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대가는 필요 없어 (70/173)

70화. 대가는 필요 없어2022.03.02.

거센 비는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을 뚫으며 퍼붓고 있었다. 방에도 작은 램프가 하나 켜져 있을 뿐이라 사위가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은발에선 반짝반짝한 빛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16550626603199.jpg“재, 재워 달라니. 여기서?”

16550626603204.jpg“안 돼?”

나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유혹하듯 흘러나왔다. 시선을 피하려 해도, 예쁘게 미소 지은 카셀이 워낙 바짝 다가와 있는 탓에 쉽지 않았다. 애교라도 부리듯 귀엽게 눈웃음쳤으나, 그의 눈동자엔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신이 정성 들여 빚은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완벽한 조각 같은 외모에서 눈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16550626603199.jpg“그, 저택에 빈방이…… 많으니까…….”

16550626603204.jpg“그러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더듬거리며 간신히 이어 가던 말을, 카셀이 딱 잘라 버렸다.

16550626603204.jpg“외간 남자가 드나든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곤란하잖아?”

내 저택에서 상주하는 고용인은 다른 귀족들에 비해 수가 적은 편이었고,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나에 대해 멋대로 밖에서 떠들 사람들이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카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만 깜빡였다. 어, 어쩌지?

16550626603204.jpg“응? 누나아.”

카셀이 배시시 웃으며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졸랐다. 마치 광란의 축제라도 벌어진 듯 종소리는 쉴 새 없이 울렸고, 시스템 화면은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렸다. 하지만 가장 눈부신 건……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카셀의 얼굴이었다. 잔뜩 젖어 더욱 애처롭게 느껴지는 빛나는 은발과 어깨까지 드러내 입으나 마나 한 하얀 셔츠가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위험해. 이러다간 덮칠지도 몰라. ……내가!

16550626603199.jpg“아냐! 그래도 역시……!”

한 마리의 위험한 짐승으로 변하기 전에 두 눈을 꽉 감고 고개를 격렬히 저었다.

16550626603204.jpg“누나, 나 추워.”

내 입을 막기 위해서인지 카셀이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이마를 댔다. 목을 간질이는 차가운 머리칼과는 달리 숨결은 따뜻했다. 심장 소리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마구 내달리기 시작한 그때. 쿠웅! 갑자기 문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친 듯한 소리였다. 화들짝 놀라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노크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16550626603236.jpg“아가씨, 아가씨!”

조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더욱 의아해졌다. 혹여 내가 깨기라도 할까 봐 발소리조차 조심한다던 그녀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으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카셀의 소매를 황급히 잡아끌었다.

16550626603199.jpg“여기에서 나오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알았지?”

창문가에 있는 커다란 장식장 옆 사각지대에 그를 밀어 넣고 신신당부한 나는 얼른 문을 열었다.

16550626603199.jpg“조이, 왜 그래?”

16550626603236.jpg“어머, 아가씨.”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방금의 다급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16550626603199.jpg“대체 무슨 일이야?”

16550626603236.jpg“아, 여기 옷이에요.”

16550626603199.jpg“……옷?”

나는 시선을 내렸다. 조이는 반듯하게 접힌 남성용 셔츠와 바지를 들고 있었다.

16550626603199.jpg“이게 웬 거야?”

16550626603236.jpg“네?”

내 질문에 그녀가 동그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16550626603236.jpg“그러니까 제가 이걸 아가씨께…… 어?”

그러더니 순간 말을 멈추곤 입술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천진난만했던 목소리가 혼란스러운 듯 흔들렸다.

16550626603236.jpg“왜…… 가져다드리려고 했죠……?”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나는 옷을 받아 그대로 펼쳐 보았다. 깨끗하게 세탁된, 아니. 새것이 틀림없는 고급스러운 셔츠와 바지였다. 우리 저택에서 이런 옷을 입을 만한 남자는 집사인 웨번 뿐인데.

16550626603199.jpg‘그렇지만 웨번의 옷은 아니야. 그가 입기엔 지나치게 고급인 것 같…….’

잠깐. 고급스럽다고? 그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16550626603236.jpg“그러니까 제가 아가씨에게…… 아니, 아가씨가 제게…….”

조이는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 역시 황당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어떻게 대처할지 머릿속은 이미 정리되었다. 아무래도 이런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일’에 어느새 면역이 된 모양이다.

16550626603199.jpg“아, 내가 부탁한 게 맞아.”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최대한 의연하게 대답했다.

16550626603236.jpg“네?”

16550626603199.jpg“자고 있었을 텐데 미안해. 잠결에도 이렇게 정확히 찾아주다니, 역시 조이라니까.”

그러고는 시선을 한데 두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하는 그녀를 향해 엄지를 세워 보였다.

16550626603236.jpg“아, 아닙니다. 아가씨.”

내가 치켜세워 주자 조이가 부끄러운지 손사래를 쳤다.

16550626603236.jpg“그럼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16550626603199.jpg“아냐, 이젠 괜찮아. 그럼 잘 자.”

유령에게라도 홀린 듯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한 조이의 어깨를 다정히 토닥여 주고 재빨리 문을 닫아 버렸다. 문에 등을 기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장식장 뒤에서 빠져나와 창문가에 서 있는 카셀이 보였다.

16550626603199.jpg“아니, 나오지 말라니까……!”

나는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하지만 책망 어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카셀은 그저 우두커니 서서 창밖만 보고 있었다. 그가 연 건지 활짝 열린 창문에선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도대체 뭘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는 걸까.

16550626603199.jpg“……응?”

카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거세게 퍼붓던 비가 어느새 그쳤다. 심지어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말끔히 갠 하늘 위로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16550626603199.jpg“이,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바깥을 응시하는 카셀의 눈빛은, 방금 조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 * * 하늘이 남빛으로 서서히 물드는 시각.

16550626603204.jpg“……그럼 가 볼게.”

먼저 백기를 든 건 카셀이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지, 그의 표정은 시무룩하기 그지없었다.

16550626603199.jpg“그래, 조심해서 가.”

내내 질문 공세에 시달렸던 나는 안도감과 함께 몰려오는 피로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한껏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젖은 옷 대신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새 옷을 갈아입은 그를 보며 나는 서늘해진 간담을 애써 진정시켰다. 조이가 가지고 온 옷은 마치 맞춘 것처럼 카셀에게 꼭 맞았다. 타이밍 좋게 부탁한 적도 없는 옷을 가지고 온 조이와 갑자기 비가 멈춘 일까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저 우연이라 치부하거나 놀라서 혼비백산했을 텐데, 카셀은 그러지 않았다. 도리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걸 가능하게 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하나 따져 가며 날카롭게 추론하기 시작했다. 그 끝에 카셀의 의심은 위너드를 향했다. 아니라고 쉽게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가 후작가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알고 있던 탓이었다. 레어넌의 날카로운 질문에, 카셀의 수하가 알 리 없는 내용까지 전부 증언했던 것 말이다. 카셀은 그날 후작의 저택 복도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봤다고 했다. 그리고 수하가 미리 말 맞춘 적 없는 내용을 얘기했던 게 모두 위너드의 흑마법 같다고 덧붙였다. 물론 ‘위너드’라는 이름을 직접 꺼낸 건 아니지만 ‘녹색 눈동자에 갈색 머리인 그 새끼’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일단 최선을 다해 시치미를 뗐다. ……씨알도 안 먹힌 것 같지만.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창문가로 향하는 카셀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카셀의 의심대로, 전부 위너드가 한 일일 것이다.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건 세상 제멋대로인 주제에 온갖 희한한 능력을 지닌 내 안내자밖에 없으니까. 이게 과연 도움을 준 건지, 아니면 골탕을 먹인 건지 경계가 영 모호하단 점도 위너드다웠고. 왜인지 순간, 안내자와 후보 사이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아주 이상적인 관계였던 세이블과 롯지가 떠올랐다.

16550626603199.jpg‘그런데 나는 왜 매일 시련뿐이냐고!’

안 그래도 주식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일로 머리가 복잡한데! 거기다 아직 카셀에게 나침반을 빌릴 수 있는지 확답도 듣지 못했다. 나는 억울함을 삭이며 창문턱에 발을 올린 카셀의 소매를 붙잡았다.

16550626603199.jpg“잠깐만, 카셀. 그…… 의뢰도 잘 생각해 줘. 아까도 말했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꼭 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16550626603199.jpg“……카셀?”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른 그때였다.

16550626603199.jpg“어라?”

짧은 탄성과 함께 나를 빤히 바라보던 시선이 갑자기 내 등 뒤로 옮겨 갔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방 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아주 작은 변화조차 없었다.

16550626603199.jpg“뭐야. 아무것도 없…….”

눈살을 찌푸린 채 중얼거리며 고개를 바로 한 그 순간. 이마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16550626688019.jpg

16550626603204.jpg“대가는 필요 없어.”

그것이 카셀의 입술임을 알아챈 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맞춰 간질이듯 스치는 촉감 덕분이었다.

16550626603204.jpg“다른 사람도 아닌 누나잖아?”

이윽고 이마에서 입술을 뗀 카셀이 나를 향해 눈이 시리도록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16550626603204.jpg“대신 조금만 기다려 줘. 부하를 시키면 좋겠지만 나침반을 보관해 놓은 곳에는 나만 들어갈 수 있거든.”

잘 자, 짧게 인사를 남긴 카셀이 창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자리에 못 박힌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다시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창가에서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16550626603236.jpg“아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늘은 일찍 일어나 계시네요?”

환히 웃으며 조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16550626603236.jpg“어휴, 어젯밤에는 제가 정말 잠에 취했던 모양이에요. 아가씨가 뭘 들고 오라고 시키셨는지도, 그걸 어디에서 가져왔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 있죠. 그래도 다행히……. 어머?”

그러더니 말을 멈추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빠르게 살폈다.

16550626603236.jpg“잠옷으로 갈아입지도 않으시고 이대로 주무신 거예요? 설마 밤을 새우신 건 아니죠?”

염려가 가득 배어 있는 다정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16550626603236.jpg“혹시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얼굴이 엄청 붉어요.”

16550626603199.jpg“아, 아니야. 안 좋긴.”

얼른 고개를 저었지만, 조이는 걱정스러운 듯 내게 다가오더니 서늘한 손으로 이마를 짚어 주었다. 바로, 카셀의 입술이 닿은 그 자리였다.

16550626603236.jpg“어머! 역시 열이 있는 것 같은데요……!”

조이가 외치는 동시에 아까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러자 얼굴에 정말로 뜨거운 기운이 화르륵 몰려왔다. 덕분에 나는 열이 점점 더 심해지기 전에 의사를 부르자는 그녀를 달래서 돌려보내느라 적지 않은 기운을 빼야 했다. 조이가 돌아가고 다시 고요가 찾아온 침실. 왠지 힘이 쭉 빠져 침대에 풀썩 엎드리자 부드러운 침구 아래에서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둥둥 들려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서 피곤할 법도 했건만, 정신은 방 안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만큼이나 또렷하기만 했다.

16550626603199.jpg“그, 그렇지.”

그러고 보니 밤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아직 위너드를 추궁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카셀더러 엄청난 사고뭉치라며 흉볼 땐 언제고, 정작 본인은 더한 사고를 치다니. 심지어 조이까지 동원해서. 이건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큰 소리로 외쳤다.

16550626603199.jpg“위너드!”

하지만 방 안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을 신나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지저귐뿐이었다.

16550626603199.jpg“위너드,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어서 나와 봐!”

제법 목청을 높여 말했는데도, 멋대로인 이 안내자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16550626603199.jpg“설마 어디서 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사실 내게 가장 큰 시한폭탄은 냉혹한 북부 대공도, 극악무도한 일을 벌인다는 은발의 길드장도 아니라 내 하나뿐인 안내자인 게 아닐까…….

16550626741695.jpg

165506267417.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