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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네 그런 점이 좋긴 하지만 (68/173)

68화. 네 그런 점이 좋긴 하지만20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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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사랑했던 사람은 세이블의 순수한 믿음을 무참히 저버렸고, 비록 반밖에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이라 여겼던 동생은 죽어 가는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그 눈빛과 웃음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복수. 그들이 줬던 수모를 고스란히 갚을 수만 있다면, 목숨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세이블은 이를 꽉 문 채, 밭은 숨을 소리 없이 내쉬며 간신히 마음을 달랬다. 로렐라 메이레드는 고민하는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세이블 역시 대답을 재촉하기보단 일단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로렐라 메이레드에게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갑자기 자신이 후보인 걸 밝히는 것도 모자라 주식 거래를 제안하다니. 대체 언제부터 계획한 걸까. 로렐라가 세이블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었을 리는 없다. 그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생각해 냈다는 것인데…….

16550626211111.jpg‘평범한 백작 영애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원하는 걸 얻을 수만 있다면야 그까짓 주식 따위 줘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수완은 놀라웠다. 약점을 잡히고 바들바들 떨었던 것조차 전부 연기였다니. 속아 넘어간 스스로가 웃기기도 해 세이블은 옅게 미소 띠었다. 게다가 저 안내자는 또 어떻고. 그녀는 차를 음미하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훑었다. 짧은 시간 동안 상황을 파악하고 거래의 흐름을 자신 쪽으로 끌어온 로렐라 메이레드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이지만, 가장 위험한 건 저 남자였다. 몸속 깊은 곳에 각인된 듯한 귀족적인 행동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뒤를 돌아보게 할 외모. 만면 가득히 다정하고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가끔 눈빛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섬뜩할 때가 있었다. 마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전부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듯 번뜩이곤 했으니까. 안내자는 성격도 취향도 모두 다르다는 얘길 롯지에게 듣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다를 줄은 몰랐다. 작은 거짓말조차 투명하게 보이는 자신의 안내자와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16550626211111.jpg‘……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세이블은 생각을 갈무리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간은 충분히 줬으니 이젠 대답을 들을 차례다.

16550626211111.jpg“그래서, 저와 거래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그녀가 던진 말에 로렐라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26211127.jpg“물론.”

그러자 잘생긴 안내자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심지어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게 못내 자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롯지는 또다시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무너져 내렸지만, 세이블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16550626211111.jpg“좋아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로렐라 님의 말만 믿을 순 없으니, 검은 뱀 길드의 길드장과 접촉한 증거를 보여 주시면 100만 주를 양도해 드리죠. 나머지 100만 주는…….”

16550626211127.jpg“그가 의뢰를 받겠다고 하면 준다는 거지?”

16550626211111.jpg“네.”

16550626211127.jpg“좋아. 원하는 답을 가져다줄게.”

로렐라는 자신 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 직후 그녀의 안내자는 로렐라에게 다정히 귓속말을 속삭이더니 아무런 말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롯지 역시 여전히 불만이 많은 듯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이만 물러가 보라는 세이블의 명에는 반항하지 못하고 깍듯이 인사를 건넨 뒤 모습을 감추었다. 그 모습을 로렐라가 못마땅한 듯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의 찻잔은 네 개였으나 응접실에 남은 사람은 처음과 똑같이 둘뿐이었다.

16550626211111.jpg“용건은 끝났으니, 저도 이만 가 봐야겠어요.”

세이블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법에 맞춰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로렐라 역시 몸을 일으켰다.

16550626211127.jpg“마차까지 배웅해 줄게.”

두 사람은 응접실을 나선 뒤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복도를 사뿐사뿐 걷는 두 영애의 뒷모습은 누가 봐도 사이좋은 친구처럼 보였다. 현관 밖으로 나가자 마부가 이미 세이블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고급스럽고 화려한 보랏빛 마차였다. 세이블이 마차 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딛던 그때, 뒤에서 조용히 로렐라가 입을 열었다.

16550626211127.jpg“저기, 세이블.”

16550626211111.jpg“왜 그러시죠?”

16550626211127.jpg“실은 궁금한 게 있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아까 당당했던 모습과는 달리 먼저 말을 꺼내고도 몹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세이블은 말해 보라는 뜻으로 일단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다소 뜬금없는 화제였다.

16550626211127.jpg“네 안내자 있잖아…….”

16550626211111.jpg“롯지 말인가요?”

16550626211127.jpg“응.”

곤란한 질문이라도 하려는 건가 했더니, 안내자 이야기라니. 너무 갑작스러워 황당하기까지 했지만, 끝까지 듣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세이블은 기품 있는 자세로 꼿꼿이 서서 잠시 로렐라의 말을 기다렸다. 여전히 망설여지는 듯 한참 시선만 이리저리 굴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16550626211127.jpg“걔도 혹시 멋대로 불쑥불쑥 나타나?”

이건 무슨 소리지? 본론을 듣고도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세이블은 의구심을 잠시 접어 둔 채 고개를 저었다.

16550626211111.jpg“처음 만났을 때와 규칙이 새로 생겼을 때를 제외하면, 그런 적 없어요.”

16550626211127.jpg“정말? 그럼 네가 불러야만 나타나는 거야……?”

16550626211111.jpg“부르지 않았는데 나타날 이유가 있나요?”

뭐 이런 질문이 다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이블은 친절하게 덧붙였다.

16550626211111.jpg“저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고, 안내자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불필요하게 대화할 필요는 없죠. 기별도 없이 멋대로 나타난다니, 무례한 일 아닌가요?”

16550626211127.jpg“그래, 그렇지! 맞아!”

로렐라가 주먹을 불끈 쥔 채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조금 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0626211127.jpg“그럼 혹시…… 왜 주식을 이것밖에 못 팔았냐고 잔소리를 하거나, 다음 타자로 소멸되고 싶냐는 협박을 한 적도…… 없어?”

그 질문에는 세이블도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다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복수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삶의 목표이자, 의미였다. 그 와중에 ‘주식’이라는 것이 제멋대로 팔렸을 뿐. 그렇기에 이때까지 한 번도 주식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복수에만 성공할 수 있다면 소멸해도 좋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롯지에게도 가끔은 미안할 때가 있었다. 그런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는 걸 아니까. 그런 롯지가 잔소리를 한다니.

16550626211111.jpg“상상도 할 수 없…….”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로렐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로렐라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16550626211127.jpg“아, 내가 아니라, 친구 이야기야.”

16550626211111.jpg“……친구요.”

16550626211127.jpg“으응. 또 다른 후보인 어떤 친구…….”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세이블은 적당히 그 장단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굳이 캐묻고 싶은 주제도 아니었을뿐더러, 로렐라의 표정 역시 제발 묻지 말아 달라는 듯 간절했으니까.

16550626211111.jpg“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로렐라에게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 * * 세이블이 돌아가자마자 곧장 서재로 향했다. 카셀에게 서신을 쓰기 위해서였다. 저녁 식사도 서재에서 먹겠다고 말해 놓은지라 소파 테이블 위에는 조이가 두고 간 따듯한 수프와 두툼한 소고기를 끼워 넣은 샌드위치, 그리고 와인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음식에 손을 대긴커녕 여전히 백지상태인 편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16550626211127.jpg‘카셀에게 어떻게 운을 떼야 하지?’

어설픈 거짓말은 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 해 봤자 소용없을 게 자명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세이블에게 부탁받아 의뢰하는 거라고 하면 카셀이 마뜩잖아 할 것 같고…….

16550626295917.jpg“고민할 필요가 있나?”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대고 있는데, 소파에 앉아 고상하게 와인을 마시던 위너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16550626295917.jpg“그냥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 녀석은 네가 말하면 다 들어줄 기세던데.”

말은 참 쉽지, 말은 쉬워. 태연자약한 위너드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부아가 다 치밀었다. 세이블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누군 그렇게 깍듯하게 대접받는데, 누군 이렇게 개무시당하고. 아, 나도 이렇게 도둑처럼 불쑥 나타나는 것도 모자라 남의 와인까지 멋대로 축내는 안내자 말고 나한테 상냥하고 잘해 주는 안내자를 만났어야 했는데!

16550626211127.jpg“위너드.”

나는 불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16550626295917.jpg“응?”

16550626211127.jpg“안내자 배정은 어떻게 받게 되는 거야?”

뜬금없는 질문에 위너드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태연자약한 미소를 지었다.

16550626295917.jpg“보통은 시스템이 매칭해 주지. 기왕이면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으로. 물론, 나처럼 직접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16550626211127.jpg“그래, 그렇구나…….”

대체 왜 날. 나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입안으로 우물거렸다. 그러자 위너드가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16550626295917.jpg“왜. 내가 널 선택한 게 불만이야?”

……이럴 때 보면 아무래도 독심술로 내 마음을 읽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대답 대신 보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물론 위너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지만. 할 일 없는 한량처럼 와인이나 홀짝거리는 그를 애써 무시한 채, 다시 펜을 잡았다. 그리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카셀에게 보내는 짤막한 서신을 다 작성했다. 카셀이 준 전서조가 서재 한편에서 마치 기다리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서신을 새의 발목에 묶고 새장을 든 채로 창문가에 다가갔다. 어느새 깜깜해진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새는 궂은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장 문을 열자마자 허공 위를 쏜살같이 날아서 곧 사라졌다. 200만 주라……. 세이블이 주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성격상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자신이 소멸하지 않을 정도의 주식만을 내게 넘기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대부분을 내게 양도하는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든 나침반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간절함도, 복수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말도 전부 진실해 보였으니까. 그러니 롯지도 그렇게 안절부절못했겠지.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곁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626295917.jpg“아가씨, 쓸데없는 동정은 금물이야.”

고개를 돌리니 소리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위너드가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16550626295917.jpg“물론 네 그런 점이 좋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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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 때문일까. 한여름의 우거진 신록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유독 다정하게 느껴졌다.

16550626211127.jpg“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는 일부러 매몰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16550626295917.jpg“굳이 말을 해야만 아는 건 아니니까.”

위너드는 가볍게 웃더니 다시금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16550626295917.jpg“그리고 네가 ‘허튼’ 결정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특정 단어에 유독 힘을 줘 말한 것은, 분명 의도적인 거겠지. 속마음을 훤히 알면서도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괜히 뜨끔했다.

16550626211127.jpg“누구보다 잘 안다니. 너무 근거 없는 과신 아니야?”

16550626295917.jpg“아니, 나보다 너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걸. 예전부터 널 지켜봤으니까.”

16550626211127.jpg“지켜봤다고? 언제부터?”

이러다 숨겨 둔 계획을 들킬까 봐 화제를 돌리려 한 건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입을 열었다.

16550626295917.jpg“아들과 이혼해 달라는 말에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바라보며 억지로 눈물을 짜냈을 때부터.”

16550626211127.jpg“뭐……?”

16550626295917.jpg“남몰래 웃으면서 돈 자루를 낚아챘을 때도.”

16550626211127.jpg“…….”

16550626295917.jpg“그리고 책상 위에 금화를 탑처럼 잔뜩 쌓아 놓고는, 펑펑 쓸 거라며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히죽대던…….”

16550626211127.jpg“그, 그만.”

나는 황급히 위너드의 말을 끊었다. 모두 주인공 후보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도 날 보고 있었다는 놀라움보다, 흑역사에 가까운 과거를 들켰다는 창피함이 더 컸다. 위너드는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웃더니, 손을 뻗어 점점 더 거세진 비가 들이치는 창문을 굳게 닫았다. 작고 동그란 물방울이 수없이 맺히기 시작한 유리창 위로, 램프에서 너울거리며 뻗어 나온 빛 그림자가 크게 일렁였다.

16550626295917.jpg“아무튼, 그때부터 내 모든 걸 너에게 걸었다는 것만 말해 두지.”

빗소리만이 가득한 서재 안에, 진지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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