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그녀가 원하는 것2022.02.16.
“도대체 왜 온 거지?”
위너드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후보인 걸 알아챘을 리는 없고.”
그뿐만 아니라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차디찼다.
‘펠리어트 저리 가라네.’
나는 세이블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은 채 위너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위너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비록 내가 후보라는 건 모른다 해도, 나라는 사람을 아는 게 아주 이상한 건 아니었다. 비록 접점은 없었지만, 이 좁디좁은 사교계에서 내 이름을 듣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펠리어트 공작과 혼인 무효가 된 여자라든지, 아니면 아우레아에서 디저트 사업을 하는 귀족 영애가 있다는 소문 정도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나를 찾아온 데는 어쨌든 간에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만나 보지 뭐.”
“……로렐라.”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또 모르잖아.”
나는 여전히 굳은 표정인 위너드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내게 또다시 커다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기회가 될지.”
라이벌의 순기능이 바로 그런 거 아니겠냐며 덧붙이자 위너드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여전히 마음엔 안 들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반대하기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물론, 고작 동기 부여를 위해 세이블을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왜 찾아왔는지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진짜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주식을 파는 것. 아마 위너드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전생에 독자였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잘만 하면 레어넌이나 펠리어트, 그리고 카셀 못지않게 로렐라X세이블 주식도 꽤 쏠쏠하게 터질 거라는 것을!
“여차하면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나는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쉽사리 펴지 못하고 있는 위너드를 향해 다시 한번 곱게 웃어 보였다. * * * 잠시 심호흡한 뒤 조심스럽게 응접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네’ 하고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잡고는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러자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세이블이 마찬가지로 허리를 굽혀 화답했다.
“아닙니다, 로렐라 님. 아무 약속 없이 찾아온 제 잘못인걸요.”
말투는 정중했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기품이 흘렀다. 흠잡을 곳 없는 예절이었다. 과연 제국 서부를 꽉 쥐고 있다는 지체 높은 후작가의 일원다웠다.
“전 릴리 후작가의 세이블 릴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정말 죄송해요.”
어두운 달밤에 처음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그녀는 정말 시선을 뺏길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일단 그녀에게 어서 앉으라 권하고,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하녀가 다가와 내 찻잔에도 차를 따라 주었다.
“무례한 방문인데도 이렇게 만나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나는 재차 사과를 건네는 그녀에게 손을 저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찾아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실은 황궁 무도회에 갔을 때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는데, 따로 인사를 못 드려서 아쉬웠답니다.”
“어머나, 황궁 무도회라면 혹시 승전 기념 무도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저야말로 그때 먼저 인사를 드릴 걸 그랬네요.”
나는 환하게 웃는 세이블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럼에도 긴장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준비된 다과까지 전부 테이블에 올려 준 하녀는, 네모반듯하게 접은 냅킨을 찻잔 옆에 놓아두는 걸 끝으로 뒷걸음질해서 자리에서 멀어졌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보통 이렇게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찾아온 용건을 묻는 것은 귀족 사회에서 그렇게 예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계획된 것이었다. 여기에 찾아온 용건도 모르는 채로 에둘러 하는 대화만 나누며 나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았고, 그녀가 얘기하게끔 먼저 하녀를 내보내기라도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내가 연기하는 건 그야말로 순수하게 ‘낯선 손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백작가의 귀족 영애’ 그 자체여야만 했다.
“메이레드 님.”
“로렐라라고 불러 주세요.”
“감사합니다, 로렐라 님. 사실은 드릴 말씀이 있긴 한데…….”
세이블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뒤 하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
나는 그제야 눈치챈 것처럼 얼른 하녀를 향해 고갯짓했다. 이윽고 응접실에는 우리 둘만이 남았다. 세이블은 여전히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무도회에서 로렐라 님을 뵈었던 것이 기억나요. 레어넌 단장님과 춤을 추셨죠?”
곧장 본론을 꺼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세이블은 뜬금없는 주제를 던졌다. 레어넌 단장 얘기는 갑자기 왜 하는 거지?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어서, 무척이나 보기 좋았답니다.”
“그분과는 좋은 친구 사이예요.”
나는 행여나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자 세이블이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단장님이 일부러 바자회 사건을 맡으셨던 거군요? 아,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저희 영지까지 그 얘기로 떠들썩했었거든요.”
“아뇨. 그 사건은 명을 받아서 하신 일이에요.”
“그렇군요. 로렐라 님께서 많이 도와주셨겠어요. 들리는 얘기로는 그날 그 자리에 있으셨다던데.”
“아, 네……. 뭐, 그렇죠.”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가 계속되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하필 바자회 사건을 꺼내는 바람에 불안도 커져 갔다. 그때의 사건은 결국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 ‘검은 뱀 길드’의 소행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게 되었지만, 그들을 도운 자가 있을 거라는 소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나 또한 그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이 다소 껄끄러웠다. 대체 이 얘기는 왜 꺼낸 걸까. 고작 이런 대화나 나누자고 찾아올 사람은 절대 아닌데.
“두 분의 돈독한 우정이 정말 부러워요. 셰릴 백작님의 사냥 대회에도 함께 가셨다면서요? 아, 제 동생이 참가해서 들었는데, 혹시 만나셨나요?”
“아, 네. 동생분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확히는 세이블의 예전 약혼자와 아주 진한 입맞춤을 나누던 장면이 뇌리에 깊게 남아 있는 거지만.
“로렐라 님도 사냥을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무척 좋아하는데, 다음에 함께 가는 건 어떠세요?”
“예? 아, 아뇨. 대회에 참가하긴 했지만, 전 활을 잘 쏘는 편이 아니라서…….”
“어머, 그럴 리가요. 아주 작고 바위틈에 숨어 있어 발견하기조차 어려운 두꺼비를 연달아 잡으셨다던데…….”
세이블은 잠시 뜸을 들이는 듯싶더니, 이내 입꼬리를 위로 한껏 끌어올렸다.
“사냥 대회에 처음 참가하시는 분이 어떻게 그런 걸 잡을 수 있었을까요?”
온화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미소가 처음으로 싸늘하게 느껴졌다. * * * 세이블은 시시각각 변하는 로렐라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어리둥절하던 처음과는 달리, 지금 그녀의 눈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첫 참가자는 그래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다소 공격적인 대꾸가 그걸 증명했다. 평정을 가장하려 하지만 세이블의 눈에는 그녀의 불안한 시선이 훤히 보였다.
“그럴 리가요. 그저 놀라워서 여쭤봤어요. 사냥을 즐기시는 것도 아니고, 활을 잘 쏘시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세이블은 로렐라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써서는 안 되는 특수한 화살로 잡은 건 아닐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네요.”
“어머,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오싹하리만치 차가운 웃음이 세이블의 입가에 걸렸다.
“철저하기로 유명한 셰릴 백작님의 사냥 대회에 마법을 두른 화살을 몰래 전해 주다니.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검은 뱀 길드의 길드장과 아주 가까운 사이이신가 봐요.”
“네……?”
세이블은 볼에 보조개가 팰 정도로 환히 웃으며 조용히 쐐기를 박았다.
“레어넌 단장님과 로렐라 님의 사이처럼.”
그녀에게서 확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렇다 할 변명도 한마디 하지 못한 채, 그저 굳게 입술을 다물고만 있는 걸 보면 세이블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세이블은 우아하고 느긋한 몸짓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로렐라 님. 제 의뢰를 받아들이라고 검은 뱀 길드의 길드장을 설득해 주세요. 이 말을 하기 위해 찾아온 거예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부정하지도 않는 걸 보니,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걸 빨리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훨씬 빨라질 테니 세이블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물론 대가는 제대로 드리죠. 길드장을 설득만 해 줘도 천 골드, 의뢰를 받아들여 주면 거기에 천 골드 더 얹어 드릴게요. 어때요?”
“이, 이천 골드를요?”
로렐라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복도며 응접실 내부만 봐도 저택의 사정이 어떤지는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마 만져 본 적도 없는 금액일 테지.
“그래요.”
세이블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놀라 눈을 크게 뜨던 로렐라가 차를 조용히 홀짝이더니 곧 과하게 차분한 태도로 변한 것이다. 그저 마음을 진정시켰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기묘한 반응이었다. 언뜻 보면 세이블의 제안에 전혀 감흥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원하는 게 돈이 아닌 건가.’
그렇게 판단한 세이블은 다시 입을 열었다.
“황궁 알현실에 자리를 얻어 드릴 수도 있어요. 마침 메이레드 백작께서 부재중이시니, 가문 내 로렐라 님의 지위를 높이기엔 안성맞춤이죠.”
“알현실 말이죠…….”
로렐라는 한 박자 늦게 앵무새처럼 자신의 말을 따라 했다. 그녀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어쩐지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로렐라 님.”
세이블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전 어느 상황에서든 제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선택지를 고르는 걸 유독 잘하는 편이랍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만약 제가 로렐라 님이라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최선일까, 하고요.”
마치 아이를 다루듯 상냥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에 담긴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누구나 어둠은 숨기고 싶어 해요. 그 속에서 이루어진 교류라면 더더욱. 잘못했다간 모든 걸 다 잃을 수도 있거든요.”
“…….”
“평판이 중요하거나,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더욱 그렇겠죠.”
세이블은 나름대로 로렐라에 대해 많이 조사해 두었다. 덕분에 그녀에게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아주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척박한 북부 땅에서 남편도 없이 홀로 저택을 지키던 그녀는 당당히 공작가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 사업까지 성공시켰다. 심지어는 그걸 바탕으로 꽤 활발한 사교 활동도 이어 가고 있었다. 거물까진 아니더라도, 사교계에서 그녀의 입지는 작지 않았다. 각종 모임의 파트너로 종종 다른 사람도 아닌 레어넌 베르하르트를 대동하기도 했으니까. 로렐라 메이레드의 인생은 지금이 황금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검은 뱀 길드와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았을 때 이야기다. 세이블이 그걸 발설하기라도 한다면, 로렐라의 인생도 사실상 끝이었다. 아마 그 사실은 로렐라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막 꽃이 피려는데, 그걸 망치고 싶진 않겠지.
“바자회 사건 때 조사까지 받았던 로렐라 님께, 검은 뱀 길드가 화살을 만들어 주었다는 걸 레어넌 기사단장님이 알면 몹시 곤란해지시겠죠?”
만에 하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것조차 먹히지 않는다면 그땐 세이블도 방법이 없었다.
‘목숨이 달린 문제로 만들 수밖에.’
그건 세이블에게도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었다. 귀족을 납치해 살해 협박 하는 건 중죄니 일이 끝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리는 수밖에 없으니까. 다소 과격한 방법이 되겠지만 세이블에게도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동생이 눈치채기 전에 마엘라 고원의 보물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드가 가지고 있는 ‘그 물건’이 필요하다. 생각을 이어 가던 세이블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그때였다.
“좋아요. 제가 어쩌면……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상황에 맞지 않게 밝은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니, 로렐라가 어느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레어넌 단장에게 카셀과의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말이 먹힌 모양이다. 덕분에 최후의 단계까지 가지 않아도 일이 잘 풀릴 듯했다.
“단, 원하는 걸 들어주신다면요.”
세이블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삼켰다. 협상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 처음부터 뜸은 적당히 들였어야지. 하지만 그녀는 비웃음으로 가득한 속내를 감쪽같이 감춘 채 물었다.
“아무래도 제가 로렐라 님의 생각을 잘못 짚은 모양이군요. 원하시는 게 뭔가요?”
잠시 말없이 세이블을 바라보던 로렐라는 천천히 창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을 반쯤 가리고 있던 커튼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젖혔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노을이 응접실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물었다.
“정말 제가 원하는 걸 주실 건가요?”
“물론이죠. 뭐든 말씀해 보세요.”
그 순간 로렐라가 세이블을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타오르는 노을을 등진 그녀의 머리는 그야말로 핏빛처럼 붉었다.
“주식.”
세이블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주식을 주면 협조해 줄게.”
벌벌 떨던 모습도, 깍듯이 존댓말을 이어 가던 주눅 든 목소리도 온데간데없었다. 로렐라는 느른히 팔짱을 낀 채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나도 너처럼 주인공 후보거든.”
몸에 착 달라붙는 어른스러운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소를 가득 머금은 입술과 새빨간 불처럼 타오르는 두 눈동자는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