교한 무늬를 하나하나 전부 셀 수 있을 만큼 지척인 거리에서.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황후의 시선은 이윽고 멜로즈 부인을 향했다.
“오늘 어쩐지 어깨가 유난히 무겁다 했더니, 곁에서 망토를 들어 주던 이가 없어서 그랬나 봅니다.”
그 말에 멜로즈 백작 부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황후 폐하를 모시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회장에 먼저 와 있었습니다.”
“별말을. 나를 대신해 귀빈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 주어 고맙군요.”
황후가 상냥하게 웃어 보이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폐하,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제 두 딸의 소개를 올리겠습니다. 우선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허락해 주신 데에 무한한 감사를…….”
“잠깐.”
그때였다. 황후가 손을 가볍게 들어 말을 막았다.
“레이디 메이레드.”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대답했다.
“네, 폐하.”
느닷없는 부름에 다른 사람들도 내 쪽을 힐끔댔다. 다들 무슨 일인지 의아한 기색이었다. 주변이 소리 없이 술렁이는데도 황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와서 앉지 않겠어요?”
다름 아닌 멜로즈 백작 부인의 자리였다.
“……네?”
“폐, 폐하.”
내가 반문한 동시에 멜로즈 백작 부인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아주 독특한 아이디어로 디저트 사업을 크게 성공시켰다 들었습니다. 덕분에 아우레아를 방문하는 사람도 무척 늘었다지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대와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답니다.”
아우레아라면 모를까, 수도의 중앙 사교계에는 이름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와 최측근까지 밀어 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니. 엄청난 폭탄 발언이나 마찬가지인데도 황후의 표정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앙 사교계에서는 물론, 북부 사교계까지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누구나 그대와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니, 사업 재능은 물론, 인격도 매우 훌륭한 분이 틀림없겠지요.”
“과, 과찬이십니다. 폐하.”
“레어넌 단장과 멜로즈 백작 부인은 모쪼록 내 변덕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길 바랍니다. 젊고 유능한 인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나의 큰 기쁨이기도 하니.”
두 사람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시종들이 다가와 나와 멜로즈 부인을 안내했다. 부인은 할 말이 많은 듯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레어넌은 잘되었다는 듯 평상시와 다름없이 다정한 미소를 보내 왔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불안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색이 된 안색과는 정반대로, 멜로즈 부인의 눈동자에 사나운 불길이 일렁거렸기 때문에? 그도 아니면 중간쯤의 자리에서 이 사태를 지켜보던 세이블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친 게 보여서?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황후 때문이었다. 만면에 인자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한껏 머금은 것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차가울 정도로 무감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