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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제국 최고의 팜므파탈 (63/173)

63화. 제국 최고의 팜므파탈2022.02.05.

똑똑. 로렐라가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정중히 방문을 두드렸다. 조이는 얼른 다가가 문을 열었다.

16550625053151.jpg“실례합니다.”

16550625053155.jpg“어머, 어서 오세요……!”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머리와 다정하면서도 상냥한 미소가 황홀하게 시야를 채웠다. 조이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16550625053151.jpg“이런. 혹시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16550625053155.jpg“아, 아니에요. 아가씨도 준비가 다 끝나셨어요. 그런데…….”

너무 일찍 찾아와 미안하다는 듯 정중하게 말을 꺼내는 그의 표정에 오히려 조이가 더 난처하고,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유독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이었다.

16550625053155.jpg“급한 볼일이 생기셔서, 잠깐 펠리어트 공작님을 뵈러 가셨어요.”

16550625053151.jpg“펠리어트 공작에게, 급한 볼일이요……?”

16550625053155.jpg“네에, 하지만 곧 오실 거랍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오고 계시는지도 몰라요……!”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괜찮다면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시라는 뜻을 내포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레어넌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25053151.jpg“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재빨리 몸을 뒤로 돌렸다.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는 레어넌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햇살만큼이나 반짝거리는 금발이 그의 등 뒤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는 펠리어트의 방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로렐라가 묵는 곳과 지나치게 가까웠고, 우습게도 그 사실이 이곳에 있는 내내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했으니까. 거의 뛰다시피 방 근처에 도착한 찰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로렐라가 문을 열고 나왔다. 레어넌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고는 왜인지 몰라도 허공 위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16550625053151.jpg“로렐라.”

16550625053189.jpg“다, 단장님?”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맞닥뜨려서인지 그녀가 파드득 어깨를 떨며 놀라는 게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16550625053151.jpg“곧 연회가 시작되는데 보이지 않아서 찾으러 왔습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와 계셨습니까?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그렇게 물은 건 레어넌 자신이 아무 일 없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얼굴은,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16550625053189.jpg“아, 그게 펠리어트가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 와 봤는데…….”

대답하면서도 로렐라는 여전히 좀 얼이 나간 듯 보였다.

16550625053151.jpg“혹시 아까 있었던 일 때문입니까? 그래서요?”

백작이 호들갑을 떨 때 레어넌도 함께 있었으니, 펠리어트가 가벼운 사고를 당했다는 건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되어 들여다볼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느냐 하면…….

16550625053189.jpg“약을 먹이자마자 엄청난 게 터졌…… 아니, 아니. 열이 터질 정도로 심했는데, 이젠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마구 고개를 흔들더니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러곤 화제를 돌리려는 듯 셰릴 백작이 부른 사람이 곧 올 거라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레어넌은 열린 문틈을 얼핏 들여다보았다. 방 안은 무척이나 어둡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마치 한밤중 같았다. 순간, 방에서 새어 나온 새까만 어둠이 그의 마음속에도 훅 치밀었다. 로렐라가 얼마나 이타적이고, 선한 사람인지는 레어넌도 잘 알았다. 비록 펠리어트는 괜찮은 척했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였던 건 사실이다. 그러니 로렐라가 마음 쓰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곤란에 처한 사람을 걱정하고 살피는 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을 붙이지 않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는 그녀가 펠리어트를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예쁜 눈동자에 펠리어트를 담는 것조차 싫었다.

16550625053151.jpg“……연회가 시작된 듯한데, 가실까요?”

레어넌은 문을 닫은 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정중히 팔을 내밀었다. 펠리어트의 안위 따위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어쩐지 싸늘하기까지 한 태도에 로렐라는 조금 놀랐으나 아무 말 없이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굳게 닫힌 방문을 흘끗 바라본 것도 잠시, 두 사람은 걸음을 맞추어 연회장으로 향했다. 레어넌의 말대로 파티가 시작된 연회장은 무척이나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눈치 빠른 몇몇 사람들의 눈길이 그쪽을 향했다. 안 그래도 유력한 우승 후보인 두 남자와 이번 사냥 대회에서 가장 화제의 중심이 된 백작 영애가 나타나지 않아 다들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왜 펠리어트 공작이 아닌 레어넌 기사단장이 로렐라 메이레드 영애의 에스코트를 하는 거지?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서렸다. 하지만 분위기가 망가질 만큼 커다란 동요는 없었다. 연회나 무도회 때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건 귀족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시되는 매너였기에, 레어넌이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것도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계단을 중간쯤 내려왔을 때였다. 레어넌의 눈에 문득 로렐라가 신고 있는 신발이 들어왔다. 은빛으로 빛나는 하이힐에는 발등을 가로지르는 리본이 달려 있었고 그 위로 진주가 장식되었다. 그런데 왼쪽 발등에 묶어 놓은 리본이 금방이라도 풀어질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신발이 벗겨지거나, 풀린 끈을 밟아 위험할지도 모른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아래쪽에 서 있는 하녀들을 향해 살짝 손을 들려던 레어넌의 뇌리에 순간 뜬금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럴 때 그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독하리만치 냉정하고, 오만하며, 본인이 해야겠다고 판단한 일에 타인의 사정 따윈 전혀 생각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펠리어트 말이다. 로렐라에겐 그자가 또 당신을 강제하는 일이 생길까 봐 염려되어 이곳까지 왔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레어넌은 알고 있었다. 만사를 다 제치고 여기에 온 건 그저 질투와 독점욕 때문이란 걸. 자신에게 이렇게 어둡고 강한 감정이 숨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초조해하는 자신을 돌아보고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을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해 주는 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이젠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로렐라의 마음에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펠리어트를 향한 아주 작은 감정조차 모두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머릿속 한편에 그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독하리만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그자처럼 행동한다면, 오로지 나만을 생각해 줄까. 레어넌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펠리어트처럼 그녀에게 마구잡이로 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계단 중간에 우뚝 섰다.

16550625053189.jpg“단장님, 왜 그러세요?”

16550625053151.jpg“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묻는 로렐라를 향해 레어넌은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그녀가 서 있는 곳보다 한 칸 아래쪽으로 내려선 뒤 몸을 낮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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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갈한 흰 장갑을 낀 손을 뻗어 거의 풀린 리본을 살짝 잡아 빼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매듭을 묶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동그랗게 뜬 두 눈을 깜빡이던 로렐라가 황급히 만류했다.

16550625053189.jpg“제, 제가 할게요……!”

16550625053151.jpg“괜찮습니다. 제가 해 드리고 싶습니다.”

단칼에 거절한 레어넌은 꿋꿋이 리본을 묶어 주었다. 그의 손이 발등에 닿은 것도 아닌데,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 로렐라의 표정을 흘끗 살핀 레어넌의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도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당황한 티가 역력한 불그스름한 귓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계단을 장식한 붉은 장미 꽃다발 위로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쏟아졌지만, 그녀가 지닌 색만큼 강렬하진 않았다. 레어넌에게 그건 놓치고 싶지 않은 빛과도 같았다. 누군가에게 되돌려 줄 생각도 없었다. 한편, 연회장에 모인 손님들의 턱은 너무 크게 벌어져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회장에 있는 사람 중에 펠리어트와 로렐라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무슨 이유로 혼인이 무효가 됐는진 모르겠지만, 펠리어트는 그녀만 보면 미소를 지었고 로렐라가 초대받은 사교 모임엔 그 역시 참가하겠다 했으니 두 사람이 다시 부부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죽하면 이 연회가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로렐라에게 잘 보이겠다고 다짐까지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정도였다. 그 정도로 로렐라 메이레드는 펠리어트 공작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펠리어트 공작만이 아닌 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차갑기로 유명한 북부 공작을 미소 짓게 하고, 고명한 성기사단장을 무릎 꿇린 여자라니. 그녀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제국에서도 손꼽힐 만큼 절세미인이냐 하면 그렇게까지는…….

16550625107241.jpg‘아니, 어쩌면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로렐라를 바라보았다. 최상품의 루비를 가져다 대도 빛을 잃게 할 정도로 황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타오르는 아침의 태양 앞에서도 지지 않을 탐스러운 붉은 머릿결! 고양이 같기도 하고 순진한 강아지 같기도 한 유혹적인 눈매와 유려한 곡선이 일품인 도톰한 입술까지! 제국 최고의 팜므파탈이 거기 서 있었다. * * * 연회가 한창이던 때, 셰릴 백작이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신관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16550625053155.jpg“바로 치료를 시작했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랍니다. 어려운 치료가 아니라고 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16550625053189.jpg“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16550625053155.jpg“별말씀을요.”

그 이야길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되었다. 셰릴 백작이 신경 써 준 덕분에 펠리어트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게 알려지지도 않았으니, 이제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백작이 다른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러 떠난 뒤 나는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시종이 내민 샴페인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곁에 선 레어넌에게도 한 잔 권했다. 둘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들었다. 워낙 셰릴 백작의 저택에 있으며 자주 겪은 일이라 놀랍지는 않지만, 펠리어트와 함께 있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펠리어트는 위압적인 눈빛으로 사람들을 제압해 곤란한 소리 자체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한다면, 레어넌은 모든 대화를 포용하면서도 난감한 화제에는 자신이 먼저 나서 주었다. 덕분에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진땀을 뺄 만한 상황은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무얼 기대하고 있는진 모를 수가 없었다. 앉을 새도 없이 계속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점점 다리가 아파 왔다. 거기다 더운 실내 공기에 답답하기도 해서 나는 레어넌에게 잠깐 파우더 룸에 다녀오겠다 말하고는 홀 뒤편으로 향했다. 널찍한 방엔 나 혼자였다.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방 안에는 거울이 달린 화장대와 고급스러운 실크 스툴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커다란 통 창 너머로는 정원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테라스가 보였다. 그곳에도 앉아서 잠시 숨을 돌릴 만한 티 테이블과 등받이가 달린 자그마한 의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16550625053189.jpg“후우.”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테라스로 나가 앉았다.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고 있으니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 펠리어트에게 입으로 약을 먹인 건…… 그가 너무나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새삼 놀랄 만큼 과감한 행동이었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늘 고고하고 표정 하나 쉬이 드러내지 않던 남자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니,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떠올리자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하튼 신관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일은 기억 못 하겠지? 제발 그랬으면. 나는 간절히 빌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화면을 띄웠다.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벽을 부수며 10만 주를 구매합니다!」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환호하며 20만 주를 구매합니다!」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일편단심 단장님을 외치며 20만 주를 구매합니다!」 맨 마지막은 레어넌이 계단에서 내 하이힐 끈을 묶어 주었을 때 터진 거다. 그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요즘 레어넌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행동을 자주 하는 것 같다. 좀 의아하긴 해도 싫은 건 전혀 아니었다. 아니, 싫다기보단 오히려…….

16550625053189.jpg“흠.”

나는 황급히 헛기침하며 생각을 끊어 냈다. 그러고는 다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50만 주라니. 세이블이 5만 주를 팔아치운 것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던 때가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땐 내가 이렇게 많은 주식을 팔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다. 그러나 그때와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 ‘내’가 팔긴 했지만, 여전히 ‘내 주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뼈아픈 사실이다.

16550625107268.jpg“예전과 비교하면 정말 놀라운 발전이군.”

갑자기 뿌듯한 듯한 목소리와 함께 뒤에서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젠 면역이 돼서 그런지, 놀랍지도 않았다.

16550625107268.jpg“세이블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되어 주저앉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위너드는 생글생글 웃으며 우아한 걸음으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16550625053189.jpg“내가 언제 또 그랬다고…….”

나는 그를 흘겨보곤 다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그가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더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16550625107268.jpg“기쁘지 않아?”

16550625053189.jpg“기쁘지, 기쁘긴 한데…….”

그 순간, 정원수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한 쌍의 남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이블의 이복동생인 에어리스 릴리와 그녀의 연인, 아니. 원래는 세이블의 약혼자였던 그 남자였다. 나는 위너드에게 눈짓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라스 구석의 기둥 쪽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주위를 살피던 두 사람은 이윽고 우리가 숨어 있는 곳 바로 지척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16550625053155.jpg“아까 셰릴 백작님께 들었는데, 역시 그분이 우승하실 모양이에요.”

먼저 입을 연 건 세이블의 동생인 에어리스였다.

16550625053155.jpg“만약 사냥감이 세이블 언니였더라면, 1등은 반드시 제가 차지했을 텐데.”

그녀는 가녀린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말을 내뱉더니,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남자는 무언가 고민하는 일이 있는 듯 굳은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목소리를 더 낮추어 말했다.

16550625053155.jpg“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어쨌든, 고원에 숨겨진 릴리 가문의 가보를 찾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는 거지?”

16550625053155.jpg“네에, 아버지도 명분이 필요하시니까요. 툭하면 우리 가족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훼방 놓는 언니를 완전히 밀어낼 좋은 명분이요.”

16550625053155.jpg“하지만 마엘라 고원은 저주받아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하필 그런 델 가야 한다니…….”

남자는 짜증이 나는지 다소 격양된 목소리였다.

16550625053155.jpg“미안해요, 오스널. 내가 반쪽짜리 여자라서…….”

여자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16550625053155.jpg“그래도 가보를 손에 넣게 되면, 저 역시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살 수 있어요. 제게 후처 소생이라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을 거고요, 흑…….”

참나. 누가 들어도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목소리다. 저런 발연기에 누가 넘어가?

16550625053155.jpg“하아, 에어리스. 누가 감히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겠어. 울지 마.”

……넘어가는 놈이 있네.

16550625053155.jpg“널 위해서인데 마엘라 고원에 가는 것쯤이야. 네 말대로라면 후작님께서도 용병단을 지원해 주실 테니 문제없을 거야. 반드시 네게 가보를 안겨 줄게.”

16550625053155.jpg“오스널, 당신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저는 정말 행운아예요.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전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할 거예요!”

16550625053155.jpg“나도 널 사랑한다, 에어리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과감하게 맞부딪혔다. 꼭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입맞춤은 격정적으로 변해 갔다. 뜻하지 않게 세이블이 복수하려는 상대의 밑바닥까지 봤다는 생각도 잠시, 나는 이 민망한 광경에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혐오에 가득한 위너드의 옆얼굴이 보여서 더욱 민망해지고 말았지만. 왠지 속이 메슥거린다. 아주 염병들을 떠세요. 바람난 커플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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