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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조용하지만 뜨겁게 일렁거린다 (62/173)

62화. 조용하지만 뜨겁게 일렁거린다202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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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안쪽은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들로 햇살이 화창한 날에도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랬던 곳에 굵은 비가 내리니, 한밤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방이 캄캄했다. 설상가상으로 땅 여기저기에 잔뜩 튀어나온 돌에는 미끄러운 이끼가 가득 껴 있어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었다. 말을 몰 때는 물론이고, 내려서 직접 걷는다고 해도 앞을 조심하지 않으면 다치기 십상이었다. 그런 곳을 비까지 맞아 가며 한시도 쉬지 않고 누빈 펠리어트는 저도 모르게 가파른 숨을 몰아쉴 정도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지쳤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마음이 급한 탓이었다. 대회 초반에는 어렵지 않게 점수 차를 벌렸었다. 셰릴 백작의 숲은 그의 영지와 맞닿아 있는 만큼 환경이나 지형이 무척 비슷했고, 특히 활 실력은 펠리어트가 월등히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레어넌은 포기하긴커녕, 기를 쓰고 격차를 좁혔다. 물론 펠리어트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잔뜩 촉각을 세워 사냥감을 찾는 데 더 몰입했고, 원하는 짐승을 발견하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급소에 재빠르게 화살을 쏘았다. 이렇게까지 엎치락뒤치락하며 경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오판이었다. 그 사실이 그를 더 조급하게 했다.

16550624848721.jpg“하아.”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던 순간, 뒤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땅에 떨어진 가지를 밟은 듯했다.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제법 커다란 멧돼지가 있었다. 대회 종료를 앞둔 시간이니만큼 답지 않게 조바심이 들었다. 어쩌면 이 점수가, 승패를 가를지도 모른다. 펠리어트는 호흡을 가다듬은 채 천천히 활을 당겼다. 꼭 잡아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긴장한 탓일까. 펠리어트는 활을 놓는 순간 처음으로 손이 흔들렸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화살이 그만 급소에서 살짝 빗나가고 말았다. 화살을 맞고 있는 대로 성이 난 놈이 땅을 거칠게 파는가 싶더니 갑자기 펠리어트를 향해 돌진했다. 말을 돌릴 새도 없는 빠른 속도였다.

16550624848726.jpg“히이잉!”

놀란 말이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고, 동시에 그의 몸이 빠르게 땅으로 떨어졌다.

1655062484873.jpg“공작님!”

근처에 있던 셰릴 백작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나 무언가 수를 쓰기엔 멧돼지가 너무나 빨랐다. 받히기 직전의 순간.

16550624848721.jpg“젠장.”

펠리어트는 낮게 혀를 차며 땅에 주저앉은 채로 상체를 비스듬히 세워 침착하게 두 번째 화살을 당겼다. 쉬익 소리를 내며 짧게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멧돼지의 미간 정중앙에 명중했다. 꾸에엑! 하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커다란 몸집이 펠리어트의 발 앞에 쿵, 쓰러졌다. 어찌나 지척이었는지, 앉아 있던 그에게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1655062484873.jpg“괜찮으십니까?!”

셰릴 백작이 말에서 내려 허겁지겁 달려왔다. 펠리어트는 대꾸하지 않고 지면을 디뎠던 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욱신거리는 어깨는 둘째 치고, 예전에 상처를 입었던 손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1655062484873.jpg“허억!”

순간 백작이 놀라서 신음했다. 장갑을 벗자마자 소매 아래로 시퍼렇게 변한 손등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16550624848721.jpg“별것 아니니 소란 피우지 마라. 괜히 주위가 시끄러워지는 건 질색이니까.”

1655062484873.jpg“하지만……!”

펠리어트는 백작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에 훌쩍 올랐다.

1655062484873.jpg“이, 일단 바로 의사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16550624848721.jpg“아니. 의사는 와 봤자 할 일이 없어.”

1655062484873.jpg“네?”

백작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사실이었다. 그의 손이 비정상적으로 파랗게 변한 건, 낙마 때문이 아니라 원래 지니고 있었던 상흔에 순간적으로 충격이 가해진 탓이었다. 전장에서 마물에게 당한 상처였다. 지금은 더 이상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 없지만, 그래도 그의 손에 깊은 상처를 남긴 흉측한 짐승이 지녔던 마력은 꽤 강력한 것이었다.

16550624848721.jpg‘방심했군.’

펠리어트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몸에 남은 마력이 다 사라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니 각별하게 주의하라고 신신당부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펠리어트는 말을 몰아 숲의 입구로 향했다. 이윽고 저 멀리 커다랗고 하얀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말에서 내려 다 젖어 버린 옷에 잔뜩 묻은 진흙을 털던 그때였다.

16550624877624.jpg“펠리어트!”

맑고 예쁜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그래서 유달리 귀에 잘 들리는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숨이 넘어가라 곁으로 뛰어온 로렐라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무래도 백작에게서 낙마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16550624877624.jpg“괜찮아?”

아직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나? 놀란 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음을 깨달았다. 백작이 물었을 때는 그저 귀찮고 성가시기만 했는데.

16550624877624.jpg“혹시 다친 거야?”

16550624848721.jpg“괜찮아.”

그녀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욱신거리는 팔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는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는 걸 애써 참으며 쏟아지는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로렐라의 뒤에서 레어넌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쪽은 신경 쓰이지 않는지 오로지 저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입술이 참지 못하고 위를 향해 매끄럽고 확실한 호선을 그렸다.

16550624877624.jpg“웃는 걸 보니 괜찮긴 한가 보네.”

로렐라가 겸연쩍은 듯 종알거렸다.

16550624877624.jpg“그래도 의사는 만나 봐.”

백작에게도 말했듯 의사는 와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 펠리어트는 그저 순순히 대답했다.

16550624848721.jpg“그래.”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까지 들려왔다.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지만, 지금 뛰는 박동은 그때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동그란 이마와 루비처럼 반짝거리는 붉은 눈동자, 작지만 오뚝한 코,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까지. 사방이 어둑한 가운데 오로지 그녀만이 생생한 색채를 지닌 듯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고, 독차지하고 싶은 빛이었다. * * * 돌아온 셰릴 백작의 저택은 곧 시작될 연회로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마지막까지 레어넌과 펠리어트가 엎치락뒤치락하여 우승자를 쉽게 예상할 수 없다는 점도 흥을 돋우는 이유가 됐다. 나는 조이와 에밀리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목욕을 마쳤다. 그 후 연회를 위해 준비한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서야 비로소 놀란 가슴에 안정이 찾아오는 듯했다.

16550624877624.jpg“하,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혼비백산하던 백작의 얼굴을 봤다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다쳐도 어딘가 크게 다친 게 틀림없는 줄 알았지. 막상 돌아온 펠리어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평한 얼굴이었지만. 근데…….

16550624877624.jpg‘정말 괜찮은 거 맞을까?’

장갑과 소매 사이로 얼핏 보인 그의 손이 무척 퍼렇게 변해 있었던 게 뇌리에서 내내 떠나질 않았다.

16550624877624.jpg‘의사는 만났겠지?’

뒷맛이 영 찝찝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머리 손질이 끝나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1655062484873.jpg“어머, 아가씨. 에스코트도 없이 혼자 가시게요?”

천막에서 펠리어트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중 레어넌은 나를 만찬장까지 에스코트해 줘도 되겠냐 물어봤었다.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고마운 제안이었고, 그와 함께 만찬회에 가리란 마음도 변함없었으나 지금 내가 향하려는 곳은 만찬장이 아니었다.

16550624877624.jpg“잠깐 펠리어트한테 좀 갔다 올게.”

1655062484873.jpg“네? 고, 공작님 방에요?”

16550624877624.jpg“응.”

조이에게 레어넌 단장님이 오시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급히 방을 나섰다. 내 방에서 그가 머무는 방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한달음에 도착한 나는 크고 어두운 색깔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펠리어트의 시종이었다.

16550624877624.jpg“……왜 그래요?”

잠깐 들어가도 되겠냐는 말 대신 이 말이 먼저 튀어나온 건, 울먹거리는 듯한 시종의 표정 때문이었다.

1655062484873.jpg“고, 공작님께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조급한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자꾸 안쪽을 살피는 걸 보니, 아무래도 펠리어트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때, 안쪽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찰나였고,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확실히 들었다.

16550624877624.jpg“잠깐 실례할게요.”

순간 불길한 기분에 휩싸인 나는 시종을 지나쳐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저번처럼 캄캄하기만 했다.

16550624877624.jpg“펠리어트!”

크게 이름을 불러 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몇 발자국 더 안으로 들어가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우뚝 서 있는 펠리어트가 보였다. 그 역시 연회를 위한 검은색 정복을 입고 있었다.

16550624848721.jpg“갑자기 왜 찾아온 거지?”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의 끝이 어딘지 모르게 살짝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더더욱 불안해져 대답 대신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간 순간이었다. 몸이 살짝 휘청이더니, 갑자기 그가 내 쪽으로 고꾸라지듯 푹 몸을 숙였다.

16550624877624.jpg“펠리어트!”

나는 거의 비명을 내지르며 급히 그를 지탱했다. 무심코 손에 닿은 얼굴이 마치 불덩이 같았다. * * * 시종의 도움을 받아 그를 간신히 침대에 누였다. 이마는 펄펄 끓고 있었으며,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상태였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파리한 안색은 누가 봐도 심각하게 아픈 사람의 것이었다.

16550624877624.jpg“방에 돌아오자마자 열이 났다고요?”

1655062484873.jpg“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연회에 꼭 가겠다고 하셔서…….”

16550624877624.jpg“분명 아까 만났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시종이 울먹이며 고해바치듯 말을 이었다.

1655062484873.jpg“전장에서 입으신 부상의 후유증 때문에 그러실 겁니다. 사실 마님께서…… 아니, 로렐라 님이 저택을 떠나신 이후, 비슷한 증세로 앓아누우셨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쭉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사정을 알게 되었다.

16550624877624.jpg“……그러니까 이 상흔에 여전히 마력이 남아 있는데, 오늘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다시 덧났다는 건가요?

1655062484873.jpg“낙마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사실 대회 내내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으셨거든요. 강가에 다녀오신 뒤부터 미열이 있으셨고…….”

그 말에 나는 숨을 편히 쉬게 해 줄 요량으로 그의 목에서 풀어냈던 실크 크라바트를 꾸욱 쥐었다.

1655062484873.jpg“셰릴 백작님께 급히 신관을 불러 달라 부탁드렸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버티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낮게 한숨을 푹 쉰 시종은 초조한 듯 손에 쥐고 있던 병을 자꾸만 문질렀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내 시선도 병에 못 박혔다.

16550624877624.jpg“그건 뭔가요?”

1655062484873.jpg“열을 내리고, 고통을 가라앉혀 주는 약입니다. 아까 공작님께 드렸을 땐 필요 없다 하셨고, 지금은 의식이 없으시니…….”

16550624877624.jpg“그래도 어떻게든 먹여 봐야죠! 도와주세요.”

내 말에 따라 시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떻게든 약을 먹이려 그를 조금이라도 일으키기 위해 애썼다.

16550624877624.jpg“흡.”

이를 앙다문 채 젖 먹던 힘까지 내 봤지만 수포였다. 꾹 다물린 그의 입은 좀처럼 벌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한 방울도 먹이지 못하고 고스란히 밖으로 흘리고 말았다. 의식이 없는 병자와 씨름하느라 땀까지 흘리던 시종은 결심한 듯 말했다.

1655062484873.jpg“역시 안 되겠습니다. 비록 공작님께선 소란 피우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당장 나가서 도와줄 사람을 불러와야겠습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태세였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아 눌러 앉히며 조용히 물었다.

16550624877624.jpg“신관은 언제쯤 도착한다던가요?”

1655062484873.jpg“그건 저도 잘…….”

16550624877624.jpg“괜찮으면 그것부터 확인해 주세요.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몰려드는 것보단 그쪽이 더 도움이 될 테니까요.”

펠리어트가 왜 소란 피우지 말라 엄포를 놓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였다고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저택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안 그래도 모두 펠리어트를 주시하고 있는데 이런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여전히 그에게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고, 그로 인해 쓰러졌단 사실이 알려지는 것 또한 그에게 조금도 좋을 게 없을 듯했다. 대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연회 역시 엉망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시종은 내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펠리어트의 열은 좀처럼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색은 더욱 파리해져 있었다.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덜컥 겁이 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살며시 잡은 그때였다.

16550624848721.jpg“……로렐라?”

그가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16550624877624.jpg“응.”

나는 얼른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긴 한숨 같은 호흡이 새어 나왔다. 숨조차 열기를 띠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전혀 몰랐다. 백작저에 있는 내내 그의 컨디션이 난조였단 것도, 전장에서 이런 후유증이 남을 만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도. 강가에 다녀온 뒤부터 미열이 있었던 건,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젖은 옷을 오랜 시간 동안 입고 있었으니까. 비 오는 숲을 필사적으로 헤집고 다닌 데에도 죄책감이 들었다. 나와의 약속이 아니었더라면 펠리어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점점 더 고통이 심해지는지 펠리어트의 입에서는 낮은 신음이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이걸 어떡하지? 우선 약이라도 어떻게든 좀 먹여야 할 텐데. 나는 초조함에 손톱을 물었다. 아마 셰릴 백작은 바로 시종을 보냈겠지만, 신관이 저택에 도착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짧든 길든, 그의 고통이 계속될 거란 사실은 자명했다. 과연 그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마물에 당한다는 건,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울 거다. 마물의 독 때문에 쓰러져 사경을 헤맸던 홀턴 후작만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침착하려 애써 봐도 계속해서 차오르는 불안감에 입술을 아프도록 깨문 그 순간. 내 이름을 부른 뒤 그대로 살짝 벌어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어 시종이 협탁 위에 놓고 간 약병을 쥐었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뚜껑을 열어 반쯤 남은 약을 입안에 흘려 넣자 역할 정도로 쓴맛이 혀끝에 가득 맴돌았다. 그러고는, 망설일 틈도 없이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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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듯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에 닿았다. 약을 머금고 있던 입속으로 메마른 숨이 섞여 들어온 순간. 꿀꺽, 하고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뚫고 귓가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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