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잘해 봐, 로렐라2022.01.19.
“공작님……!”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가파른 비탈길을 거침없이 내려가는 펠리어트의 뒤를, 시종이 초조한 표정으로 급히 쫓았다. 행여 저러다 귀하신 몸을 다치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한 탓이었다. 하지만 펠리어트에겐 그 어떤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쫓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무 둥치나 땅에 난 짐승들의 흔적이었다. 동물들은 자연적인 습성에 따라 저마다 오고 가는 통로가 의외로 뚜렷이 정해져 있으니, 그것만 파악한다면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일단 눈앞에 사냥감이 보이기만 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백발백중으로 맞힐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펠리어트의 우승 전략은 무척이나 간단명료했다. 최대한 많은 짐승을 맞닥뜨리는 것. 그 탓에 둘러보기만 해도 되는 숲을 여기저기 헤치며 흔적을 찾아다녔다. 꼭 이겨야만 했다. 그의 길고 탄탄한 체형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들어 준 옷이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지거나, 비탈길에서 구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전부 우승하겠다는 집념이 낳은 투혼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갑작스레 등장한 눈엣가시 같은 불청객이 그의 경쟁심에 불을 붙였다는 게 더 정확했다. 그건 레어넌도 마찬가지였다. 펠리어트가 말을 묶어 둔 곳으로 다시 올라가는 한편,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영롱한 은빛의 검이 반짝이며 허공을 갈랐다. 휙,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커다란 바위 아래 비스듬히 걸쳐진 채 썩어 가던 통나무가 마치 부드러운 치즈처럼 두 동강 났다. 하지만 거기서 레어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 통나무를 아예 조각내 버렸다. 덕분에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각종 애벌레와 축축한 이끼 같은 것들이 사방에 튀었다. 곁을 지키던 시종이 꽥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역겹기까지 한 광경에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레어넌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아름다운 금발에 붙은 이물질들을, 심지어는 꼬물꼬물 움직이기까지 하는 것들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툭, 털어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새하얀 정복은 어느새 시커먼 얼룩이 군데군데 져 있었고, 비단결처럼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조차 마치 까치집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오로지 통나무에 가려져 있던 쪽 땅을 검으로 뒤적이는 것에만 집중할 따름이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서 말을 달려왔건만, 피곤함 같은 건 느낄 새도 없었다. 곧 멧돼지들의 배설물 흔적을 발견한 레어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 놈들의 은신처가 있는 게 확실했다. 참가한 적 없을 뿐, 셰릴 백작의 사냥 대회에 대한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민가를 들쑤시는 멧돼지가 골칫거리라 가장 높은 점수가 걸려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는 검사이지 궁수가 아니었기에, 활을 쓰는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려면 누구보다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점수를 쌓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사냥 같은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열의에 불타올라 있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인 복장과 싸늘하고 냉정한 시선.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생각해 봐도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는 펠리어트였다. 늘 상냥하기 그지없던 레어넌의 눈빛이 거칠어졌다. 그는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자 애써 노력하며 검을 다시 검집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지금 발견한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 특정될 만한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먼지를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얼룩진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펠리어트가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레어넌은 자신의 부하로부터 보고 받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도착하자마자 활 쏘는 법을 알려 주겠다며 단둘이 외출하고, 심지어는 각종 사교 모임에 함께 초대를 받았다고?’
간신히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 사납게 요동쳤다. 아마도 그녀는 무척이나 난감했을 것이다. 활 연습을 빌미로 외출을 억지로 종용했을 거고, 사교 모임 또한 거절할 만한 명분이 없도록 교묘하게 손을 썼을 테니까. 그 와중에도 ‘단둘이’라든가, ‘함께’라는 단어를 들을 땐 특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고작 저렇게 졸렬하고 치졸한 남자를 상대로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통탄할 만한 일이었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마음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으니까. 평생 이런 행사에는 나타나지 않던 그가 갑자기 참가한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뜻대로 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그의 우승을 막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레어넌은 점점 노기가 차오르는 시선을 흔들림 없이 고정한 채, 주먹을 꾸욱 쥐었다. 아니, 사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저 남자에게만큼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레어넌을 마주하고 선 펠리어트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잇새에서는 빠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결벽증이라도 있는지 흰 정복만 질리도록 챙겨 입는 놈이, 저런 몰골로 자신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온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를 수 없었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난 것도 모자라, 감히 도발까지 하다니. 승패를 가리는 데 있어서 누가 먼저 화살을 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건방진. 그 말을 한 걸 후회하게 해 주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그 속에 내포된 진짜 뜻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도. 펠리어트의 입가에는 냉소가 피어올랐다. 어쨌거나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은 모양인가 본데,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으니. 그의 어리석음이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꿈조차 꿀 수 없다는 걸 톡톡히 가르쳐 주마.’
펠리어트는 분노 서린 다짐과 함께 어금니를 억세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뒤흔들던 풍랑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냥에 관심도 없는 놈이 여기저기 숲을 헤치고 다니는 모습이 영 걸렸던 탓이었다. 설마 날 제치고 우승이라도 하려고? 가소로워 코웃음까지 새어 나왔다. ……절대로 그렇게 둘 순 없지. 나무 사이를 바삐 오가는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평온한 숲속. 그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마주한 두 남자의 불꽃 튀는 시선이, 마치 소리 없이 던져진 칼날처럼 서로에게 살벌하게 꽂혀 들었다. * * *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고 저택에 남은 나는, 홀로 정원을 거닐면서 간만에 여유를 만끽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셰릴 백작의 저택에 있으면서 내내 따라붙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니 한결 살 것 같았다. 산책을 즐기는 와중에도 다른 손님들이며 백작가의 고용인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대부분은 간단한 인사를 건네는 게 전부였다. 인맥을 쌓고 교류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기대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쉴 새 없이 질문 공세를 받는 상황이 마냥 유쾌한 건 아니었다. 말하자면, 오늘 아침처럼. 어쩌면 처음 있던 만찬 자리부터 줄곧 되풀이되어 온 것이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잘 조경된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본 나는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안에서 내 드레스를 꺼내 정리하고 있던 조이와 에이미가 깜짝 놀라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어머, 로렐라 님. 숲에 안 가셨어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야. 내가 그냥 갑자기 가기 싫어져서 변덕 부린 거야.”
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하곤 침대에 털썩 앉아 다리를 쭉 폈다. 오래 걸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역시나 아침의 소란 때문인 듯했다. 행여 두 사람이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
“어쩐지 피곤해서 별로 가고 싶지가 않더라고.”
그런데 어쩐지, 사방이 조용했다. 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레몬을 띄운 홍차를 가져다드릴까요?’ 하고 묻던 조이의 목소리도, 에이미가 야무진 손길로 치마를 다림질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고요한 적막이었지만 내게는 그다지 놀라울 것 없었다.
“피곤해?”
아니나 다를까, 귀에 몹시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케인을 옆구리에 낀 위너드가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서 있었다.
“피곤하다는 걸 보니, 그동안 주식을 열심히 팔았나 본데.”
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눈을 굴리다 물었다.
“조이랑 에이미는?”
“저세상에 있지.”
어휴, 말을 해도 꼭.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를 슬쩍 흘긴 뒤 모른 척 잠자코 있었다. 어쩐지 목소리도 그렇고 말투가 불만이 있는 듯 삐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간 잠잠했던 위너드가 갑자기 나타난 데엔 분명 의도가 있을 테니까. 예를 들면…….
“그래서 오늘 얼마나 팔았어?”
바로 지금처럼 잔소리하기 위해서라든가.
“……없는데.”
“뭐?”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너드가 인상을 구겼다.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열심히 변명을 늘어놨다.
“아, 아니! 내 말을 들어봐. 도착한 첫날엔 무려 3만 주나 팔았고…….”
“로렐라.”
하지만 내 말은 그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때는 그때고.”
“…….”
“지금은 지금이지.”
위너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를 끌어 와 내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저 멀리 밀어 뒀던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설마 내가 다음에 소멸할 후보가 되었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내가 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까지 널 도와준 거라 생각해? 그건 다 널 믿어서였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만 하면 네가 누구보다도 열심히 주식을 팔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술렁이게 한 불안은, 다른 게 아니라 끝없는 잔소리가 시작될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나 보다……. 위너드는 귀가 따갑도록 말을 이어 갔다.
“그걸 위해서 최선을 다해 널 도와줬는데! 넌 네가 뭘 해야 하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고!”
아니, 이건 잔소리라기보다는 숫제 열변을 토해 내는 수준이었다.
“소멸할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제발 도와달라고 울며불며 부탁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 일 아니었나?”
“잠깐. 내가 언제 울며불며 부탁을…….”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소멸하지 않았다지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까? 넌 이제 겨우 하위권 끄트머리에서 벗어났을 뿐인데, 설마 그걸로 안심하고 있는 거야?”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억울함을 삼키고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위너드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가만히 있다간 그의 잔소리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 어떻게든 빨리 멈추려면,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하는 수밖엔 없었다. 그래, 모든 건 이 남자한테 섣불리 부탁 같은 걸 한 내 업보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은 척 크게 외쳤다.
“내 사전에 안심이란 없어!”
“확실한 거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더 열심히 팔아서 오늘 부족했던 건 만회할게!”
“오늘 것만?”
“아니! 어제도, 그제도! 부진했던 날 전부!”
“후, 좋아.”
비로소 만족했다는 듯 위너드의 눈썹이 반듯하게 펴졌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굳게 다짐했다. ……주인공이 되면 반드시 저 안내자부터 자르겠다고. 아, 그때는 어차피 안내자가 필요 없게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위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까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방금 그 각오를 잊지 않길 바랄게. 안 그래도 지금 주식을 팔 만한 엄청난 호재가 찾아왔으니까.”
“호재라니?”
“곧 알게 될 거야. 그때는 부디 네 능력을 맘껏 펼치길 기대할게.”
엄청난 열변을 듣고 난 뒤라서 그런지, 순간 나도 모르게 귀가 솔깃했다.
“잘해 봐, 로렐라.”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흐트러진 머리를 넘기느라 시선을 잠깐 뗀 사이.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 조이가 눈앞에 있었다.
“안 나가 보실 건가요?”
“어……? 나가다니 어디를?”
“아이참, 숲에 가셨던 분들이 방금 돌아오셨다고 백작가 시종인이 알려 주셨잖아요.”
내가 딴생각에 빠지면 종종 주변 상황을 잊는다는 걸 잘 아는 조이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아, 그랬지. 참.”
그새 시간을 건너뛰었나 보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내 멋대로 빠졌으니, 적어도 돌아왔을 땐 마중을 나가는 게 예의라는 생각에 백작님이 도착하시거든 알려 달라고 미리 부탁했더니, 시종이 잊지 않고 말을 전해 온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복도로 나가 천천히 걸었다. 나름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상상하니 내심 설레기도 했다. 도대체 엄청난 호재라는 게 뭘까. 위너드가 직접 얘기해 준 거니 보통 일은 아닐 텐데. 계단 근처에 도달하니,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생각에 빠져 너무 늦게 걸은 걸까? 다급하게 계단을 반쯤 내려간 그때였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함께 있을 리가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나란히 보인 탓이었다.
“어, 어째서…….”
당황스러운 마음에 떨리는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온 순간. 펠리어트와 레어넌의 고개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로 향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마치 경주라도 하듯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라 왔다.
“잘 쉬었나?”
“잘 지냈나요, 로렐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다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말이 쏟아졌다.
“어쩐지 안색이 창백하군. 혹시 몸이 안 좋은 건 아닌가?”
“저 때문에 괜히 놀라신 것 같아 죄송하군요.”
하지만 내 입은 마치 풀로 붙인 것처럼 딱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잠깐. 설마 주식을 팔 만한 엄청난 호재가, 이걸 말하는 건가?
“흐흣.”
위너드의 말을 떠올린 순간 입에서 작은 신음과도 같은 헛웃음이 흘렀다. 농담이지? ……위너드, 죽을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