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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달콤살벌한 휴가 (56/173)

56화. 달콤살벌한 휴가2022.01.12.

누구에게 먼저 대답해야 할지 모를 만큼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초대 제의에 나는 그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까 에이미에게 손님들 대부분은 이 근방 출신 귀족이라고 들은 탓에 더 그랬다. 북쪽 지역 사람들은 무뚝뚝하기로 워낙 유명하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초대하려고 하는 이유도 모르겠다. 내가 아직도 공작 부인이라면 놀랄 만한 일도 아니겠지만, 이젠 그것도 아니니까. 이미 수도까지 우리의 혼인 무효에 대한 이야기가 쫙 퍼졌는데, 펠리어트의 영지 코앞에 살고 있는 귀족들이 그 일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일단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은 한구석에 잠시 집어넣은 채, 가능한 많은 사람과 골고루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열된 경쟁에 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몇몇 사람들에게도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이유야 어찌 됐건 북부 귀족들과도 인맥을 쌓을 좋은 기회니까. 공작가에서 지냈을 때는 오히려 이런 기회가 아예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한편으론 기분이 좀 이상했다. 사람들이 내게 지닌 호감이 어떤 종류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그 호의가 내게 큰 도움과 이득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16550623538511.jpg“온실을 조성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그렇다면 부디 제게 맡겨 주지 않으시겠어요? 온실에 관한 일만큼은 북부의 기술을 따라가는 곳이 드물답니다. 추운 계절이 기니까요.”

케튼 남작 부인의 제의였다. 그녀는 전국에서 제일 아름답고 화려한 온실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16550623538511.jpg“영애께서 투자하신 디저트점에 저희 가문에서 생산하는 아이스 와인을 한 번 보내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건 북부 지역에서만 무려 세 곳의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는 또 다른 귀족의 제안이었다. 깔끔하면서도 진한 당도가 일품인 아이스 와인은 언 포도로 만들어 추운 지역에서만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도 무척이나 비싼 것으로 유명했다.

16550623538522.jpg‘하지만 디저트랑 아주 궁합이 좋지.’

꼭 취급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의 제안을 자세히 듣고는 내 귀를 의심했다. 놀랄 만큼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위해 일부러 가격을 낮춰 줬다는 사실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꼭 이득을 볼 만한 일이 아니더라도 대화는 즐거웠고 어느 면으로는 유익하기까지 했다. 와인 잔을 가득 채운 붉은 액체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화젯거리는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쾌하면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분위기를 따라 기분도 점점 더 좋아졌다. 그러는 동안 펠리어트는 내 곁에서 조용히 대화를 경청했다.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처음 응접실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그 어떤 것에도 관심 없는 듯한 무감한 표정이었는데,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사람들이 용기를 내 그에게도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짧게 툭툭 대답하는 무심한 어투는 여전했지만, 적어도 사람을 무시하거나 대놓고 인상을 쓰는 일은 없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느라 에너지를 많이 쓴 탓인지 순간 배에서 아주 작게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혹시 바로 옆에 있는 펠리어트에게도 들렸을까 봐 당황하던 찰나, 입구에서 만찬이 준비되었다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623538511.jpg“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자, 어서들 가시죠!”

셰릴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 앞장섰다. 사람들은 저마다 들뜬 얼굴로 뒤를 따랐고, 나 역시 곁에서 보폭을 맞추는 펠리어트와 함께 복도를 지나 만찬장에 들어섰다. 길게 이어 붙인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접시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세상에, 고기다. 고기 파티다! 물론 내 저택에서도 고기 요리는 자주 나오지만, 이렇게 테이블 끝에서 끝까지 온통 고기로만 가득 채워진 것은 정말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차곡차곡 올려진 스테이크와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커다란 칠면조, 양 갈비와 튀긴 닭 등이 여기저기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저 가운데에 있는 건 뭐지? 설마 돼, 돼지 통구이인가!? 어찌나 먹음직스러운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하게 됐다.

16550623538511.jpg“역시 백작님께서는 배포가 크십니다.”

16550623538511.jpg“저는 이걸 위해 매년 사냥 대회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감탄하다 못해 경악한 나와 달리 귀족들은 평온한 얼굴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테이블 주변에 모여들었다. 대수롭지 않은 농담에도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지는 걸 보니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라는 말은 역시 진리인 게 틀림없다.

16550623538511.jpg“부디 마음껏 즐겨 주십시오. 사냥도 무척이나 체력을 요하는 일이니까요.”

백작은 연신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었다. 아까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건데, 셰릴 백작이 매년 이런 행사를 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엄청난 상금을 건 것도 모자라 참가 손님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많은 유해 동물을 잡아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영지의 작물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동물들이 농작물을 전부 망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해지자 임시방편으로 근방의 귀족들이 힘을 모아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 대회의 시작이라고도 했다. 백작은 담담히 이야기하면서도 펠리어트를 힐끔 보며 자신의 영지에도 공작님처럼 기사단이 있더라면, 하고 부러워했다. 펠리어트의 영지에도 공작저에서도 보일 만큼 커다란 숲이 있었다. 그곳에 서식하는 짐승들의 개체 수를 조절하는 일도 기사단의 업무인 듯했다. 하긴 기사단을 운영하는 비용에 비하면 3천 골드는 새 발의 피 수준이다. 그러니 셰릴 백작은 오히려 싼 값에 숲을 관리하는 셈……. 잠깐. 순간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가장 원론적인 의문에 사로잡혔다. ……펠리어트는 대체 여기에 왜 온 거지? 사냥이 취미라면 훨씬 더 큰 자신의 숲에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었다는 것도 사교 모임을 질색하는 그에겐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남는 건 3천 골드라는 상금뿐인데, 내게는 어마어마한 금액일지라도, 펠리어트에겐 푼돈으로 느껴질 게 분명했다. 심지어 그마저도 다섯 가지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내게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사냥 대회에 왜 온 거냐는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이 떠올랐다.

16550623538542.jpg‘반드시 와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내가 도착하자 백작보다도 먼저 문을 박차고 나와 들뜬 아이처럼 눈을 빛내던 얼굴도,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겠다는 듯 나를 번쩍 안아 들고 개울을 건넌 것도 차례차례 생각났다. 혹시 펠리어트가 설마…….

16550623538522.jpg‘아니야. 아니겠지.’

나는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미쳤구나, 로렐라 메이레드. 레어넌과의 일 이후로 머리가 온통 핑크빛으로 가득한가 본데, 정신 차려!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펠리어트라고! 반드시 내 발로 돌아오게 만들겠다는 오만한 선전 포고를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는 데다가, 차디찬 눈빛으로 오빠를 벽에 던져 버린 바로 그 펠리어트! 나는 황급히 테이블 모서리 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라도 고개를 돌렸다가 지금 옆에 서 있는, 흑표범 같은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무척이나 허둥댈 것 같았다. 주변은 왁자지껄한데, 곁에서 조용히 내쉬는 숨소리가 무엇보다도 크게 들려왔다. 다시 한번 입술을 꾹 깨문 채 얼굴로 몰린 열기를 어떻게든 몰아내려 애쓰던 때였다.

16550623538511.jpg“어서 앉으시지요, 로렐라 님.”

어느새 곁에 다가온 셰릴 백작이 말했다. 그가 눈짓하자, 뒤에 서 있던 하인들이 잽싸게 두 개의 의자를 빼냈다. 테이블 정중앙에 나란히 붙어 있는 두 자리였다. 내가 정신을 빼놓은 사이,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착석한 뒤였다.

16550623538522.jpg“아, 아니. 여긴…….”

저런 중앙 자리는 모임의 호스트가 앉는 자리 아니냐고 물으려는데, 테이블 반대로 돌아간 셰릴 백작이 시종이 의자를 뺀 자리 건너편에 섰다.

16550623538542.jpg“어서 앉지.”

나와는 달리 느긋한 태도로 자리에 앉은 펠리어트가 입술을 뗐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주춤거리자, 그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16550623538542.jpg“두 번째 부탁이니까.”

그 말에 나는 결국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반짝반짝 닦인 은식기 위로 빨간 사과처럼 익은 얼굴이 보였다.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작게 썰어 입에 넣은 고기를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그대로 꿀꺽 삼켜 버렸다. 한 입 먹기가 무섭게 펠리어트가 긴 팔을 우아하게 뻗어, 멀리 있던 고기를 손수 덜어 준 탓이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있던 손이 그대로 굳었다. 보는 눈도 많은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16550623538522.jpg“흡.”

결국 작은 조각이 목에 걸리고 만 나는, 물을 황급히 들이켰다. 그러자 비워졌던 만큼 물 잔이 다시 채워졌다. 이번에도 하인이 아니라, 펠리어트가 채워 준 것이었다. 나는 황당한 마음을 담아 옆을 쳐다보았다. 평생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물 한잔 직접 따랐을 리 만무한 커다란 손이 투명한 유리 포트를 쥐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고 있는데, 펠리어트가 엷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16550623538542.jpg“꼭 그때 같군.”

16550623538522.jpg“그때라니……?”

16550623538542.jpg“식을 올린 직후, 피로연을 열었을 때 말이야.”

냇가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복기하는 듯한 기분이다. 달라진 건 시간이 약간 더 흘렀다는 것뿐이었다. 과거도, 현재도.

16550623538522.jpg“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피로연이 그렇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땐 사이좋게 음식을 덜어주긴커녕, 서로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고! 순간 우리를 줄곧 훔쳐보고 있는 손님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0623538522.jpg“그때랑 똑같은 건 딱 하나뿐이야.”

16550623538542.jpg“그게 뭐지?”

16550623538522.jpg“……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

그러니 제발 그만두라는 뜻으로 말한 건데, 펠리어트는 그저 작게 소리 내어 웃을 뿐이었다. 희한한 광경을 다 본다는 듯 경악으로 그득했던 사람들의 눈빛도 어느새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설레하는 듯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스러운 한 쌍의 연인을 바라보는 듯 흡족한 기색이었다. 결국 나는 고개만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 * * 제국을 지키는 눈이라 불리는 커다란 하얀색 건물은 오늘따라 유독 늦은 시각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엔 제법 후덥지근한 기운이 묻어났다. 그 때문일까. 답답함을 느낀 남자는 목을 반듯하게 감싸던 하얀 깃을 조금 벌렸다. 가슴속에 장작을 집어넣은 듯 열기가 맴돌고, 차가운 물을 몇 잔씩이나 들이켰는데도 계속 목이 말랐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벌써 이렇게 뜨거우니, 여름에 들어서면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 들었다. 아니, 날씨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이렇게 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는 걸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마호가니 문 바깥에서 절도 있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16550623598281.jpg“들어오도록.”

그는 바로 대답한 것도 모자라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책상 앞까지 단숨에 도달한 기사가 한 손으로는 검을 쥐고 반대 손으로는 각 잡힌 거수경례를 했다. 익숙한 인사를 받으며 남자는 일으켰던 몸을 다시 의자에 붙였다.

16550623538511.jpg“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복귀가 늦어져 죄송합니다, 단장님.”

16550623598281.jpg“아니, 괜찮다.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한두 개가 아니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말과는 달리 책상에 높은 탑처럼 쌓인 서류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단 한 장도 넘겨 보지 못한 티가 역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 점 구김 없이 단정한 평소와 달리 그의 복장은 무척이나 느슨해져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제 상관의 초조한 마음을 모두 읽어 낸 기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북부의 귀족과 결혼한 여동생을 만나고 복귀하려던 찰나, 레어넌 단장의 전갈을 받았다. 내용을 보고 다소 놀랐으나, 기사는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16550623538511.jpg“그럼 보고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레어넌은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천천히 턱을 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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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는 사냥 대회에 참석한다며 셰릴 백작저에 가 있는 동생 부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했다. 복귀가 며칠 늦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계획대로라면 동생 부부가 저택을 떠날 때 그도 기사단에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그 직전에 레어넌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었다.

16550623598281.jpg“……그래, 알겠군.”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레어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16550623598281.jpg“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부탁해 미안하네.”

16550623538511.jpg“아닙니다, 단장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부디 언제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기사는 힘주어 대답했다. 그에게 이런 건 부탁 축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진심이었다. 모든 단원이 그러하듯 레어넌을 향한 충성심이 강한 그는, 자신의 상사가 저를 믿고 이런 일을 맡겨 준 데에 일종의 자부심마저 느꼈다. 고맙다는 말을 덧붙인 레어넌이 가볍게 턱짓했다. 이만 물러가라는 신호였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경례를 붙인 기사가 조심스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16550623598281.jpg“…….”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집무실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숨 막힐 듯 고요한 침묵 속에서 레어넌은 다시 한번 고민을 이어 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굳게 닫았다. 아무런 소리조차 나지 않았을 정도로 차분한 동작이었지만, 손에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가 손등 위로 굵고 남자다운 힘줄이 툭 불거져 있었다. 너무 막무가내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도 자신의 행동을 관철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부터 그가 할 행동을 예의 없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요한 가운데 종이가 사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마저 처리해야 할 보고서를 급히 써 내려가는 펜촉 소리만이 그의 주변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희뿌옇게 터 오는 여명이 집무실을 밝혔다.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 위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부 바뀌어 있었다. 작업을 모두 끝낸 레어넌은 마지막으로 급히 써 내려간 서신 한 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무실 밖으로 나가니, 기사단 내부를 지키던 병사가 인사를 건넸다.

16550623538511.jpg“좋은 아침입니다, 단장님.”

레어넌은 가볍게 인사를 받은 후 그에게 다가가 서신을 내밀었다.

16550623598281.jpg“스코어트 백작저로. 팔콘에 묶어서.”

16550623538511.jpg“예, 알겠습니다.”

병사는 대답 후 머릿속에서 명령받은 내용을 빠르게 정리했다. 팔콘은 기사단에서 기르는 전서구 중 가장 빠른 새였다. 그리고 스코어트 백작저는…….

16550623538511.jpg“죄송합니다, 단장님. 성함을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십시오.”

16550623598281.jpg“셰릴 스코어트 백작.”

16550623538511.jpg“감사합니다!”

좋아, 똑똑히 확인했으니 단장님이 직접 맡겨 주신 일에 실수를 저지르는 불상사는 없을 것이다. 비로소 안심한 병사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지나쳐 가는 레어넌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16550623538511.jpg“전서구가 돌아오는 대로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16550623598281.jpg“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관저에 없을 테니까.”

16550623538511.jpg“네? 어, 어디 가십니까?”

어느새 복도 끝까지 걸어간 레어넌은, 마지막 말만을 남긴 채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16550623598281.jpg“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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