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멍청한 놈들2022.01.26.
언제나 나를 편하게 해 주는 레어넌과 달리, 펠리어트 앞에서 계속 눈을 감고 서 있는 건 괜히 긴장되는 일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감고 있어야 하지? 그보다 가운은…… 다시 여몄나? ……자꾸만 쓸데없는 쪽으로 신경이 쓰인다. 펠리어트에게선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데, 나 혼자만 쌕쌕하고 호흡을 크게 내쉬는 것도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참지 못하고 한마디 쏴붙이려는데, 귀밑에 무언가 스치는 것 같더니 목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아.”
나는 깜짝 놀라 바로 눈을 떴다. 코앞의 펠리어트가 내 등 뒤의 문을 짚은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살짝 숙이니, 엄지손톱만 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내 목에 걸린 게 보였다.
“아, 아니. 이런 건 받을 수 없어……!”
“왜지? 복도에서 그자가 주는 건 받았잖아.”
어둡게 가라앉은 펠리어트의 눈빛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건 내가 줄곧 궁금했던 레아의 신작이었으니까 받은 거고! 무엇보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선물이잖아! 아니, 그리고 대체 또 언제 본 거야? 펠리어트는 분명 옷을 갈아입는다고 먼저 자리를 떴는데. ……혹시 방금 다짜고짜 눈을 감으라고 한 게 레어넌 때문인가? 여하튼, 이런 걸 받을 순 없었다. 황궁 연회 때 받은 것들도 돌려주지 못했는데, 여기서 더 마음의 빚을 늘리고 싶진 않은 탓이었다. 그래서 몇 차례 더 거절했지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가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럼 그냥 고맙게 받을게…….”
결국 작디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인사를 건네니 펠리어트의 얼굴이 비로소 부드러워졌다. 헐벗은 거나 다름없는 본인의 몸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오로지 나와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며 미소만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러다 진짜로 들키는 건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두근거리는 소리가 안쪽에서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이제 그만 가 볼게.”
나는 허둥지둥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복도를 가로질렀다.
“……후우.”
그리고 내 방 앞에서 문을 열기 전에, 양손으로 뺨을 가볍게 여러 번 두드렸다.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는 젖은 머리와 근육질 몸, 나른한 목소리 같은 것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화끈거리는 얼굴로 들어갔다간, 에이미와 조이가 걱정할 테니까. 조심스레 문을 열자마자 예상대로 두 사람이 쪼르르 곁으로 달려왔다.
“아가씨!”
“이제 오셨어요?”
처음엔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던 두 쌍의 눈동자는 내 목 언저리를 발견하곤 돌연 반짝이며 빛나기 시작했다.
“우와…….”
“아, 아가씨. 이거 설마…….”
에이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흐뭇한 얼굴로 목걸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조이는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말 못 한다. 다이아몬드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10만 주가 팔리는 줄도 몰랐다는 말 같은 건 절대로 할 수 없다고! * * * 사냥 대회가 열리는 날.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새 잠을 설친 나는 일찍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찍 일어난 김에 준비나 할까 싶어 조이와 에이미가 머무는 방으로 연결된 줄을 당길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만두었다. 깨우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갑갑한 저택에서 벗어나 정원에서 맑은 공기라도 좀 마실 요량으로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조용히 복도 밖으로 나갔다. 마음 편히 산책하려면 이런 시간이 제격이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아 사람도 없고, 레어넌과 펠리어트와도 동시에 마주칠 가능성이 적으니까. 10만 주를 판 걸 그새 또 어떻게 알았는지 다시 활짝 웃는 얼굴로 나타난 위너드는, 아예 두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동시다발적으로 팔아치우는 건 어떻겠냐는 제의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다. 나는 펠리어트와 레어넌 앞에서 각각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레어넌 앞에서는 밝고 명랑한데 한편으론 작은 일로도 크게 충격받기도 하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인 척했지만 펠리어트에게는 차갑고 매몰찰 때도 있고 할 말은 다 하는 당찬 사람을 연기했다. 한꺼번에 두 인물을 연기할 수는 없는 일인데, 어떻게 둘을 동시에 공략하냐고!
“안내자라는 게 그런 것도 모르고…….”
어휴. 깊은 한숨을 내쉬며 1층으로 향하던 차였다. 계단을 절반쯤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더니 안으로 들어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쪼그리고 앉아 난간 뒤로 몸을 숨겼다.
“날씨가 흐리군.”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확인하니, 펠리어트가 셰릴 백작과 함께 있었다. 아침부터 대체 어딜 다녀온 건지는 몰라도, 그는 지금 당장 사냥 대회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차림새였다.
“네, 공작님. 아무래도 사냥 대회가 시작되면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흔적이 지워질 테니 사냥감을 찾기 더 어렵겠군.”
셰릴 백작은 잠을 설친 듯 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뒤로 활과 화살통을 든 시종들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이 계단을 함께 오르면 마주칠 게 뻔해 빨리 자리를 뜨려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구름이 움직이는 걸 보니 날이 밝으면 아무래도 바람이 거세질 것 같군요.”
바로 레어넌이었다. 그 역시 평상시 입는 하얀색 정복이 아닌, 사냥하기 좋은 차림새였다. 펠리어트 뒤에 서 있던 셰릴 백작이 이번에는 레어넌 쪽으로 잽싸게 몸을 돌렸다.
“네, 네에. 하늘도 쾌청하고 바람도 잔잔하길 바랐지만, 날씨가 영 따라 주지 않네요.”
“날씨는 백작께서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요.”
레어넌의 곁에도 활을 든 시종들이 있었다. 얼마나 관리를 잘해 놓았는지 멀리서도 활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나는 황당해서 창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동이 트기 전이었다. 아직 이렇게 깜깜한데 설마 밖을 둘러보고 온 건가? 날씨라든지 바람의 세기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 아니, 둘 다 대체 사냥 대회에 얼마나 진심인 거야……?
“그럼 아침 식사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두 분 모두 그때까지…… 잠시만이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셰릴 백작은 하품을 참는 듯 잠시 턱을 움찔거리더니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재빨리 안쪽으로 사라졌다. 펠리어트와 레어넌 역시 조용히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르는 시종들에게 여전히 날씨라든지, 대회에 관해 이것저것을 물으면서 말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계단을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들키지 않게 자리를 떠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그들이 계단을 오르기 직전.
“……날 방해할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레어넌.”
펠리어트가 서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자 레어넌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방해라니. 난 그저 씩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린 그녀가 네 난폭함에 억눌리고 고통받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뿐이야. 누군가는 그녀의 미소를 지켜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 누가 대체 뭘 억누른다는 거지? 내가 로렐라를 웃지 못하게 만들기라도 한다는 건가?”
“억지웃음과 진짜 웃음은 구별하기 힘든 법이지.”
레어넌은 마치 구제 불능인 폭도라도 대하는 듯한 엄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세상에는 괴로울 때면 더욱 억지로 밝게 웃어 보이려는 사람이 있다는 걸. 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는 그런 게 아니야.”
으아, 으아아! 그, 그만!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펠리어트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뭘 모르는 건 네놈이지. 멋대로 네 이상 속에 사람을 끼워 맞추고 있으니 말이지.”
그러자 레어넌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뭐라고?”
“로렐라는 원하는 바를 누구보다 진취적으로 쟁취할 줄 아는 여자다. 자유분방하고 때론 거친 언사를 하는 데에도 거리낌 없지. 그게 그녀의 개성이자 매력인데, 마냥 여리다니. 그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악! 하지 말라고!
“거친 언사? 그건 네가 한계까지 몰아갔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선한 사람을, 지긋지긋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레어넌의 음성이 드물게 살짝 높아졌다. 하지만 펠리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글쎄, 보통 지긋지긋한 사람에게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진 않지. 보아하니 넌 그것까진 몰랐나 보군.”
“고작 편지 한 통 받은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다니, 안쓰러울 정도다.”
아, 제발 그만들 하라고!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연신 소리 없는 비명을 터트렸다. 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줄 까맣게 모르는 두 사람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신경전을 벌였다. 낯부끄러운 흑역사가 눈앞에 강제로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나 혼자만 창피하고 어색하고 민망한 아침 식사까지 끝나고, 드디어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하늘엔 여전히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화려한 사냥복을 차려입고 저택 앞에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얼굴들도 많았다. 모두 백작저에 머물고 있기는 하나, 별채에 있는 손님들과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었다. 아마도 대회 후 열릴 연회에서나 인사 나누게 되겠지.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사실 새벽부터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지라 시작하기도 전에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찌 됐든 참가 신청을 했기 때문에 나는 말에 올라타 숲으로 향했다. 이쪽 지리를 잘 아는 에이미와 대회를 구경하고 싶다는 조이도 함께였다. 우리는 산책이라도 하듯 천천히 말을 몰았다. 정말 사냥을 즐기기 위해 모인 다른 귀족들은 이미 일찌감치 숲의 출발선에 가 있었다. 물론 가장 먼저 그곳에 도착한 건 펠리어트와 레어넌일 것이다.
“하, 집에 가고 싶다…….”
오솔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중얼거리는데, 조이를 뒤에 태운 에이미가 다가와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아가씨?”
“아무것도 아니야…….”
단념하듯 대답하며 시선을 줬는데, 어쩐지 그녀는 몹시 들뜬 듯한 기색이었다.
“날씨가 맑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정말 아쉬워요. 그나저나 올해 우승은 누가 차지하게 될까요? 역시 펠리어트 공작님이 되시겠죠?”
그러자 뒤에 앉아 있던 조이가 발끈하며 목청을 높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레어넌 님이 계신데. 그분은 마물도 잡을 정도로 강하시잖아. 1등은 당연히 단장님 거지.”
“하지만 단장님은 검사잖아. 활 솜씨는 펠리어트 공작님이 월등하실걸?”
“그, 그래도……!”
그새 친해졌는지 두 사람은 쉼 없이 아웅다웅했다. 나는 행여 내 의견을 묻기라도 할까 봐 그녀들과 슬쩍 거리를 벌렸다. 이윽고 숲에 다다르니,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매달아 설치한 커다란 천막이 여러 개 보였다. 모서리마다 색색의 깃털이 달린 화살 바구니를 잔뜩 쌓아 놓은 곳도 있었고, 테이블과 고급스러운 의자가 놓인 곳도 있었다. 시종들이 테이블 위로 찻잔이며 작은 접시들을 세팅하는 걸 보니, 아마 쉬고 싶은 손님들을 위한 공간인 듯했다. 어차피 숲에 들어갈 일은 없으니 저기서 차나 마셔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말에서 내려 테이블 쪽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어머, 아가씨.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숲에서 활은 한 번 쏴 보셔야죠.”
에이미가 눈치채고는 다가와 말했다.
“그, 그럴까?”
“네. 저기 보세요. 꼭 깊은 안쪽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냥을 즐기실 수 있답니다. 숲 초입에는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도 있으니까요.”
에이미가 가리킨 곳에는 나와 수준이 비슷해 보이는 귀부인들이 서툰 솜씨로 활시위를 당겨 보고 있었다. 뭔가를 꼭 잡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활은 한 번 더 쏴 보고 싶긴 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붉은색 깃털이 달린 화살통을 어깨에 메고 있는 펠리어트였다.
“로렐라.”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
“약속은 지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무심한 목소리와 달리 흑요석처럼 새카만 두 눈 속엔 마치 불길이 일고 있는 듯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입술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나.”
에이미가 옆에서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나는 모른 척 헛기침을 하며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펠리어트가 몸을 돌려 사라지기가 무섭게 또 다른 그림자가 다가왔다.
“로렐라, 숲은 위험하니 너무 깊이는 들어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레어넌이 타고 있는 말 안장에는 초록색 깃털로 가득한 화살통이 매달려 있었다. 시원하게 탁 트인 바다처럼 푸르른 두 눈동자에서는 다정함과 상냥함, 그리고 왜인지 모를 결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대회가 끝나면 꼭…….”
말끝을 묘하게 흐리는 얼굴은 마치 소년처럼 들떠 보였다. 목 언저리가 살짝 붉어진 모습 또한 눈에 들어왔다.
“아가씨, 어서 잘 다녀오시라고 말씀드려야죠!”
조이가 옆에서 외치듯 말했지만 나는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쟁하듯 앞다투어 출발선 쪽으로 이동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윽고 화살을 나눠 주는 곳으로 가자, 내 얼굴을 알아본 시종 한 명이 넉살 좋게 말을 붙였다.
“로렐라 님, 대회는 처음이시죠? 활 솜씨가 대단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부디 다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고마워요. 그런데 어디서 들으신 건지는 몰라도 굉장한 헛소문을 들으신 것 같네요.”
나는 일부러 정색하며 농담 섞인 진담을 건넸다. 그러자 시종은 재미있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노란색 깃털이 달린 화살 한 묶음을 건네 주었다.
“화살 뒤에는 참가자마다 다른 색의 깃털이 달려 있답니다. 점수를 매겨야 하니까요. 그러니 잡은 사냥감에서 화살을 뽑아선 안 됩니다.”
특별히 눈에 잘 띄는 색이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내가 점수를 받을 일은 없을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화살을 하나 뽑아서 살펴보았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유독 반짝였다. * * * 커다란 책상과 의자가 전부인 살풍경한 방. 한 남자가 책상 위에 발을 올린 채 앉아서 의자를 뒤로 까닥이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눈을 꾹 감고는, 뒤로 넘어갈 정도로 아슬아슬한 각도까지 의자를 몇 번씩이나 젖혀 댔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와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의 수하, 시드였다.
“조심해. 그러다 또 저번처럼 뒤로 넘어가서 뒤통수 깨질라.”
다소 핀잔 섞인 말에 평소라면 지지 않고 응수했겠으나, 지금은 마음이 급했다. 카셀은 벌떡 일어나 성마르게 물었다.
“일은 계획대로 잘 처리했지?”
“당연하지. 귀족가의 시종을 매수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시킨 대로 화살촉에는 마법을 걸어놓았어. 짐승들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바로 마력이 발현될 거야.”
시드가 곁으로 다가와 눈을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명령이라고 하니까, 흑마법사가 특별히 신경 좀 썼더라고. 나중에 두둑이 좀 챙겨 줄까?”
그제야 카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이 사르륵 흩어지며 이마 위를 간질였다. 시드가 나간 뒤,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는 문득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누나 믿지!’
바자회 사건이 있던 날, 재빨리 자신의 칼을 숨기던 그녀의 행동력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다. 거기다 망설임도 없이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댄 그 박력! 카셀은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왼쪽 뺨 언저리를 저도 모르게 손으로 매만졌다. 정말 입술이 맞부딪혔어도 좋았을 텐데. 어쩐지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로렐라 메이레드는 그런 여자다. 누구보다 행동력이 강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섣불리 나서지 말라고 명령할 정도로 남에게 기대기 싫어하는 사람. ……그런데 뭐? 서로 우승을 가져다 바치는 걸로 경쟁이 붙었다고? 아무래도 남에게 얻는 것보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딴 열매를 더욱 달콤하게 느낄 여자라는 걸, 그들은 도통 모르는 모양이다.
“멍청한 놈들.”
그는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채 주머니에 손을 푹 찔렀다.
물론 제게 말도 해 주지 않고 사냥 대회에 가 버린 건 좀 많이 서운하지만, 너그러이 이해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똑똑히 알려 줄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누나를 1등으로 만들어 줄 남자는 바로 저밖에 없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