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눈 감아2022.01.22.
나는 다시 한번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재빨리 정신을 추슬렀다. 그리고 제일 먼저 레어넌을 향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깜짝 놀랐어요, 단장님. 여기서 뵐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요.”
다음으로는 예상대로 미간을 구기는 펠리어트에게 말했다.
“덕분에 잘 쉬었어. 몸이 안 좋은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두 사람 모두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런데 왜 옷차림이……?”
보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펠리어트와 레어넌이 동시에 고개를 내려 황급히 본인들의 차림을 살폈다. 분명 나갈 때만 해도 멀쩡했던 펠리어트의 옷은 여기저기 찢기고 먼지와 흙 따위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만큼 엉망인 건 아니지만, 레어넌 역시 평상시의 깔끔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하얀색 정복에는 시커먼 얼룩이 여기저기 잔뜩 묻어 있었다. 그때 펠리어트가 옷을 가볍게 털었는데, 하필 입에서 재채기가 터져 버렸다.
“……미안하군.”
먼지 때문이 아니라 타이밍이 그냥 그렇게 된 건데, 펠리어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며 나와 레어넌을 지나쳐 위로 올라갔다. 나는 여전히 곁에 선 레어넌에게도 옷부터 갈아입고 난 뒤에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레어넌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급히 다가와 방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며 그를 안내했다. 시종들과 함께 천천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급한 불은 껐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알아낼 차례였다. 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바로 그들과 함께 숲에 다녀온 셰릴 백작과 다른 손님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처 묻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때 상황을 생중계라도 하듯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말에서 내려 숲의 초입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레어넌 단장님이 오셨지 뭐예요. 단장님의 시종에게 물어보니, 쉬지도 않고 오셨다나 봐요.”
“단장님이 오시자마자 펠리어트 공작님이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셔서 말조차 건넬 수 없었어요!”
“이상한 건 레어넌 단장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 온화하신 분이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내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잖아요.”
“숲을 어찌나 헤집고 다니시던지, 두 분 다 우승에 목숨이라도 거신 줄 알았습니다.”
나는 모두의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레어넌이 대체 왜 갑자기 이곳에 온 건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셰릴 백작조차도 참가하겠다는 서신을 받았을 뿐이라고만 했다. 대화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 계속 이어졌다. 대부분 펠리어트와 레어넌 모두가 참가한 사냥 대회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질지, 사교계에서 이 이야길 얼마나 궁금해할지 기대된다는 이야기였다. 긴긴 대화 끝에 사람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는 말을 남긴 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나도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셰릴 백작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는 방으로 향했다. 레어넌을 만나면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2층 복도를 천천히 걷는데, 중간쯤에서 불쑥 인영이 튀어나왔다.
“로렐라.”
나는 놀란 나머지 벽에 붙다시피 하며 뒤로 걸음을 물렸다. 갑자기 나타난 건 다름 아닌 레어넌이었다.
“다, 단장님? 방으로 가신 게 아니었어요?”
“할 말이 있어서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할 말이요?”
쑥스러움이 역력한 기색으로 말문을 연 그의 옷은 아까와 변함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기다린 듯했다.
“우선,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의 사과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한테 죄송하실 일도 아닌걸요.”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셔서, 아무래도 폐가 된 것 같아…….”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단장님. 그냥 깜짝 놀랐을 뿐이에요.”
만약 펠리어트가 이런 말을 했더라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대답했겠지만 레어넌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더 우울해하지 않도록 억지로나마 활짝 웃어 보였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단장님을 뵈니 너무 반갑고 좋은걸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그제야 비로소 레어넌의 입가에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다정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혹시 그 이야길 하려고 일부러 기다리신 거예요?”
“아뇨, 실은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과만 하려고 기다린 건 아닌 것 같아 물은 건데, 그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비장하게 느껴질 만한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척, 중요한 이야깁니다.”
중요한 이야기? 대체 뭘까? 분위기로 미루어 보건대, 이렇게 서서 이야기할 만한 일은 아닌 듯했다.
“오래 걸리는 이야기인가요? 저는 얼마든지 시간이 있는데, 단장님이 괜찮으실지…….”
자리를 옮겨야 하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에서 바로 하기는 어려운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게 되면 솔직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네?”
“그땐 반드시 진지하게 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올곧게 나만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마치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평소보다 다소 가라앉아 있지만 여전히 온화한 음성도 기분 좋은 음악처럼 들렸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님이 눈물을 흩뿌리며 50,000주를 구매합니다!」 「이거슨 프러포즈 각! 이거슨 프러포즈 각! 이거슨 프러포즈 각! 이거슨 프러포즈 각! 이거슨 프러포즈 각! 이거슨 프러포즈 각! 이거슨 프러포즈 각! 이거슨 프러포즈 각!」 ……선생님, 그건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문장 뒤에 ‘단호’라는 말을 붙여 주고 싶다. 갑자기 대회에 참가한 레어넌이 펠리어트처럼 우승에 집착하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대체 왜 그러는 건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의 태도가 물어본다 해서 답해 줄 것 같지 않은 탓이었다. 얼떨떨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한 듯 레어넌이 다정다감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작게 탄식하더니 정복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 내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쥐었다.
“눈을 감아 보시겠습니까?”
“네? 눈을요……?”
“깜짝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대체 뭘까? 기대감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던 그때, 손에 작고 네모난 무언가가 올려졌다.
“아.”
눈을 뜨고 손에 올라간 물건을 확인한 내 입에서도 작은 탄성이 터졌다. 작고 예쁜 통에 담겨 있는 쿠키였다. 너무 귀엽고 정교해서 입에 넣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이번에 준비하신 신제품이라는 얘기, 들었습니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안 그래도 완성품을 보지 못하고 북부로 와서 무척 궁금했는데…….”
“안 그래도 가게에 갔더니, 궁금해하실 거란 이야기를 전해 주더군요. 일부러 들고 온 보람이 있습니다.”
답지 않게 너스레를 떠는 레어넌 때문에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렇게 작지만 세심함이 느껴지는 선물은 오로지 그이기에 가능했다. 레어넌이 이곳에 갑자기 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어느새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에게 환한 미소를 건넸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배신감을 잔뜩 안고 위너드를 소환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보다 더 생산적인 고민을 하는 편이 나을 거 같아서였다. 주식을 팔기 좋은 기회라는 그의 말도 결코 틀린 이야기는 아니니까. 특히 펠리어트를 떠올리면 더더욱 수긍이 갔다. 그는 레어넌의 이름만 언급해도,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을 열광하게 만드는 남자니까. 하물며 둘이 같은 공간에서 머물게 되었으니, 만약 눈앞에서 내가 레어넌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아, 아니야.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내키질 않지? 내 마음인데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식 판매량을 가장 쉽게 늘릴 수 있는 길인데, 내키질 않는다니? 위너드가 들었다면 분명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봐도 마음은 변하기는커녕 점점 더 확고해져만 갔다. 심지어는 그런 방식이 아니어도 더 좋은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마저 들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워하며 한참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여니 에이미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게…….”
몸을 조금 비켜 주자 말끝을 흐리며 안에 들어온 에이미가 상자 안에 든 물건을 침대에 펼쳐 놓았다. 화려하게 수 놓인 자수가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아니. 뭐야, 갑자기?”
“드레스인데요…….”
“그건 나도 알지.”
어째 미심쩍은 그녀의 반응에 다시 한번 추궁하듯 물었다.
“어디서 난 거야? 누가 준 거야?”
“펠리어트 공작님께서 주신…… 선물이십니다.”
우물쭈물하던 에이미는 결국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냥 대회가 끝나고 열리는 만찬 때 입어 주시면 좋겠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기 직전, 저택엔 드레스 하나가 도착했었다. 그때만 해도 누가 보낸 건지 몰라 섣불리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선물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는, 연회에 참석한 후에 알게 되었다. 그 드레스의 색과 펠리어트의 정복 재킷 색깔이 어찌나 똑같던지! 정말 뻔뻔할 정도였다. 순진하게 그걸 입고 갔더라면 아마 무척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거다. 지금 와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걸 입고 가면 분명 펠리어트도 맞춰서 옷을 입고 나오겠지.
“거, 거절하실 건가요? 제게 특별히 부탁하신 건데……!”
나는 사정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에이미에겐 잘못이 없고, 그녀로선 펠리어트에게 내가 거절했다고 전하기도 어려울 거다. 결국 내가 직접 가서 거절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거절하기로 마음먹기가 무섭게, 나는 펠리어트의 방으로 향했다. 에이미를 앞세운 채 방문을 두드리자, 시종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당황해하더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오라는 펠리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디디며 안으로 들어섰다. 커튼을 전부 쳐 놓아 사위가 온통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도 아니고 왜 이렇게 어두운 걸 좋아해? 시종과 에이미는 내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방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펠리어트의 명일 게 뻔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깜깜한 방 안에는 나와 그, 둘뿐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자, 이윽고 펠리어트가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어두운 와중에도 실루엣은 무척 똑똑히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 책망하듯 외쳤다.
“왜, 왜 들어오라고 했어?!”
이제 막 씻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에서는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벌어진 검은 가운 안으로 탄탄한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단단하게 벌어진 맨 가슴이 적나라하게 보여 눈을 어디로 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바, 바지……는 다행히 입고 있구나!
“무슨 일이지?”
“아, 그, 그렇지. 드레스! 예쁜 드레스를 보내 줘서 고맙지만, 안 입을 거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도 모르게 말을 횡설수설하며 더듬거리고 말았다.
“……왜.”
“보나 마나 당신 옷 색깔하고 맞췄을 테니까.”
“그럼 안 되나?”
최대한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뻔뻔하기까지 한 그의 대답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히 안 되지!”
“아직 부탁이 남아 있을 텐데.”
“곤란한 부탁은 거절해도 된다는 약속, 잊은 건 아니지?”
그걸로도 모자라 그 뒤에 재빨리 덧붙였다.
“게다가 아직 우승 상금을 준 것도 아니잖아.”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이 좀 심했나?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 사과할 마음은 없었다. 그때, 단단히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싶더니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매우 어색한 행동이었다. 상심해서 낸 소리라기엔 좀 이상하다. 도대체 왜 이러나 싶어 마른침만 삼키는데, 펠리어트가 갑자기 나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 역시 그의 걸음만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금세 등 뒤에 벽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욕조에 띄웠던 향유인지, 아니면 그가 쓰는 향수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른스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유혹적인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왜, 왜 그러는 거야?”
“눈 감아.”
“뭐?”
“눈, 감으라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두 눈만 깜빡이는데, 펠리어트가 상체를 숙여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선물을 주지.”
안 그래도 갑자기 받은 드레스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웬 선물 타령인지. 솔직히 펠리어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대되거나 설레기보다는 조마조마한 기분이 앞섰다. 게다가 눈까지 감으라니. 무, 무슨 짓을 하려고?! 하지만 펠리어트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협탁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그 탓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가운 허리띠가 풀려 버렸다.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것도 모자라, 조각처럼 갈라진 복근마저 한눈에 들어왔다.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하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100,000주를 구매합니다! 신기록입니다!」 「선물을 줘야겠군. (가운을 벌리며!) 벌을 줘야겠군. (가운을 벌리며!)」 기념할 만한 신기록이었지만, 기뻐할 수도 없었다. 마치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눈꺼풀이 스르르 감긴 탓이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아찔하고 위험한 분위기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 * 로렐라가 왔다는 이야기에, 펠리어트는 물기를 닦지도 않고 곧장 바지와 가운만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용건은 간단명료했다.
‘……내 선물은 단칼에 거절하는군.’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든 것일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는 얼굴이 오늘따라 조금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레어넌에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의 앞에서 지저분한 몰골로 있고 싶진 않아 서둘러 방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곧장 다시 나왔었다. 레어넌과 로렐라를 함께 남겨 둔 게 영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우려는 기우였을 뿐이었는지, 레어넌도 금방 2층으로 올라왔지만 그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펠리어트는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아니나 다를까, 레어넌이 기다리던 사람은 역시나 로렐라였다. 뒤늦게 올라온 그녀는 레어넌을 보고 놀란 듯했지만 곧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여나 두 사람에게 지켜보는 것을 들킬까, 펠리어트는 입술을 깨문 채 사각지대 쪽으로 살짝 몸을 숨겼다. 쥐새끼처럼 숨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레어넌에게는. 하지만 적막한 복도에 울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눈을 감아 보시겠습니까?’
‘네? 눈을요……?’
‘깜짝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그 말대로 선물을 받고 기쁘게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이 망막 깊은 곳에 새겨지는 듯했다. 그 가증스러운 놈처럼 굴면 똑같이 웃어 줄까. 하지만 그렇게 낯간지러운 대사를 던지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앵무새도 아니고, 레어넌의 말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도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일단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평소대로 툭, 말을 건넸다.
“눈 감아.”
“뭐?”
“눈, 감으라고.”
로렐라는 역시나 그의 말을 곧장 듣지 않았다. 동그랗게 뜬 눈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펠리어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협탁 서랍에 넣어 놓았던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직접 주고 싶어 시종에게 맡기지 않았던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선물을 주지.”
드레스가 별로라면, 다른 선물을 주면 된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드는 게 하나쯤은 나올 테니까. 그때는 그녀도, 레어넌 앞에서 보인 것만큼 환한 웃음을 짓겠지. 그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로렐라는 아무 말 없이 눈을 살포시 감았다. 어둠에 익숙한 펠리어트에겐 약간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왜인지 곤란해 보이는 표정 역시도. ……기뻐하는 건가? 아니면 혹시, 그 반대? 어떤 의미인지는 몰라도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