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불청객2022.02.12.
백작가에선 내가 불편한 점이 없도록 정말 성심성의껏 대접해 주었지만, 그래도 편안하고 익숙한 내 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는데도, 저택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쾌적했다. 심지어 내가 없는 동안 집사가 대신 처리해 주었던 일들도 모두 완벽했다. 나는 집사와 함께 서재로 가서 중요한 건에 대해 짧게 보고받았다.
“이건 직접 확인하셔야 하는 내용입니다. 이쪽에 모아 둔 서신들은 내일 중으로만 회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실 텐데 어서 가서 쉬십시오, 아가씨.”
그는 날 배려하려는 듯 빠르게 용건을 마치고는,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 뒤 물러갔다. 내용이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나 역시 서재에서 금방 나와 버렸지만, 침실까지 가는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한 걸음 가다 멈춰 서고, 또 한 걸음 가다 멈춰 서기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펠리어트와 레어넌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로렐라.’
한밤중이라 어두운 이 복도만큼이나 캄캄한 방 안에서, 열이 펄펄 끓는데도 내 이름을 부르던 펠리어트. 물약이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위에 빈틈없이 입술을 맞부딪혔던 그때의 일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그건 이제 상관없어.’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건넨 알쏭달쏭한 말과 거침없이 입술을 꾹 문지르며 날 바라보던 맹수 같은 눈빛까지. 아무래도 펠리어트도 다 기억하고 있나 봐! 망했다, 망했어!
“으아아!”
나는 벽에 이마를 찧으며 신음했다. 대체 앞으로 어떤 얼굴로 펠리어트를 봐야 하지? 게다가 왜 굳이 저택에 초대하겠다는 걸까. 내가 그 집에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고! 하지만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이 순간조차 심장이 마치 제어를 벗어난 것처럼 미친 듯 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굴에 열기가 돌았다. 입술을 비집고 씩씩거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 고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럼 부디 함께 고민해 주십시오.’
레어넌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볼을 가만히 매만지자 부드러웠던 입술의 촉감이 생생히 떠올랐다. 봄바람처럼 따듯하면서도 남자다운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사과는 안 할 겁니다.’
또다시 몸 안쪽에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느꼈던 것과 똑같은 세기였다.
“더워……!”
이 시간엔 좀 서늘한 저택 안이 과장을 조금 보태 마치 한여름처럼 느껴졌다. 침실까지 단숨에 도착했을 땐 더워서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방문을 열자 새하얀 레이스 커튼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침구와 침대 위에 곱게 개어 놓은 나이트가운을 보니 하녀가 정리하려고 잠시 들어왔다가,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문을 닫는 걸 깜빡 잊은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시원한 공기가 되레 반가웠다.
“후우…….”
창문가로 다가가 크게 숨을 내쉰 그때였다. 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기척이었지만 누군가의 발소리가 틀림없었다. 설마 도둑 든 거야?!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화장대 위에 놓인 은촛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창문가에 바짝 붙어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리고 아래에서 긴 팔이 불쑥 튀어나와 창문턱을 짚은 순간……!
“흐읍!”
나는 기합을 넣어 팔을 번쩍 들었다가, 낯익은 모습을 발견하곤 스르륵 내렸다. 별이 가득 떠 있는 밤하늘 아래, 신비롭게 반짝이는 은빛 머리가 아니었더라면 틀림없이 그대로 후려쳤을 것이다.
“누나! 왔어?!”
자칫 잘못하면 머리에 구멍이 날 뻔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셀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방 안으로 훌쩍 뛰어 들어왔다.
“늦었네?”
……여기 내 집인데. 마치 본인 집인 것처럼 뻔뻔한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보고 싶어서 왔지.”
카셀이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을 꼭 쥐고는 자신에게로 조금 더 끌어당겼다.
“누나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카셀의 어리광에 당황한 탓도 있었지만, 그의 어깨 너머로 낯선 남자 하나가 날쌘 몸짓으로 창문을 넘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로렐라 님. 처음 뵙겠습니다.”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저는 시드라고 합니다. 이 자식……. 아니, 카셀 길드장님의 오른팔이지요.”
레어넌보다는 색이 짙은 금발에, 연둣빛에 가까운 눈동자를 가진 젊은 남자였다. 카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잘생긴 청년이었다. 아니, 이 길드는 얼굴로 사람 뽑나?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우리 집에 마음대로 들어온 침입자한테 인사를 해 줘도 되나? 살짝 눈을 찌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드란 청년이 카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날 밝을 때 다시 와도 되잖아, 응?”
그러고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러면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냐고. 거기다 네가 무슨 도둑이냐?”
“누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까 괜찮아. 그리고 나 도둑 맞는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카셀은 한 걸음 옆으로 비켜 내 시야에서 남자를 차단하며 물었다.
“누나 1등 했어? 응?”
“뭐?”
“내가 준 화살로 1등 했냐고.”
갑자기 던져진 말에, 나는 그대로 굳어 카셀을 말없이 바라보다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여, 역시 그 화살…….”
“응. 내가 흑마법사를 불러서 만든 거야.”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식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소리는 물론,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화살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때, 카셀이 생각나긴 했지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셰릴 백작의 사냥터는 너무 멀고,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그게 뭐였을지 나중에 물어보기나 하려고 했는데, 설마 진짜로 카셀의 짓이라니. 안 그래도 카셀의 부탁을 들어주려다 바자회 때 곤욕을 겪었는데, 그런 일이 또 생기면 어쩌나 걱정부터 들었다. 이미 그 사건의 배후가 ‘검은 뱀 길드’인 건 다 아는 사실인데. 혹시라도 누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으면 어떡하지?
“효과는 어땠어? 물론 말 안 해도 끝내줬겠지만.”
하지만 카셀은 내 속도 모르고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일 강력한 마력으로 걸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다 끝나고 나서 흑마법사가 피를 한가득 토했지 뭐야.”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도 그의 표정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인내심을 놓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쓴 것도 잠시.
“왜 말이 없어? 아, 감동받았구나? 별거 아닌데, 누나도 참.”
철없이 거만 떨며 킥킥거리는 모습에,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야!”
나는 참지 못하고 카셀의 등을 짝! 소리 나도록 때리며 외쳤다.
“대체 내 수명을 어디까지 줄일 셈이야!”
* * *
“하아…….”
카셀은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른 채, 아무도 없는 거리를 터덜터덜 가로질렀다. 오늘따라 별은 왜 이렇게 반짝이는 건지. 가로수의 잎사귀들은 왜 또 저렇게 푸릇푸릇한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그의 기분을 참담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렐라에게 잔뜩 칭찬받기는커녕 오히려 혼만 났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등짝도 두 대나 더 맞았다. 왜 화를 내지? 틀림없이 기뻐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셀의 어깨가 축 처졌다. 줄곧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오던 시드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카셀, 그…….”
침묵이 지나치게 긴 것 같아 말문을 열긴 했는데,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셀의 얼굴이 어두워 그 어떤 말도 섣불리 꺼낼 수 없었던 탓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녀석의 곁에 쭉 붙어 있었지만,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정말 그 여자한테 마음이 있나 봐.’
비록 카셀은 아무런 언질도 해 주지 않았지만, 굳이 정확하게 들어야만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시드는 그의 친형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모를 수가 없었다. 카셀은 ‘로렐라 메이레드’에게 푹 빠진 게 틀림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저렇게 화살을 만들어 바치니, 뭘 하니 염병을 떠는 거지.’
“하아…….”
시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첫사랑이라지만, 서툴러도 너무 서툴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보석도 아니고, 마법 건 화살을 선물로 주는 미친놈이 어디 있냐?’
그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첫사랑이야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열병처럼 앓는, 어른이 되는 과정 중 하나라지만 카셀에게만큼은 좀 달랐다.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외모였던 카셀은, 비극적이게도 미모가 가진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 외모를 영악하게 써먹는 법 또한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다 보니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그의 주변엔 늘 애정을 바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아주 어린 시절 고아원에 있을 때도, 틈만 나면 히스테리를 부리던 선생들조차 카셀 앞에서는 늘 웃는 낯이었으니까. 그저 반짝이고 예쁜 붉은색 눈동자로 빤히 응시하기만 하면 누구든 그의 손에 사탕 하나 더 쥐여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소년티를 벗고 나서부터는 관련 일화가 너무 많아 늘어놓을 수도 없다. 카셀 역시 그런 주변의 반응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시드는 내심, 카셀에겐 진정한 사랑 따윈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본인이 제일 잘났고, 본인이 제일 아름다운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그런 일이 생기기는 할까 싶었다. 그랬던 카셀에게, 드디어 그의 속을 썩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 시커먼 아저씨가 우승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누난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줄곧 침묵을 지키던 카셀이 투덜거렸다. 펠리어트 체임버스 공작은 올해 고작 스물일곱이니 아저씨라 하기에는 너무 젊고, 시커멓게 입고 다니긴 해도 입 벌어질 만큼 잘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시드는 그의 말을 정정해 주는 대신 솔직하게 조언하기로 했다.
“카셀, 내가 보기엔 말이야.”
비록 마음은 아프지만,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냉정하게 현실을 깨우쳐 주는 편이 더 나으리라.
“그 아가씨는 펠리어트 공작과 다시 결혼하지 않을까? 요즘 들려오는 소문도 그렇다고 하고, 공작을 만나느라 널 바람맞힌 적도 있다며.”
아무리 카셀과 어울려 준다고 해도 그 여자는 귀족이다. 카셀에게 홀딱 빠진 게 아니라면, 평민인 것도 모자라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그와 잘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렵겠지. 물론 그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지위나 영지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 자유롭게 제멋대로 살아온 카셀이 귀족 사회에 들어가 규칙을 지키며 생활한다는 건, 세상이 두 쪽 나는 것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건 모르는 일이야.”
진심이 담긴 우려였지만, 카셀은 예상대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시드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물론 부인하고 싶겠지. 하지만…….”
“레어넌 베르하르트도 노리고 있거든.”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뭐, 뭐?”
“그뿐만이 아니야. 그 재수 없는 갈색 머리 새끼.”
카셀이 으득, 이를 갈더니 갑자기 욕설을 내뱉었다.
“그 흑마법사 새끼가 제일 문제야.”
재수 없는 갈색 머리 흑마법사 새끼……? 시드는 멍하니 그 말을 곱씹어 보다가 순간 나지막이 탄식했다. 카셀이 로렐라에게 줄 화살을 만들기 위해 제르모어라는 대륙 최고의 흑마법사를 호출했을 때, 어떤 놈을 찾아내라며 매섭게 다그쳤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흑마법사 중에 갈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놈이 있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모조리 끌고 오라나 뭐라나. 어찌나 쥐 잡듯이 볶아 대던지, 나중엔 제르모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네 이야기를 종합하면 체임버스 공작과 레어넌 베르하르트 기사단장…….”
시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르모어조차 찾지 못하는 흑마법사까지 모두 로렐라 메이레드한테 눈독 들이고 있다는 거야?”
“그래.”
카셀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짜증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벅벅 쓸어 넘겼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넣었다. 겉에 달콤한 설탕이 잔뜩 붙어 있는, 씹다가 단물이 빠지면 그대로 뱉어 내는 과자였다.
“하, 이게 왜 이렇게 쓰지.”
“…….”
아주 점점. 가관이네, 가관이야. 시드는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카셀은 예쁜 입술을 오물거리며 과자를 동그란 풍선 모양으로 크게 부풀렸다.
이윽고 팡! 소리와 함께 풍선이 터진 순간.
“이대로는 안 되겠어.”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뭘 어쩌게?”
시드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는 카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승부욕은 물론, 소유욕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가끔 회까닥 머리가 돌면 얼마나 대책 없는 일을 저지르는지.
“응? 카셀, 대체 뭘 어쩔 거냐고!”
“그야 내가 가진 모든 걸 이용해서…….”
카셀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무리 시드와 형제처럼 지낸다지만, 그녀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는 좀 쑥스러웠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젠장.”
카셀은 거친 말을 내뱉고는 단물이 다 빠져 버린 과자를 우물거리며 굳은 얼굴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카셀……!”
그 뒤를 황급히 따르는 시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하지만 카셀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원래 부부 사이였던 북부 공작과 귀족 영애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구혼을 받는 성기사단장, 거기다 정체조차 알 수 없는 흑마법사까지. 연적들이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니 카셀이 조바심을 내는 것도 이해는 됐다. 심지어 힘도, 명예도 있는 자들이니 다 처치하려면 카셀이 가진 모든 걸 걸어야만 하겠지. 어쩌면 북부부터 시작해 적어도 제국의 절반 정도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검은 뱀 길드는? 응? 시드는 울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로렐라 메이레드에게 돌아가서 무릎 꿇고 사정하고 싶었다. 길드의 평화……. 아니,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제발 카셀 베스페라를 선택해 달라고. * * * 여행에서 돌아와 레아의 가게에 들러 일을 처리하고 밀린 서신에 답장하기에 정신이 없었던 나는, 사흘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확인한 벽 거울 속에는, 여전히 주름이 잡힌 미간이 보였다. 얼굴도 어쩐지 피곤해 보였다. 밀린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남몰래 속앓이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카셀 때문에! 나를 위해 화살에 주문을 걸었다는 얘길 들은 이후, 나는 좀처럼 두 발 뻗고 편히 잠들지 못했다. 만약에 누가 그 사실을 알린다면 어떻게 되는 건지, 그게 검은 뱀 길드의 소행이었다는 것까지 알려지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한 탓이었다. 물론 사냥 대회는 무사히 끝났고, 내가 우승한 것도 아니니 아무도 내 점수를 신경 쓰지 않겠지만 걱정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한시름 놓게 된 건, 각자의 저택으로 돌아가 서신을 준 귀족들 그 누구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주최자인 셰릴 백작조차 모르는 듯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진짜 시한폭탄이 따로 없다니까.”
같이 있으면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긴 하지만, 또 막상 얼굴을 보면 밉기는커녕 오히려 반가움이 불쑥 앞섰다. 이 역시 주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어지럽혀진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도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갑갑해서 정원을 좀 산책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 했더니 집사 웨번이 문을 열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지? 약속한 사람이 없는데?
“아가씨를 꼭 좀 만나 뵈어야겠다고 청하시더군요. 우선 현관까지 모셨습니다.”
“누군데?”
가벼운 물음이었는데, 집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뭐, 뭐라고?!”
나도 모르게 비명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나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나 때문에 놀라 멍하니 있던 집사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일단 손님을 응접실로 모셔 주겠어?”
“네, 알겠습니다.”
집사가 물러간 뒤, 나는 조용히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2층 서재의 창문에서는 현관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현관 앞엔 화려한 보랏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우아한 숙녀가 서 있었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긴 생머리가 나풀거렸다. 바로 세이블 릴리였다.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차마 피하지도 못하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세이블은 마치 자신을 쳐다보던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생긋 웃어 보였다. 대, 대체 왜 날 찾아온 거지? 나는 황급히 몸을 물려 책상 쪽으로 향했다.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데, 책장으로 가득한 벽 쪽에서 휙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뭘 고민해.”
위너드가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불청객인데 그냥 쫓아 버려.”
그의 눈빛에는 경계와 적대감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