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저 자식이 돌았나2022.02.26.
카셀은 길드 본부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동굴 앞에 섰다. 쉬지도, 자지도 않고 오랫동안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이었다.
“자, 그럼 가시지요.”
동굴 앞에 선 남자가 카셀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움푹 꺼진 두 눈과 새까만 낯빛, 치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입까지. 보기만 해도 어쩐지 등골이 쭈뼛 서게 만드는 그는, 동굴을 지키는 문지기이자 검은 뱀 길드의 오랜 거래 상대였다.
“이번에는 정말 희귀한 마물들을 몇 마리 손에 넣었습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굴의 안쪽에서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괴성이 들려왔다. 그 덕분에 카셀이 각별하게 신임하는 길드의 소수 정예 멤버들조차 쉽사리 동굴 안쪽으로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모두가 긴장한 와중에 마치 이웃집에 놀러 가는 듯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은 오로지 카셀뿐이었다. 횃불을 들고 앞장서는 문지기를 따라 낮은 동굴 천장에 부딪히지 않도록 카셀이 허리를 굽힌 그때였다. 날갯짓 소리와 함께 작은 검은 새 한 마리가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잠깐.”
카셀이 짧게 명하자, 곁을 따르던 시드는 물론이고 길드원들의 발걸음이 일시에 멈추었다. 시드는 그 새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카셀 저 미친놈이 ‘로렐라 메이레드’만을 위해 길들인 전서조였다. 새는 강력한 마법의 힘으로 카셀이 어디에 있든 찾아올 수 있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마법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본부를 오가는 새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며 간곡하게 말리던 시드의 말조차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소식이 너무 늦을 거라고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물론 이런 자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오직 시드뿐이었다. 길드에서 급한 소식이 온 건 아닌가 싶어 굳은 얼굴로 선 길드원들을 헤치고, 시드가 카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하지만 카셀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같은 남자가 봐도 눈이 멀어 버릴 만큼 예쁜 미소로 서신만 바라볼 뿐이었다. 내용을 외우기라도 할 듯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그가 대뜸 고개를 확 들더니 말했다.
“난 돌아간다.”
“뭐?”
귀를 의심할 만한 소리에 시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지만, 카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답했다.
“돌아간다고.”
……불행히도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길드장님, 무슨 일입니까?!”
“카셀 님……?”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인지라 길드원들도, 마물 상인도 모두 놀라 한마디씩 보탰으나 그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카셀! 야, 인마!”
시드가 허겁지겁 매달리듯 그의 팔을 잡았다.
“희귀 마물이 들어왔고, 우리가 첫 고객이라고. 이거 중요한 거래인 거 알잖아, 어?”
그런 시드의 귓가에 카셀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럼 뒷일을 부탁할게.”
그러고는 짧은 한마디만 남긴 채 훌쩍 말에 올라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길드장님이 왜…… 저러시는 겁니까?”
“대체 무슨 일이래요?”
길드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시드를 둘러싸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돌처럼 굳어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나밖에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 생겼대.’
시드의 귀에는, 카셀이 뿌듯한 목소리로 속삭인 이야기가 맴돌았다. 그는 이미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셀과 함께하며 세상 모든 미친 짓은 이미 다 구경했다 여겼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미친놈의 때늦은 첫사랑은 정도를 몰랐다. * * *
“왜 연락이 안 오지?”
나는 세차게 비가 내리는 밤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우기가 시작됐다더니, 요즘 아우레아에는 하루걸러 한 번씩 비가 내렸다. 침실을 서성이는 발걸음에 조급함이 실렸다. 오늘 낮에 일의 진행 상황을 묻는 세이블의 편지를 받은 탓이었다. 카셀에게 서신을 보내 두긴 했지만, ‘네게 꼭 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말 외에 따로 덧붙이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 게 나으니까. 게다가 카셀을 화나게 한 세이블의 부탁이니만큼, 나 역시 퍽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세이블에게 잘 진행되고 있다 답신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카셀의 연락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평소 같으면 불쑥 쳐들어왔을 텐데, 대체 왜 아직도 조용한 거야.”
“뭘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려?”
다시 한번 손톱을 깨무는데, 내가 어젯밤 읽다 잠든 소설책을 보고 있던 위너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때 되면 알아서 오겠지.”
어쩐지 불퉁한 목소리. 나는 초조한 마음을 잠시 밀어 둔 채 투덜대는 위너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이블 주식을 받을 생각에 좋아할 땐 언제고, 왜 저래? 주식을 양도하는 방법에 대해 아주 신이 나서 설명하던 위너드의 얼굴은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었다. 그를 알게 된 이후 그런 얼굴은 처음 봤으니까. 어쨌든 그걸 위해서라도 카셀과 빨리 협상해야 하고,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대체 왜 아까부터 저렇게 삐딱하게 구는 걸까. 아니, 비단 지금뿐만이 아니었다. 카셀에게 서신을 보낸 뒤로, 위너드는 하루가 멀다고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잠까지 설치며 카셀만 기다리는 나를, 종종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카셀도 그랬었지.
‘중요한 건 그 자식이 나를 제대로 열 받게 했다는 거야.’
카셀은 바자회 사건의 혐의를 벗은 직후, 날 위해 시종으로 분했던 위너드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그때 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마주치기만 하면 신경전을 벌이는 레어넌과 펠리어트 때문에 늘 불안한데, 너네만이라도 안 싸우면 안 되겠니!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려던, 그때. 창문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크게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
“카셀!”
“안녕, 누나?”
비를 뚫고 온 건지,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선 카셀의 몸은 온통 다 젖어 있었다. 그에게 깨끗한 수건을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리는데, 순간 위너드가 침실에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설마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카셀의 앞을 몸으로 막았다. 그리고 황급히 위너드가 앉아 있던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저 테이블 위에, 읽다 만 소설책이 그대로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 * *
“그래서, 부탁이 뭐야?”
카셀은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로렐라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그러자 원하던 말을 드디어 들었다는 듯,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깨끗하고 푹신한 수건을 어깨 위에 두르고 그녀가 직접 가져다준 따듯한 핫초코를 마시며 노닥거리기만 한 지 벌써 한 시간 반이나 흘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만 부탁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고, 되도록 빨리 만나자고 했으니 분명 다급한 일일 텐데. 그런데도 먼저 이야길 꺼내지 못하는 걸 보니 좀 곤란한 부탁인 게 틀림없었다.
“그게 사실은…….”
특히나 어렵사리 입을 열기 무섭게 굳어지는 그녀의 얼굴이 그 추측이 옳다는 걸 증명했다. 카셀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깍지 낀 양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채 그녀가 조심스레 늘어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그러니까 결국 세이블 릴리에게 나침반을 빌려주라는 말이야?”
그는 로렐라를 향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그녀가 한층 더 굳은 얼굴로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흐음.”
세이블 릴리라. 그 여자 의뢰를 왜 안 받기로 했더라. 아, 그래. 큰돈을 제시해서 받긴 했는데, 안 그래도 위험한 의뢰라 퍽 내키지 않았었지. 역시나 우려했던 대로 일이 터졌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 나오던 그녀와 길드원 하나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세이블은 다행히 별일 없었지만 소중한 그의 부하가 갇혔다. 길드는 그를 구해 내느라 크게 애를 먹어야 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부하는 덜덜 떨며, ‘그녀는 함정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부하의 증언은 신빙성이 있었다. 카셀은 몹시 화가 났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거다. 목숨도 위협할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공유하지 않았단 말이지……. 증거가 없어 보복하기엔 상황이 애매했다. 대신 카셀은 길드원들에게 그녀의 의뢰는 받지 말라고 명했다. 면박을 주고 쫓아낸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종종 길드를 찾아와, 황당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카셀, 도와줄 수 없을까?”
자신을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카셀은 생각을 마치고 천장을 향했던 시선을 내렸다. 로렐라가 초조한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예쁘게 빛나는 붉은 색 눈동자에 오롯이 저만 비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그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마음에도 없는 소릴 입에 담았다.
“글쎄. 어떻게 할까.”
“물론 고원의 보물을 갖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찰 수도 있어. 길드에는 온갖 진귀한 것들이 가득할 테니까. 세이블이 주는 돈도 사실 크게 상관없겠지.”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부탁할 수 없을까?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거든. 물론 거래 조건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 제시해도 좋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카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로렐라가 앉은 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뭐든?”
“그래, 뭐든 간에.”
그러고는 그녀를 가두듯이 의자 팔걸이에 양손을 짚은 채 내려다보았다.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였으나 로렐라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보란 듯이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좋아, 그럼…….”
승낙할 듯 흔쾌히 끄덕이며 지은 미소에 로렐라가 환희의 표정을 짓던 그때. 카셀이 아직도 다 마르지 않은 셔츠의 단추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카, 카셀?”
당혹스러운 나머지 높아진 목소리에 맞춰 로렐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놀란 듯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역시도 그가 기대한 대로였다. 느릿한 손길을 따라 흠 하나 없는 조각 같은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앳된 얼굴과는 달리 남자다운 근육으로 꽉 찬 아름다운 몸이었다.
“먼 길을 달려와서 그런지 엄청 피곤하거든. 비에 쫄딱 젖기까지 하고.”
“아, 그, 그래. 피곤……하겠구나.”
로렐라는 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놓치지 않고 따라가 셔츠를 뒤로 젖혀 넓은 어깨를 드러냈다.
“응, 무지 피곤해. 그러니까 오늘 이 방에서…… 재워 줘.”
“뭐, 뭐라고?”
“밖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돌아가기 힘들 것 같아서 그래, 응? 재워 주라, 누나.”
그녀의 얼굴이 마치 단풍잎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얼굴을 눈동자에 가득 담으며, 카셀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마처럼 속삭였다.
“얌전히 잠만 잘게.”
* * *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리는 빗줄기가 백작가 복도의 커다란 창문을 쉴 새 없이 두들겼다. 은장식이 달린 커다란 나무 문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던 한 남자가 순간 케인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그의 손등엔 굵은 힘줄이 돋았다. 늘 여유가 넘쳐흐르던 초록빛 눈동자에도 불이 붙은 듯했다.
“저 애송이 자식이 미쳤나…….”
꽉 다문 잇새로 이를 가는 소리가 흘러나온 그때,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던 여자가 그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조이였다.
“어머, 무슨 비가 이렇게 많이 온담?”
바로 코앞에 낯선 남자가 서 있는데도 조이는 그저 창문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