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사과는 안 할 겁니다2022.02.09.
화려한 연회를 마지막으로, 전대미문의 화제를 모은 사냥 대회가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펠리어트를 두고 각종 억측이 난무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다음 날 조찬에 그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눈빛은 몹시 또렷했고 특유의 날카로운 기백 또한 여전했다. 얼굴은 좀 피곤해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밤새 신관에게서 치료받은 것이 확실히 효과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력에 노출된 적도 없고 성력도 지니지 않은 일반인은 위험할 수 있다기에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해서 좀 걱정이었는데, 멀쩡해진 것 같아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귀빈이 다쳐 누구보다 가슴앓이 했을 셰릴 백작은 펠리어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그 곁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그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 백작은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본래라면 연회 때 안내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당사자가 안 계셔서 말씀드리기 껄끄럽더군요. 지금에서야 결과를 말씀드립니다. 이번 사냥 대회 우승자는 펠리어트 체임버스 공작이십니다!”
그러자 홀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졌다.
“와아, 축하드립니다!”
“정말 굉장하십니다!”
셰릴 백작은 마치 자신이 우승한 듯 뿌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역대 우승자 중 가장 고득점을 올리셨습니다. 2등은, 바로 저기 계신 레어넌 기사단장님이십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더욱 크게 웅성거렸다. 대부분은 레어넌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는 건, 레어넌 기사단장님의 점수 또한 예전의 우승자들보다 훨씬 높다는 것 아닙니까?”
“다시 한번 점수 집계를 내 보는 게 어떻습니까? 혹시 모르잖아요.”
내 건너편에 앉아서 줄곧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레어넌이 그 말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작은 점수 차에 연연하지 않고, 승패를 깨끗이 받아들이는 기사다운 모습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칭송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나는 그런 레어넌을 남몰래 살폈다. 얼핏 보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나, 그의 눈이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 염려되었던 탓이다. 아주 유심히 보아야 알 수 있을 만한 변화였지만, 그를 곁에서 자주 봐 왔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조찬이 끝나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 펠리어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약속대로 상금 전액은 당신에게 주지.”
미처 자리를 뜨지 않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건 레어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펠리어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윈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지 허리를 굽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날 무척이나 걱정했다고 시종에게 들었어. 염려를 끼쳐 미안하군.”
그 말에 충동적으로 했던 ‘일’이, 머릿속에 깊게 잘 묻어 놓은 보람도 없이 순식간에 파헤쳐졌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다른 말이 붙지 않는 걸 보니 정말 다행스럽게도, 기억 못 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때 펠리어트는 의식을 잃어 몸을 가누지도 못했으니, 기억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우승 축하해.”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 * * 그 후 나는 빠르게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쉼 없이 마차에 짐을 나르는 시종들을 보며 누구보다 아쉬워한 건 다름 아닌 셰릴 백작이었다.
“로렐라 님, 내년에도 부디 펠리어트 공작님, 그리고 레어넌 단장님과 함께 꼭 찾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장난이시죠? 아까도 마차 건으로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여서 얼마나 당황스러웠는데. 처음 이곳에 왔던 것처럼 돌아갈 때 역시 자신의 마차를 이용하라는 펠리어트의 제안에 레어넌이 즉각 제동을 걸었다. 기사단 마차를 이미 준비해 놨으니, 굳이 번거롭게 북부로 다시 마차를 돌려보낼 필요가 없다면서. 두 사람은 또다시 날카롭게 대립했고, 사람들의 시선 역시 쏟아졌다. 그래서 나는 얼른 결단을 내렸다. 아우레아까지 기사단의 마차를 타기로. 어차피 아우레아와 기사단 관저는 멀지 않았으니, 굳이 펠리어트의 마차를 빌리는 건 오히려 번거로운 일이라는 레어넌의 의견에 더욱 공감이 간 탓이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것저것 보살펴 주신 덕분에 정말 편하게 잘 지냈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은 채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백작은 자신이 더 고마웠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로렐라 님, 꼭 다시 오셔야 해요!”
아쉬운지 눈썹을 한껏 아래로 끌어내린 에이미가 내 손을 꽉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꼭 편지를 주고받자며 조이와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백작과 에이미가 나간 뒤, 조이는 마지막으로 남은 짐을 정리했다. 분명 가볍게 왔는데, 새로 사귄 귀족들에게서 받은 선물 때문에 짐이 몇 배는 더 늘어 있었다. 마차에 다 실을 수 있기는 할까,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여전히 손이 바쁜 조이에게 가볍게 눈짓하고는 그녀 대신 문을 열었다. 검은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졌다. 눈앞에 있는 건, 팔짱을 낀 채 우뚝 선 펠리어트였다.
“이제 떠나나?”
“으응.”
“……그렇군.”
마차를 가지고 실랑이할 때 몸조심하라는 말과 더불어 작별 인사도 다 건넸기 때문에, 딱히 더 나눌 인사도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찾아온 걸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스러워 표정을 읽으려 빤히 쳐다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초대장을 보내지.”
“어?”
초대장? 무슨 초대장? 뜬금없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우승 상금을 주는 대신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 잊은 건 아니겠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입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빛 또한 어쩐지 잔뜩 들뜬 듯해 보였다.
“무, 물론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초대장이라니?”
나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가장 큰 부탁이라 봤자 기껏해야 같이 밥이나 먹는 거라며……!”
“그래. 그래서 식사하자고. ‘우리’ 저택에서.”
“어?”
잠깐. 방금 유독 우리란 단어에 힘을 주지 않았나?
“설마 공작저로 초대하겠다는 이야기야?”
“음, 역시 초대란 말은 좀 어색하군. 어차피 당신이 돌아올 곳인데.”
진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황당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입에서 허, 하는 탄식이 터졌다. 그와 식사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장소가 공작저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예, 예전엔 분명 내 발로 걸어 들어오게 할 거라고 했잖아. 그래야 만족스러울 거 같다고…….”
“그건 이제 상관없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진 몰라도 무척이나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뭐?”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나는 재차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펠리어트는 대답 대신 진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등의 붉은 상흔은 여전했지만, 시퍼렇게 변했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기다랗고 마디가 반듯반듯한 손이 잠시 내 입술 근처에서 멈칫하더니, 그대로 다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펠…….”
입술 위로 엄지손가락이 닿았다. 펠리어트는 내 입술을 살짝 누른 채 그대로 옆으로 쓸었다. 크게 당황한 것도 잠시. 흡족함이 가득 서린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동시에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매우 기꺼운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 무척이나 단 웃음이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백작저로 향했을 때보다 더 빠르고 신속했다. 기사단의 마차를 이끄는 마부가 워낙 숙련된 자인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땐 에이미가 워낙 곳곳에 멈춰 서서 관광을 시켜 줬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아우레아는 시시각각 가까워졌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여전히 굳은 눈빛인 레어넌 단장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행동이나 말투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언제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조이가 마부 옆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멀미할 것 같아서 찬 바람을 좀 쐬어야겠다면서 말이다.
“……저, 레어넌 단장님.”
단둘이 남은 마차 안.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니 창밖을 응시하던 레어넌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로렐라.”
여전히 상냥한 말투였으나, 눈빛은 그대로였다. 나는 줄곧 마음에 걸렸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따로 하고 싶으시다던 말씀이 혹시 무언지 여쭈어도 될까요……?”
사냥 대회가 열리기 전에 레어넌이 했던 이야기가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우승하게 되면 솔직하게 말하겠다던 그 말. 다짐하듯 말하며 우승까지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만저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 듯했다. 혹은 아주 무겁거나, 내게 하기 곤란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야기라도 상관없었다. 혹시 그를 힘들게 하는 일에 대한 거라면 더더욱 나누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닙니다. 지금은 이야기하기에 그다지 좋은 타이밍이 아닌 것 같군요.”
말해 주기를 바라는 내 마음과는 달리 레어넌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로렐라. 곧 말씀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단둘밖에 없는 마차 안인데,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있긴 한 걸까? 혹시 도저히 말을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나?
“미안합니다. 제가 괜한 고민을 안겨 드렸군요.”
걱정하는 마음이 티가 났는지, 레어넌이 되레 내게 사과를 건넸다.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보다. 오히려 미안해진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혹시 어려운 일이 생기신 건 아닌지 걱정됐거든요.”
“어려운 일이라…….”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하던 레어넌이 이윽고 그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살면서 맞닥뜨린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제가 도와드릴 만한 건 없을까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레어넌 단장이 인생에서 맞닥뜨린 가장 어려운 일이라니,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또다시 걱정이 차올랐다.
“고민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잖아요. 뭐든 좋으니 함께 생각해 드리고 싶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날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이야기를 꺼내기 영 어려운 듯한데, 재차 묻는 건 오히려 부담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마차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깐 생각하는 듯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레어넌이 살가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다음 주 황궁에서 열리는 오찬에 함께 참석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황궁에서 열리는 오찬이요?”
다소 얼떨떨한 나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그저 다정했다.
“네. 크로폴리 왕실의 전담 제빵사가 황후 폐하의 명을 받아 특별히 방문했는데, 오찬에서 직접 후식을 만들 거라더군요.”
“크로폴리요?”
나도 모르게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로폴리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세련된 문화와 아름다운 예술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다. 오죽하면 ‘대륙의 모든 유행은 크로폴리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특히 디저트 문화가 몹시 발달해, 각기 다른 문양으로 구워 낸 수백 개의 쿠키와 초콜릿 등이 빼곡히 담긴 크로폴리식 디저트 밀차는 모든 귀족의 선망 대상이었다.
“물론 불편하시다면 얼마든지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워낙 인기가 많고 유명한 제빵사라고 해, 혹시 그대도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불편하긴커녕, 두 눈이 번쩍 뜨이는 제안이었다.
“가고 싶어요!”
나는 가슴께에 손을 꼭 모은 채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기회는 흔치 않은데, 기꺼이 가야죠. 함께 가자 제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레아는 물론이고, 다른 귀족들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나를 무척이나 부러워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레어넌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그의 미소가 더욱 환하게 밝아졌다. 그 후,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치를 감상하기도 했고, 사냥 대회 때 있었던 일을 곱씹기도 했다. 대화가 즐거워서인지, 꽤 먼 거리를 달렸는데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아우레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사방은 캄캄했고, 풀벌레 우는 소리만 어렴풋이 들려왔다. 다시 마차 안으로 자리를 옮겨 꾸벅꾸벅 졸던 조이는 도착했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더니 황급히 마차 밖으로 나갔다. 나도 레어넌의 에스코트를 받아 천천히 밖으로 내려섰다. 집사는 물론, 발 빠른 고용인들이 다가와 내게 인사를 건네고는 일사불란하게 짐을 안으로 옮겼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로렐라. 부디 여독이 쌓이지 않도록 푹 쉬십시오.”
“감사해요. 단장님도 마차 안에서 눈 좀 붙이세요. 관저까지는 좀 더 가셔야 하잖아요.”
“그러겠습니다.”
남자의 금발 위로 달빛이 부서지듯 쏟아졌다. 황홀할 만큼 눈부신 빛 속에서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럼 또…….”
인사를 건네려는 듯 운을 떼던 레어넌이 갑자기 말을 멈춘 채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러나 싶어 가만히 바라보는데, 그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로렐라, 아까 제 고민을 함께 생각해 주신다고 하셨죠.”
발아래 희끄무레하게 퍼진 밤안개만큼이나 고요한 음성이었다. 고용인들은 모두 짐을 안으로 옮기느라 자리를 떴고, 정원에는 나와 그 둘뿐이었다. 조용한 공기 속에 레어넌의 목소리만 내려앉았다.
“네, 맞아요.”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그때였다.
“……그럼 부디 함께 고민해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단한 팔이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은은하면서도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볼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살짝 입술을 뗀 레어넌이 그대로 속삭였다.
“이게 제 고민입니다.”
부드러운 촉감과 따듯한 숨결이 볼을 간질였다. 그 감각이 심장까지 퍼진 듯했다.
“갑자기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정사정없이 쿵쿵 뛰어 대는 심장 소리를 뚫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는 안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