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누가 먼저 화살을 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2022.01.15.
대회 날을 앞두자, 셰릴 백작의 저택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펠리어트와 로렐라가 머무는 본채는 물론, 별채에도 뒤늦게 도착한 손님들과 그들의 시종이 짐을 풀었다. 덕분에 셰릴 백작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역대 최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손님이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아직도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서신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콧대 높기로 소문이 자자한 몇몇 가문도 실례인 줄 알지만, 혹시 자리가 남았느냐고 물었다. 계획에 없던 행사까지 억지로 만들어 로렐라와 펠리어트를 초대한 귀족들이 얌전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두 사람을 초대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라며 가문에 소식을 전했고, 그 통에 소문은 바람처럼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니 너나 할 것 없이 사냥 대회에 몰려드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들뜬 기분으로 서신에 답장하고 있던 백작에게, 집사가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통이 하나 들려 있었다.
“백작님,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으응? 전서구라고?”
“네.”
누가 보낸 거지……? 통을 건네받은 백작은 미심쩍다는 듯한 얼굴로 안에 든 편지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흐으읍!”
그리고 곧, 그의 입에서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백작님? 왜 그러십니까?”
집사의 물음에 그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다급히 외쳤다.
“다, 당장 다리에 사람을 보내라. 혹시 벌써 건너셨는지, 아니면 도착하시기 전인지 확인해!”
“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냐고 물으려던 순간, 백작이 다시금 목청을 높였다.
“아니, 그보다 자작 부부에게 별채로 짐을 옮겨 줄 순 없는지 여쭤보고 와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분을 아무 데나 묵게 할 수는 없지.”
이제 와서 짐을 옮겨 방을 바꿔 달라니? 집사는 황당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먼저 온 손님에게 방을 바꿔 달라 말하는 게 얼마나 실례인 일인지, 별채에도 남은 방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모르고 저런 말씀을 하시진 않을 테니까.
“대체 어떤 분이…….”
“만약 안 된다고 한다면 내 방이라도 빼서 드려라!”
오시는 건지……? 집사는 끝끝내 물어볼 수 없었다. 그새 짤막한 답장을 쓴 셰릴 백작이 얼른 전서구에 맡겨 보내라고 집사의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었다. 집무실을 나가기 전 얼핏 본 그의 얼굴에는, 커다란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 * * 아침이 밝자 백작은 흐뭇한 표정으로 1층 홀로 내려왔다. 손님들과 약속한 시간은 아직 좀 남았지만, 도무지 마음이 들떠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펠리어트 공작이 참석한 것만으로도 일대가 떠들썩한데, 레어넌 단장까지 서신을 보내 참석하겠다고 하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이 소식이 알려지면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대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백작의 입이 또다시 헤벌쭉 벌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 이야길 함구하기로 했다. 이럴 때일수록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마치 처음부터 이야기가 오고 갔던 것처럼 의연하게 대처하는 게 더 세간의 부러움을 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약속 시간이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근사한 대회인 줄 알았으면, 진즉에 참가할 걸 그랬습니다.”
대회용 활을 손에 익힐 겸 숲을 미리 둘러보기 위해 모인 것으로, 모두 올해 셰릴 백작의 사냥 대회에 처음 참가하는 사람들이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부정행위를 막고자, 대회가 열리는 숲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올해 처음 참가하는 손님들이 워낙 많아 그들이 미리 숲의 지형을 익힐 수 있게끔 배려하는 차원이었다. 이미 여러 번 참가해서 숲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첫 참가자들은 한없이 불리한 조건에서 대회에 임해야 하니까. 셰릴 백작이 직접 제작한 대회용 활도 마찬가지였다. 자주 써 봐 손에 익은 사람과 처음 만져 보는 사람 간의 격차는 당연히 존재했다. 전례 없는 이목이 쏠린 만큼, 백작은 잡음이나 불만이 나올 만한 구석은 모조리 차단하고자 노력했다. 올해 오신 손님들이 내년에도 참석하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지! 다시 한번 다짐을 불태우고 있는데, 계단 근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몸을 뒤로 돌리니,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보였다. 바로, 펠리어트 공작이었다. 셰릴 백작은 시종들을 이끌고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공작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도 검은색 승마복을 입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다소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차림이었으나, 펠리어트에게만큼은 예외였다. 묵직하고 차분한 검은색은 그의 서늘한 눈빛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날카로운 분위기에 가려져 그렇지, 어두운 의상이 흰 피부와 붉은 입술 역시 돋보이게 했다. 같은 남자가 봐도 우아하고 날렵하며,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저러니 어떤 여자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설령, 전 부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셰릴 백작은 펠리어트가 계단을 절반 정도 내려왔을 때쯤, 2층 계단 입구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 로렐라 메이레드를 발견했다. 공작이 계단을 다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내려올 생각이었나 본데, 뜻대로 되지 못했다. 어느새 기척을 눈치챈 펠리어트 공작이 다시 올라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데이트하기 위해 연인을 데리러 온 신사처럼 설레는 듯한 표정으로.
‘역시나.’
남몰래 관찰하며 알게 된 거지만, 소문과 달리 두 사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펠리어트 공작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다정했다. 로렐라의 앞에선 그린 듯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정말로 표정이 없기로 유명한 북부의 얼음 공작이 맞긴 한 건지, 몇 번이고 목격하고도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이유로 혼인이 없던 일이 됐는진 몰라도, 재결합은 시간문제인 듯싶었다. 아마 그때가 되면 두 사람의 이름 옆에 자신의 이름도 함께 널리 퍼질 것이다. 공작 부부가 다시 이어지게 된 계기는 바로 ‘셰릴 백작의 사냥 대회’였다고! 생각만 해도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동안, 펠리어트와 로렐라가 계단을 다 내려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셰릴 백작 역시 얼른 생각을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준비는 다 마치셨습니까.”
펠리어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다가왔다. 여전히 남들 앞에선 싸늘하기만 한 펠리어트에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지만, 로렐라에겐 달랐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옷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부터, 얘기를 별로 나누지 못해 아쉬운데 차를 함께 들지 않겠냐는 제의까지 온갖 이야기를 꺼내 그녀와 대화를 나누려 했다. 진땀을 빼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로렐라는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셰릴 백작에게 말했다.
“백작님, 생각해 봤는데 오늘 저는 굳이 숲을 둘러보지 않아도 될 듯해요.”
“네? 왜, 왜 그러십니까?”
“좀 부담스럽…… 아, 아니. 실은 제가 진지하게 사냥 대회에 참가할 만할 실력이 못 되어서요. 활을 다루다가 괜히 사고라도 낼까 걱정도 되고요. 다른 분들께 폐만 끼치게 될 거예요.”
그러더니 꾸벅 묵례를 건네곤 뒤를 도는 게 아닌가.
“잠깐.”
셰릴 백작이 입을 떼기도 전에, 펠리어트가 먼저 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그에게도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라는 말을 끝으로 계단을 올라 돌아가 버렸다.
“…….”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펠리어트의 고개가 사람들을 향했다. 그들은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 같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펠리어트 공작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좌중을 쏘아보았다. 마치 너희들 때문에 다 망쳤다는 듯. 그러니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갑자기 살벌해진 분위기에 모두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우리가 뭘…… 잘못한 건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얼음 같은 공기 속에서 있을 순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주최자인 셰릴 백작을 구세주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이 분위기 어떻게 좀 해 봐요! 모임의 호스트는 손님을 지키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소리 없는 구조 신호가 눈빛과 눈빛을 오가며 전해져 왔지만, 백작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옥에서 온 존재처럼 험악한 표정의 펠리어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에게도 상당히 간 떨리는 일이었으니까. * * *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간간이 들리는 것이라고는 말발굽 소리가 전부였다. 천천히 산보하듯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몰던 사람들은 이윽고 숲에 도착했다. 그러자 숲속으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 앞을 지키고 있었던 병사 두 명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여기가 바로 대회가 열리는 숲입니다. 다들 찬찬히 잘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손님들은 말에서 내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기도 하고 주변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사이, 함께 온 시종들은 말의 안장을 급히 손봤다. 혹시 끈이 느슨해지거나 풀어져 버린 곳이 있으면,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아예 말에서 떨어져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무도 빽빽하고 꽤 깊어 보이는 숲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숲속엔 꽤 깊은 늪도 있으니 유의하셔야 합니다.”
백작의 안내가 끝나자 이번엔 시종들이 대회용 활과 화살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사냥 준비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도 한결 풀어졌다.
“아시겠지만 오늘은 설령 짐승을 잡으셔도 점수에는 포함해 드리지 않습니다.”
백작의 너스레에 사람들은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딱 한 사람, 펠리어트 공작만 빼고. 그는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홀로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활시위를 당겨 보고, 활을 꼼꼼히 체크했다. 그 모습을 보던 백작은 저도 모르게 만찬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1등을 노리고 있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보군.’
셰릴 백작은 선대 체임버스 공작과 제법 가까이 지냈다. 덕분에 펠리어트 공작이 어린 시절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활을 잘 다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본인이 저렇게 열의를 불태우니, 어쩌면 올해 우승자는 정말로 그가 될지도 모르겠다. 백작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펠리어트는 등을 쫙 펴고 선 채 활시위를 곧게 당겼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처럼 활이 날아갔다. 이윽고 저 멀리 커다란 나무 끝에서 작고 통통한 누에고치처럼 생긴 푸른색의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전나무 열매였다. 저렇게 멀리서 기껏해야 성인의 새끼손가락 길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열매를 단숨에 맞히다니. 기가 막힌 솜씨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떡 벌렸다. 그때였다. 급히 고삐를 당긴 듯 커다란 말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시종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 저분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본 손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저택의 문지기로부터 행선지를 듣고 급히 따라왔는데, 다행히 늦지 않은 듯합니다.”
말에서 훌쩍 내린 남자의 등허리에서 하나로 곧게 묶은 금발이 찰랑거렸다. 부드러우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다시 안쪽으로 앞서 걸어가던 펠리어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여전히 그는 등을 보이고 있었으나, 뒷모습에선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펠리어트의 근처에 있었던 한 귀족이 묘하게 서늘한 공기에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도, 레어넌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종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주지 않겠나?”
“네, 네!”
화들짝 놀란 시종이 얼른 그에게 활과 화살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레어넌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펠리어트의 곁으로 다가가 옆에 섰다. 조각상처럼 굳어있던 펠리어트의 고개가 흘끗 옆으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휘익! 레어넌의 손을 떠난 화살이, 아까 펠리어트가 겨냥했던 열매보다 훨씬 더 먼 곳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리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열매들이 가지째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네가 여긴 웬일이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연 펠리어트의 목소리는, 귀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갑고 음산했다. 그러나 레어넌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히 대답했다.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게 있어서.”
“너, 할 말과 못 할 말을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르게 되었나 보군.”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가 위협하듯 으르렁댔지만, 레어넌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가 자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딱 하나뿐이야.”
그저 무척이나 온화하게 덧붙일 뿐이었다.
“승패를 가리는 데 있어서 누가 먼저 화살을 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툭 불거진 펠리어트의 목울대가 순간 거칠게 꿈틀거렸다.
“우승을 거머쥐려면, 원하는 목표물을 제대로 맞혀야지.”
그들의 은밀하고도 나지막한 대화는, 뒤에 선 다른 사람들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선가 몰려오는 듯한 한기에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얼기설기 엮인 푸른 신록을 지붕 삼은 숲 안쪽으로, 밝고 따스한 빛이 곧게 스며들고 있는 한가로운 오후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