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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다섯 가지 부탁 (54/173)

54화. 다섯 가지 부탁2022.01.05.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다정광공에 미쳐 30,000주를 구매합니다.」 「키스해! 짝! 키스해! 짝! 키스해! 짝! 키스해! 짝!」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봤는데도 키스하라는 주접 메시지에는 좀처럼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얼굴만 좀 가까웠다 하면 등장하니, 안 그래도 민망한 상황인데 더욱 얼굴이 붉어지게 했다. 펠리어트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징검다리를 건넜다. 물살이 제법 거셌는데도 휘청거리는 일도 없었다. 건너편 기슭에 닿고 나서야 그는 나를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펠리어트의 검은색 승마 재킷 아래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몇 발자국 더 걸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화살을 주워들었다. 재킷과 마찬가지로 다 젖어 버린 검은 바지가 탄탄한 허벅지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여 무척이나…….

16550623099855.jpg‘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착한 생각! 바른 생각! 전체 연령가 생각!

16550623099859.jpg“왜 그러지? 뭐가 있나?”

16550623099855.jpg“아, 아무것도 아니야.”

얼버무린 반응에도 펠리어트는 의아하다는 듯 내 시선 끝이 머물렀던 곳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결국 별말 없이 다가와 화살통에 마지막 화살을 넣어 주었다. 나 역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16550623099859.jpg“다 젖어 버렸는데, 춥지는 않아?”

16550623099855.jpg“아니.”

짧고 무뚝뚝하게 들릴 만한 대답이었지만 그의 입술 끝은 위를 향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뭔가 의기양양한 듯 보여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16550623099855.jpg“이건 내 발로 넘어 온 거 아니야!”

16550623099859.jpg“뭐, 그렇다고 해 두지.”

펠리어트가 또다시 웃었다.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언제나 싸늘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던 그가, 나를 보고 이렇게 아름답게 미소 짓게 된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펠리어트는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재킷을 벗어 들었다. 그러고는 젖지 않은 쪽을 앞으로 해서 나무 밑 잔디에 풀썩 깔더니, 정작 자신은 그 옆의 맨땅에 앉았다.

16550623099859.jpg“괜찮으면 잠깐 앉지 그래.”

대수롭지 않은 듯 나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에 나는 홀린 듯이 다가가 그가 깔아 준 재킷 위에 살포시 앉았다. 우리는 둘 다 말없이 눈앞의 풍경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인기척도, 말소리도 없이 저 멀리서 지저귀는 산새 소리와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맑은 물소리만 가득했다. 녹음이 무성한 숲의 청량한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니 긴장은 물론, 머릿속의 고민이나 불안마저도 전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문득, 펠리어트는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턱을 괸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흑단같이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에서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우수에 찬 듯 그윽한 눈망울과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콧날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솔직히 온종일 바라보라고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외모였다. 예전에는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숨이 막혔는데, 이제는 아무런 말 없이 앉아 있어도 그저 편안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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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펠리어트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라서 어깨가 위로 화들짝 솟구치고 말았다.

16550623099855.jpg“……왜?”

계속 보고 있던 걸 들키진 않았을까?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모른 척하며 태연하게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그는 나를 계속 응시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뜻 모를 말을 던졌다.

16550623099859.jpg“얼굴은 굳은 채 입만 웃고 있는 모습이 꼭 그때 같군.”

16550623099855.jpg“그때라니? 언제?”

16550623099859.jpg“내가 당신을 처음 본 날.”

민망함을 감출 좋은 기회라 얼른 대답했지만, 나는 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펠리어트와 언제부터 알고 지냈는지, 혹시 결혼 전부터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닌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16550623099855.jpg“처음…… 본 날?”

어쩌면 내가 빙의하기 전, 로렐라와 그는 이미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섣불리 대꾸할 수 없었다.

16550623099859.jpg“우리의 결혼식 말이야.”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16550623099859.jpg“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도, 나와 눈만 마주치면 억지로 웃었었지.”

그 말에 나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내 모습과 그런 나를 둘러싼 낯선 사람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주위 풍경.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은 곧 남편이 될 그가 북부를 다스리는 공작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잔혹하고 냉정하며 폭군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하는 그 단어. 식장에서 처음 마주한 남자는 웃는 법도 모르는지 무표정했고, 소설 속 묘사처럼 정말 마주하기만 해도 얼어붙을 정도로 싸늘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웃어 보였다. 어쩌면 이 낯선 곳에서 유일하게 의지가 될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물론…… 펠리어트는 곧장 전쟁터로 떠나 버렸지만. 가만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살며시 입술을 열었다.

16550623099855.jpg“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16550623099859.jpg“뭐든지.”

16550623099855.jpg“왜…… 혼담을 받아들였던 거야?”

줄곧 궁금했지만,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이야기. 그래서일까. 펠리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보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16550623099855.jpg“당신이라면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잖아. 공작가에 비하면 메이레드 백작가는 아무런 힘도, 권세도 없는 초라한 가문일 뿐인데.”

공작가에 있는 2년 내내 그의 어머니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 모를 리 없는 사실이었다. 내게 그토록 불만이 있는 엠마가 조용히 결혼을 허락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었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펠리어트가 밀어붙였거나 아니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던 다른 이유가 있었거나.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앞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16550623099859.jpg“황실에서 주선한 혼담을 거역할 수는 없지. 당신도 잘 알잖아.”

16550623099855.jpg“아, 그렇지. 황실…….”

16550623099859.jpg“선대 메이레드 백작은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 그가 죽고 위태로운 백작가를 가만둘 수 없으셨겠지.”

선대 백작이 황실 인력이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도 뒤를 따르는 바람에 내게 남은 가족은 오빠뿐이라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었으니까. 티는 내지 않았으나 적잖이 놀랐다. 지금의 메이레드 가문은 황실에 부름을 받긴커녕 알현실에 자리도 하나 얻지 못하는 처지다. 가세가 얼마나 기울었는지 알 수 있었다. 뭐, 인간 말종에 가까웠던 오빠를 떠올려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16550623099855.jpg“그래, 당신도 어쩔 수 없었던 거구나…….”

하지만 덕분에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던 건, 펠리어트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펠리어트는 다시 나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16550623099859.jpg“아니.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니라,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거야.”

검은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에서 좀처럼 도망갈 수가 없었다.

16550623099859.jpg“내게 혼담이란 그저, 어차피 해야 할 의무와도 같았어. 누구와 결혼하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 출정을 앞두고 있는데도 혼인을 감행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는데…….”

아무런 고저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 하지만 담고 있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았다.

16550623099859.jpg“식이 진행되는 내내 억지로 웃는 게 틀림없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더군. 한 달, 아니 단 일주일만이라도 좋으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드물게 많은 말을 이어 나가는 그와 달리, 나는 마치 입이 붙은 것처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16550623099859.jpg“믿기 어렵겠지. 얼굴 한 번 본 게 전부인 아내에게 하루가 멀다고 서신을 보낼 때, 나도 나를 믿기 어려웠으니까.”

펠리어트의 말은 이게 전부였다. 우리의 대화는 그 후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귓가를 적시듯 흐르는 물소리에 작은 자갈들이 구르는 소리가 간간이 섞여 정적을 채웠다. * * *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시간이 되었다. 한층 쌀쌀해진 바람에 펠리어트의 옷은 마르긴커녕 더욱 차갑게 식어 버린 듯했다. 하지만 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내 손끝, 발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다시 건너편 기슭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16550623099855.jpg“이런 실력이라면 역시 대회는 포기해야겠지?”

16550623099859.jpg“그러는 게 좋겠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말하는 것이 그다웠다. 나는 부러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16550623099855.jpg“아깝다. 3천 골드를 받을 수도 있었는데…….”

사냥 대회 우승자에게 주어진 상금은 자그마치 3천 골드였다. 누구나 눈에 번쩍 뜨일 만한 금액이었지만, 내겐 당연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돈이었다. 그냥 장난삼아 웃으라고 한 이야기였는데, 왜인지 그는 웃기는커녕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내가 먼저 말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뒤에야 비로소 안장 위로 오른 펠리어트는 길을 안내하듯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계속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곧, 곁으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16550623099859.jpg“내가 받아 주지, 그 상금.”

16550623099855.jpg“뭐?”

16550623099859.jpg“내가 받아서, 주겠다고.”

설마…… 대회에서 1등을 하겠다고? 모르긴 몰라도 셰릴 백작의 사냥 대회는 사냥을 취미로 삼고 있는 수많은 귀족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하다고 들었다. 내로라하는 사냥꾼들이 전부 참가할 정도로. 그 사이에서 정말로 펠리어트가 우승할 수 있을까? 사냥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터무니없는 선전포고나 허세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내가 제대로 못 맞추긴 했지만, 그는 아주 꼼꼼히 가르쳐 주었으니 본인도 제법 잘 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전장에서 무려 2년간 지낸 경험이 있지 않은가. 마물을 사냥하는 것에 비교하면 일반 멧돼지를 잡는 건 쉬운 일일 거다.

16550623099859.jpg“대신 조건이 있어.”

정말 가능할까 싶으면서도, 엄청난 결단을 내린 사람처럼 진지하게 눈을 빛내는 걸 보니,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16550623099855.jpg“뭐, 뭔데?”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0623099859.jpg“당신이 내 부탁 다섯 가지를 들어준다면 상금은 기꺼이 주지.”

……다섯 가지의 부탁? 많지는 않지만, 아예 적다고도 할 수는 없는 개수였다. 레아 덕분에 재정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3천 골드는 내게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펠리어트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순 없는데. 뭘 시킬지 모르잖아. 나는 순간 엄청난 고민에 사로잡혔다. 머릿속이 뱅뱅 도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16550623099859.jpg“어려운 건 아니니 걱정 마.”

골몰하는 티가 역력했는지, 펠리어트가 담백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16550623099859.jpg“가장 큰 부탁이라고 해 봤자, 함께 식사하자는 것 정도니까.”

16550623099855.jpg“그……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머지 것들은 딱히 부탁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될 만큼 간단한 거 아닌가? 슬쩍 그를 바라보니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감한 표정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나중에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말을 바꿀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 정도는 있었다. 어차피 강제할 수는 없을 테니 영 아니다 싶으면 나도 발뺌하지, 뭐.

16550623099855.jpg“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재빨리 덧붙였다.

16550623099855.jpg“대신 들어줄 수 없다고 판단되면 즉시 거절할 거야.”

16550623099859.jpg“물론.”

즉답과 함께 우리의 거래는 바로 성사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훨씬 유리한 조건인데, 그의 입가에는 보기 드물게 깊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 * * 셰릴 백작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둠이 짙게 내린 뒤였다. 길의 양옆으로는 불을 밝힌 램프들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16550623215871.jpg“이제 오십니까?”

문지기가 어둠 속에서도 엉망으로 젖은 펠리어트의 차림새를 용케 알아보고 깜짝 놀라 시종을 불러오겠다고 했지만, 펠리어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조용히 말을 몰던 우리는 얼마 안 가 현관 앞에 도착했다. 근처에는 나올 때만 해도 보지 못했던 호화로운 마차들이 여러 대 줄지어 서 있었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텅 비어 있는 마차 안을 보니, 문득 나를 기다리고 있을 조이가 떠올랐다. 미리 어디에 가는지 얘기는 해 두었지만, 꽤 시간이 지났으니 걱정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얼른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급해졌다. 얼른 말을 멈춰 세우고 안장 밑에 달린 등자를 딛고 내려서려던 그때.

16550623099859.jpg“잠깐.”

날 제지한 펠리어트가 먼저 말에서 훌쩍 내렸다. 그리고 곁으로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16550623099859.jpg“첫 번째 부탁을 말하지.”

벌써? 나는 다소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6550623099859.jpg“내가 내려 주고 싶어.”

정말이지 간단한, 그래서 오히려 이상한 요구였다. 아까도 말에서 내릴 때 그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와 부탁까지 한다고? 굳이? 이유가 뭘까? 알쏭달쏭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이었다. 나는 말 없이 내민 손을 잡았다.

16550623099855.jpg“앗.”

말에서 내려오기 직전에, 갑자기 두 발이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가 양팔로 등과 무릎 아래쪽을 단단히 받쳐 안아 올린 것이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펠리어트는 그대로 현관 앞의 계단을 오른 뒤에야 나를 문 앞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16550623099855.jpg“이게 부탁이야?”

16550623099859.jpg“그래.”

16550623099855.jpg“그럼 이제 네 개 남았어.”

알고 있다는 듯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인 펠리어트는 들어갈 생각은 없는지 잠시 내 머리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선은 곧 목을 거쳐 어깨, 그리고 팔을 지나 발밑으로 떨어졌다. 도무지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나를 바라보던 펠리어트는 비로소 만족한 듯한 미소를 머금고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비켜섰다. 마치 그곳에 밟으면 안 되는, 길고 긴 풍성한 베일 자락이라도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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