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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그녀를 잡아요 (55/173)

55화. 그녀를 잡아요2022.01.08.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홀에는 제법 사람이 있었다. 셰릴 백작은 중앙에서 하인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고 현관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조이가 먼저 달려왔다.

16550623318178.jpg“아가씨……!”

16550623318178.jpg“로렐라 님, 잘 다녀오셨어요?”

16550623318178.jpg“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16550623318178.jpg“해가 져서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에이미와 펠리어트의 시종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아무래도 홀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떠들썩한 소리에 셰릴 백작의 고개도 이쪽을 향했다.

16550623318178.jpg“아, 두 분 오셨습니까?”

그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활짝 머금고 다가왔다.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흐뭇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음흉해 보이기도 한…….

16550623318178.jpg“공작님, 옷이 왜 이렇게 흠뻑 젖으셨습니까?”

그때 뒤에 서 있던 펠리어트의 시종이 놀란 듯 외쳤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펠리어트에게로 향했다. 셰릴 백작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16550623318178.jpg“뜨거운 물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시종 중 한 사람이 허리를 크게 굽히더니 얼른 자리를 떴다. 주변은 요란한데도 펠리어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이었다.

16550623318178.jpg“이러다 감기 드시겠습니다, 공작님. 어서 옷을 갈아입으시죠.”

남은 시종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그를 재촉했다. 근심으로 가득한 얼굴에서 그의 충성심을 엿볼 수 있었다. 시종의 말에 낮게 한숨을 쉰 펠리어트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16550623318214.jpg“미안하지만 먼저 실례해도 괜찮겠나.”

모두의 앞에서 내게 정중히 양해를 구하는 모습에 어쩐지 쑥스러웠다.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등을 잠시 바라보던 셰릴 백작이 내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헛기침하며 말문을 열었다.

16550623318178.jpg“흠흠. 산책은 즐거우셨나요? 공작님께서 젖으신 걸 보니, 냇가 쪽에 다녀오셨나 봅니다.”

그의 눈은 왜인지 유달리 반짝이고 있었다. 백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에이미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16550623318178.jpg“어머, 알려 드리지도 않았는데 잘 다녀오셨네요. 그 주변이 산책하기엔 가장 좋거든요.”

16550623318178.jpg“으음. 호젓하면서도 분위기가 참 좋은 곳이지.”

16550623318178.jpg“네에, 반짝이는 수면 위로 조약돌도 던지고요.”

16550623318178.jpg“크으, 그런 낭만적인…….”

잠깐만, 대화 주제가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는 없던 나는, 죽이 척척 맞아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16550623348547.jpg“활쏘기 연습을 했던 건데요!”

16550623318178.jpg“……예?”

16550623348547.jpg“실은 제가 사냥을 해 본 적이 없어서요.”

잠깐의 침묵 뒤. 백작의 고개가 목각 인형처럼 앞뒤로 뻣뻣하게 움직였다.

16550623318178.jpg“아아. 그렇습니까.”

말투는 마치 교과서를 읽는 듯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에이미 역시 말없이 미소 지으며 코끝을 긁적거릴 뿐이었다. 다 알고 있는데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묘한 웃음이었다. 아오, 미치고 팔짝 뛰겠네! 나는 정말이지, 가슴이라도 두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불리해지고, 그렇다고 입을 다물어 버리자니 정말 데이트를 하고 왔다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알 리 없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백작은 싱글벙글한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16550623318178.jpg“나가 계시는 새 많은 손님이 도착하셨답니다. 모두 로렐라 님을 뵙길 무척이나 고대하고 계시지요. 괜찮다면 만찬 때 부디 참석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16550623348547.jpg“네, 네에.”

16550623318178.jpg“그럼 준비되는 대로 시종을 통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돌연 결연하게 빛났다.

16550623318178.jpg“계시는 동안 아무 불편함 없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 앗, 아니. 로렐라 님.”

셰릴 백작은 말을 마치고는 내게 깍듯하고 정중한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렸다.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16550623348547.jpg“공……?”

공, 그다음은 뭔데!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데! 변명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거리며 애타게 손을 뻗었지만, 백작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조이와 에이미의 도움을 받아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16550623318178.jpg‘나가 계시는 새 많은 손님이 도착하셨답니다. 모두 로렐라 님을 뵙길 무척이나 고대하고 계시지요.’

  백작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모두 나를 보길 고대하고 있다고? 참석자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일 텐데? 그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일 게 뻔했다. 펠리어트와 나의 이야기는 이제 귀족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가 몹시 유명인사가 된 탓이었다. 그런 우리가 나란히 사냥 대회에 참가했으니, 이에 대해 떠들어 댈 사람이 있을 거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에 단둘이 밖에 나갔다 오기까지 했으니……. 설마, 벌써 이상한 소문 쫙 퍼진 거 아니야? 이렇게 빨리 손님들이 속속 도착할 줄 알았더라면 오래 자리를 비우지 않았을 텐데. 타이밍도 참 얄궂다, 얄궂어. 치장을 전부 마친 나는, 전쟁터에라도 가는 듯한 마음으로 에이미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1층으로 내려와 복도를 잠시 걸으니, 문이 활짝 열린 연회장이 보였다. 문이 워낙 커 안쪽까지 훤히 보였다. 이미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자유롭게 서서 식전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시선이 전부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얼굴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평소처럼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는, 주위에서 끊임없이 말을 거는데도 대답은커녕 관심 없다는 듯 무감한 표정이었다. 와인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살짝 움직일 때마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린 흑발이 반듯한 이마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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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관찰하던 시선을 거두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16550623318214.jpg“왔군.”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푹신한 카펫이라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걸까. 펠리어트는 높은 테이블 위에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내게로 다가왔다. 그의 등 뒤로 수많은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던 찰나, 펠리어트가 물었다.

16550623318214.jpg“와인 한잔하겠나?”

그래, 술. 일단 술이라도 마셔야겠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곧바로 시종이 내게 크고 둥근 와인글라스를 건네주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셰릴 백작이 우쭐한 눈빛으로 나와 펠리어트를 바라보더니 뿌듯하다는 듯이 외쳤다.

16550623318178.jpg“여러분, 이번 사냥 대회에 처음 참가해 주신 로렐라 메이레드 님입니다. 인사들 나누시지요.”

마치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이 우르르 내 곁으로 몰려들었다.

16550623318178.jpg“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어요, 로렐라 님. 저는 드웨인 백작가의 차녀, 엘린 드웨인이라고 합니다. 저희 고모님께서 황궁 무도회 때 로렐라 님과 인사를 나눴다고 하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16550623318178.jpg“저도 인사드립니다. 게일 가문의 가주, 아드리안 게일이라고 합니다.”

16550623318178.jpg“로렐라 님, 드디어 만나 뵈었군요! 저는 카멜리아 케튼이에요. 제 남편인 케튼 남작은 일이 바쁜 관계로 함께 오지 못했지만, 조만간 함께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다들 앞다투어 자기소개를 쏟아 놓는 통에, 나는 고작 이렇게 화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16550623348547.jpg“……저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자가 얼른 말을 받았다.

16550623318178.jpg“펠리어트 공작님과 세그마 지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저희 가문이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있는 곳이지요. 로렐라 님은 혹시 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신을 아드리안 게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였다. 세그마?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16550623348547.jpg“아뇨, 가 본 적은 없어요.”

16550623318178.jpg“커다란 산과 호수가 맞닿아 있어 무척 아름다운 곳이지요. 낙농업이 크게 자리 잡아, 황실에도 납품할 정도로 맛이 좋은 치즈로 유명합니다. 언제 한번 꼭 오시지요. 제가 극진히 대접하겠습니다.”

16550623348547.jpg“아.”

나는 그제야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해 냈다.

16550623348547.jpg“세그마에는 아주 유명한 치즈 타르트점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시나요?”

16550623318178.jpg“물론입니다. 황궁 출신 제빵사가 운영하고 있지요. 얼마나 인기가 많은 지 3개월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구경조차 할 수 없답니다.”

16550623348547.jpg“와, 그 정도인가요?”

레아에게 귀가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라 잊을 수가 없었다. 죽기 전 꼭 가 봐야 할 디저트 전문점으로 꼽히는 곳인데, 우리도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며 그녀가 줄곧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16550623318178.jpg“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사람을 시켜 보내 드릴까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귀가 쫑긋해졌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16550623348547.jpg“어머, 그래 주실 수 있나요?”

16550623318178.jpg“물론입니다. 저희 가문과도 연이 있는 곳이거든요. 금방 구해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50623318178.jpg“곧 저희 가문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 만찬을 기획하고 있는데, 로렐라 님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디저트 코스에 그곳 타르트를 준비해 올릴 예정입니다.”

타르트는 레아에게 선물로 보내 줄 생각이었는데 나도 맛볼 기회가 있다니,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좀처럼 다른 지역에 가기가 힘든데, 여행하는 기분을 내기에도 좋을 것 같았고.

16550623348547.jpg“기꺼이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나는 순수한 감사를 담아 미소 지어 답했다. 그러자 남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16550623318178.jpg“제가 더 감사드릴 일이지요!”

……그렇게까지 고마울 만한 일인가? * * * 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로렐라와 아드리안 남작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초대를 수락하자마자 남작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로렐라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새, 아드리안 남작은 슬그머니 펠리어트 공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16550623318178.jpg“공작님, 괜찮으시다면…….”

그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50623318178.jpg“공작님께도 만찬회 초대장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16550623318214.jpg“…….”

펠리어트는 서늘한 눈으로 남작을 쏘아보듯 바라보았다. 베일 듯이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아무런 말이 없는데도 중압감에 몸이 짓눌리는 듯했다. 아드리안 남작은 깊이 후회했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식은땀까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지금이라도 말을 얼버무려야 할지, 아니면 뻔뻔하게 밀고 나가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6550623318214.jpg“시간이 되면 참석하도록 하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입에서 긍정의 답이 나온 것이다. 체임버스 공작가의 영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셰릴 백작의 사냥 대회에도 이번이 처음 참가하는 것일 정도로 사교계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그가, 제법 멀리 떨어진 세그마에서 열리는 남작의 만찬에 참가하겠다고 답하다니. 내심 숨을 죽인 채 대화를 엿듣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 저마다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어라, 이게 정말…… 되네? 셰릴 백작은 올해 사냥 대회에 펠리어트 공작이 참가한다는 소문이 주위에 퍼지면서, 작년과 비교해 몇 배나 더 많은 참가 신청서가 쇄도했다고 귀가 따갑도록 자랑을 해 댔다. 거기에, 공작이 참가한 이유가 로렐라 메이레드 때문인 거 같다고도 은밀히 덧붙였다.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눈치껏 자리를 비워 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단둘이서 데이트를 나갔다나 뭐라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두 사람은 그 떠들썩한 혼인 무효 사건의 주인공들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전쟁 영웅으로 황실에서 큰 상까지 받은 펠리어트 공작이 자신들이 여는 모임에 참가 해주기만 해도, 사교계에서의 위상은 말도 못 하게 올라갈 테니까.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워낙 차갑고 냉정한 데다가, 사교 모임 따위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남자 아니던가. 심지어 펠리어트 공작이 진짜로 사냥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조차 지금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야 실감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아드리안 남작과의 대화로 확실해졌다.

16550623435997.jpg‘로렐라 메이레드가 움직이면, 펠리어트 공작도 움직이는구나!’

전 부인이 가는 곳에 왜 함께하려는 건지, 혼인 무효가 됐다더니 대체 어떤 관계인지, 백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데이트를 했다는 게 정말 사실인지 궁금한 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먼저 로렐라 메이레드의 마음을 잡느냐는 거다. 말을 꺼내는 타이밍이 늦으면 늦을수록, 내 차례도 뒤로 밀리고 만다고! 결심을 마친 귀족들은 저마다 눈을 빛내며 경쟁적으로 말을 뱉어 냈다.

16550623318178.jpg“로렐라 님, 케튼가에 한 번 들러 주시지 않겠어요? 남편이 손수 지은 별채가 막 완공된 참인데, 그곳에 제일 먼저 초대하고 싶군요.”

16550623318178.jpg“제 여름 별장에서 진귀하다는 하얀 망아지가 태어났는데, 아주 귀엽답니다. 보러 오지 않으시겠어요? 승마도 마음껏 즐기실 수 있어요!”

16550623318178.jpg“혹시 오페라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제가 처음으로 작사한 곡이 등장하는데, 꼭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저마다 사연이 있는 아우성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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