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거래2022.03.05.
위너드는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하필이면 황궁에서 열리는 오찬에 참석하기 위해 바삐 준비하던 때에.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더니 주변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하녀들이 전부 사라졌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굉장히 놀라거나 패닉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겠으나 내게는 아니었다.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까.
“위너드?”
나는 거울에 비친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화장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제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위너드는 오늘도 변함없이 화려한. 아니, 보통 때보다 더욱 힘을 준 듯한 정복 차림이었다.
“좀 바빠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가 넘치는 태도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람을 그렇게 황당하게 만들어 놓고 뻔뻔한 것 좀 봐. 그런데 정말로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피곤해 보였다. 심지어 두 눈은 좀 퀭하기까지 했다. 혹시 잠을 못 잔 걸까? 안내자는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거나 하는 일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 아니었어?
“후보 간에 주식을 양도하는 부분부터 모든 규칙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살펴보고 왔거든.”
“규칙……?”
“그래. 혹시라도 우리가 놓치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 무려 200만 주나 걸려 있는데, 철저한 준비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
위너드는 의기양양하게 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내내 규칙을 보느라 내 말을 무시한 거야?”
“무시한 게 아니라, 집중한 나머지 못 들은 거지. 미안.”
날카롭게 묻는 내 말에도 능글맞게 씩 웃어 보인 그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혹시 걱정했어?”
“뭐?”
“내가 나타나지 않아서 걱정했냐고.”
부르지 않아도 불쑥불쑥 나타나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지면 누구라도 걱정……은 무슨!
“조이를 시켜 옷을 가져오게 한 것도, 갑자기 비를 멈추게 한 것도 다 네 짓이지!”
“응? 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천장을 바라보며 딴청 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해졌다. 그래, 너 말고는 없을 줄 알았다! 나는 팔까지 걷어붙이고 씩씩대며 다가갔다.
“너는 그러고 사라지면 그만이라지만, 나는!”
“자, 잠깐. 로렐라. 그건 다 너를 위해…….”
위너드는 진정하라는 듯 양 손바닥을 내 쪽으로 향한 채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금세 벽에 막히고 말았다.
“조이는 지금도 자기가 뭐에 홀린 것 같다고 한다고. 심지어 카셀은 이미 네가 한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단 말이야!”
코앞까지 바짝 다가가,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려는데…….
“그럼 그대로 둘 걸 그랬나?”
“끝까지 시치미를 떼긴 했지만 정말 곤란…… 뭐?”
줄곧 쩔쩔매던 그가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워 달라니, 누가 봐도 시커먼 수작이잖아. 그런데도 괜한 참견이었어?”
괜히 정색해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수작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위너드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덕분에 나는 조금 당황해 말을 더듬고 말았다.
“아, 아니. 하지만…….”
“그리고 안내자는 후보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위너드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듬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쩐지 뿌듯해 보이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위너드가 지킨 건 내가 아니라…… 카셀이지 않을까. 그 유혹적인 외모와 애교에 홀려 하마터면 고삐 풀린 위험한 짐승이 될 뻔했다고! 하지만 이런 생각을 들킬 수는 없었다. 나는 괜히 거울을 보는 척하며 화장대에 놓인 장갑을 양손에 꼈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고.
“오늘 어쩐지 분위기가 좀 다르다 했더니, 레어넌 단장과 황궁에 가는 날이지?”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위너드가 내 목 언저리를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그런데 그걸 하고 갈 거야?”
손가락 끝이 내 목에 걸린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루비 목걸이를 향해 있었다.
“으응.”
나는 어쩐지 좀 민망해져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와 어딜 가는지 말하지 않아도, 위너드는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크게 다가왔다.
“오늘은 여러모로 화려하게 꾸미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럼 이게 더 낫지 않겠어?”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더니 우아한 몸짓으로 나를 돌려세웠다. 거울에 비친 내 목에는, 커다란 에메랄드 펜던트가 박힌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한여름의 신록을 고스란히 담아 둔 듯한 맑은 초록빛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펜던트 바깥쪽의 정교한 금세공 장식 또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역시 안목은 내가 더 낫네.”
내가 방금만 해도 걸고 있던 루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위너드 때문에 살짝 약이 오르긴 했으나 무어라 되받아칠 수 없었다. 황궁 오찬을 위해 조이가 정성껏 골라 준 연노랑빛 드레스와 에메랄드 목걸이가 마치 맞춘 듯이 잘 어울린 탓이었다. 내가 원한 그대로였다. 화려하면서도, 황궁 나들이에 걸맞은 우아한 분위기. 하긴. 평소 입는 옷이나 거기에 잘 어울리게 매치한 액세서리들만 봐도 위너드의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는 건 모를 수 없었다.
“이거…… 하고 갔다 와도 될까?”
“물론, 되고말고.”
조심스럽게 묻자 위너드가 기다렸다는 듯 시원스레 대답했다. 몹시 만족한 사람처럼 입술 끝을 한껏 위로 끌어올린 채. * * * 황궁의 한 건물 앞에 마차가 멈춰 서자, 레어넌이 먼저 내려 안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발판이 조금 높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다정한 당부에 로렐라가 수줍게 웃으며 살며시 손을 맞잡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붉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저 그뿐인데도, 레어넌의 눈동자는 눈부신 것을 마주한 듯 반짝거렸다.
‘시선을 떼지 못하겠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끝까지 말하진 못했지만, 마차 안에서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이젠 어떤 모습이든 그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렸다. 그래도 그런 말은 자제했어야 했는데. 레어넌은 후회를 삼키며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를 저택으로 바래다주던 날 저질렀던 무례했던 행동이 내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숙녀의 볼에 멋대로 입을 맞추다니,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경했다. 그날의 무례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신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시선은 살짝 홍조 띤 그녀의 보드라워 보이는 뺨에 닿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찬장으로 향하는 복도를 거닐며 신기한 듯 이것저것을 묻는 예쁜 입술에까지……. 순간 발을 멈칫한 동시에, 로렐라가 잡고 있는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탓인지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았다.
“단장님?”
갑자기 멈춰 섰으니, 이상하게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레어넌은 대답하는 대신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속으로는 자신을 향해 온갖 욕설을 날리면서. 이윽고 황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오찬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레어넌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황실의 측근들과 시종들의 눈길이 일제히 저와 로렐라에게 향했기 때문이었다. 베르하르트 가문의 차기 후계자로서, 레어넌은 주목을 받는 것에 무척 익숙했다. 어릴 때부터 자주 황궁을 드나들어 오찬에 초대받은 이들도 전부 아는 얼굴이었으니 평소라면 그가 긴장할 일은 전혀 없었겠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로렐라를 초대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그러니 그녀가 불편해하거나 곤란에 처하는 건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당연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한시도 떠나지 않고 계속 곁에 있겠습니다.”
그는 황궁 무도회 때처럼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전 괜찮아요, 단장님.”
하지만 기우였다. 로렐라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당당하게 어깨를 편 채로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쏟아졌지만, 만면에 가득 띤 여유로운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함께 황궁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땐 잔뜩 긴장해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야 비로소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러고 보면, 사냥 대회에서도 그녀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어디서든 화제의 중심이었고, 모두가 그녀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했다.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빠른 적응력과 남다른 사교성에 감탄하면서도 어쩐지 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단장님, 왜 그러세요?”
로렐라가 두 눈을 깜빡이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레어넌은 대답 없이 씁쓸함을 애써 삼킨 채 미소 지어 보였다.
“어머, 로렐라 님. 이런 곳에서 뵙네요.”
마련된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누군가가 로렐라에게 말을 걸어왔다.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 레어넌은 말을 건 이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흠잡을 데 없이 예의 바른 모습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어넌 단장님. 무척 오랜만에 뵙네요.”
“그렇군요, 릴리 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정중하지만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레어넌의 눈은 계속해서 로렐라만 좇고 있었다. 내내 평온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세이블 릴리’가 인사를 건넨 후 티 나게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세이블 님, 안녕하세요. 오늘 오시는 줄은 몰랐어요.”
그뿐만 아니라 목소리에도 탐탁지 않은 티가 역력했다. 자신과 세이블을 힐끔힐끔 번갈아 바라보는 표정 또한 조금 불편한 듯 보였다. 혹시 마주치면 곤란한 사이인가? 아무리 사교계에 빠르게 적응했다 해도, 모든 관계가 편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어머, 제가 저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전혀요.”
세이블은 생긋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잘못 알았나 봐요. 그래도 이렇게 뵙게 되어서 참 기뻐요.”
가만히 서서 대화를 듣고 있던 레어넌이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지만 두 분은…….”
그러자 세이블과 로렐라가 동시에 대답했다.
“아주 친한 친구예요.”
“그냥 아는 지인이에요.”
두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세이블은 짐짓 서운하다는 듯 살짝 눈을 깐 채 애처롭게 말했다.
“어머, 로렐라 님. 그냥 아는 지인이라니…… 저희가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요. ‘거래’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러자 로렐라는 인자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을 이었다.
“가까워진 건 사실이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이런 자리에서 나누긴 조금 부적절한 화제니까요.”
“죄송해요. 그날 로렐라 님께서 굉장히 의욕적이셔서, 말씀을 드려도 괜찮은 줄 알았어요.”
거래라, 대체 무슨 거래일까? 레어넌은 대화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로렐라가 의욕에 넘쳐 거래할 만한 거라면,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열과 성을 쏟아 개발한 디저트에 관한 것일 테지.’
그녀를 위해 레아의 가게에 자주 드나든 덕분에, 레어넌은 요즘 그곳에서 어떤 화두가 자주 오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케이크 위에 얹는 초콜릿 장식? 그도 아니면 달콤한 크림? 혹은 솜처럼 푹신한 과자? 생각을 이어 가던 그의 입가에 어느덧 감미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거래라니. 참으로 그녀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