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 남자가 대체 누구야?2021.12.25.
위너드를 대동해 후작가에 다녀온 그 날 이후, 아우레아에는 희한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자회가 열리던 날 새벽부터 회장 근처에 시종 옷을 입은 수상한 사람이 얼쩡거렸다는 소문이었다. 심지어 내용도 굉장히 구체적이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굉장히 잘생긴 청년이래요.”
“남루한 시종 옷으로도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감출 순 없었다나 봐요.”
“피부도 하얀 데다가 잘생긴 걸 넘어서 예쁘기까지 한 남자라는데 대체 누굴까요? 정말 그런 청년이 후작님께 나쁜 짓을 했을까요?”
가게 단골손님들은 물론, 저택의 하녀들로부터 그런 말을 전해 들을 때마다 나는 남몰래 실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카셀이 직접 낸 소문이겠지. 아무튼 각종 억측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은 순식간에 아우레아를 휩쓸었고, 급기야는 실제로 그런 사람을 봤다는 제보까지 잇따랐다. 덕분에 커피 술을 나눠 준 수상한 시종을 향한 혐의는 점점 더 짙어졌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자기가 명탐정이라도 된 듯 범인이 누구일지 저마다 추리를 이어 갔다. 이런 와중에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사실에 입각한 철두철미한 조사를 하는 사람은 오로지 레어넌 단장뿐인 듯했다. 일이 무척이나 바쁜지 그날 이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레어넌은 아무래도 이번 사태가 검은 뱀 길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낸 듯했다. 물론 내 추측이긴 하나, 확신할 수 있었다. 황궁에서 검은 뱀 길드에 내걸었던 현상금을 순식간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로 걱정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카셀이 갑자기 저택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를 잡으려고 병사들이 아우레아를 다 뒤지고 있는데, 그는 마냥 태평한 얼굴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를 잡고 다급하게 소식을 전했다.
“황궁에서 갑자기 현상금을 올린 거 알고 있어?! 무려 오십억 골드라는데……!”
“어.”
역시 카셀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짧게 답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탓일까? 낯빛이 유독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혹시 정말 위험해진 거야?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
“이번 연말까지 무조건 백억으로 올린다.”
“……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겨우 오십억 골드라니. 우리도 아직 멀었어.”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한 것 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결국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카셀은 정말 현상금 따윈 안중에도 없고 걱정도 되지 않는 듯, 내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그 갈색 머리 남자, 대체 정체가 뭐야?”
“저, 정체라니?”
“마부 역할을 해 준 길드원에게 물었지만, 그 남자와 사전에 말을 맞춘 적은 없다는데.”
높아진 현상금에도 그저 여유롭기만 한 카셀의 태도에 마음이 좀 놓였지만, 위너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당황하고 말았다. 어찌 됐건 이것도 내겐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사단장의 질문에 당황해서 머릿속이 하얘졌는데 남자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대. 뭔가 이상하지 않아?”
카셀은 속삭이듯 말을 하면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수를 쓴 걸까? 혹시 알고 있어? 누나랑은 무슨 사이야? 대체 무슨 사이이기에 그자를 그토록 신뢰하는 거지?”
꼭 이럴 때만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이젠 상관없잖아? 두 번 다시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래 봤자 일전에 위너드가 카셀에게 한 말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 하는 것뿐이었지만.
“흐음. 그러니까 신경 끄라는 건가?”
카셀은 가만히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설마 누나가 이혼할 수 있게 도와준 흑마법사는 아니겠지.”
……오,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닌데. 내심 찔린 나는 고개를 아주 애매하게 움직였다. 끄덕이는 것도, 그렇다고 가로젓는 것도 아닌 상태로 말이다. 제발 더 이상 자세히 캐묻지 않길 바라고 또 바라며 카셀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보던 그때였다.
“성기사단장에, 전쟁 영웅이 된 공작에, 이젠 정체 모를 수상한 능력자까지.”
미성이면서도 한편으론 낮게 들리는 음색의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귀족 나리들은 어차피 내가 신경을 쓸 건 아니니까 상관없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셀이 갑자기 내 손을 휙 잡아끌었다.
“아.”
깜짝 놀란 나는 그가 당기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내 손바닥이 넓고 단단한 가슴에 닿았다. 그 아래로 거칠게 뛰는 박동이 느껴졌다.
“……중요한 건 그 자식이 나를 제대로 열받게 했다는 거야.”
미소를 머금은 채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얗게 빛나는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예쁜 웃음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살벌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순간 놀란 나는 새된 목소리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카셀의 표현대로 귀족을 제외하면, 남는 건 위너드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내 안내자도 카셀 뺨치게 제멋대로인 사람이긴 하다. 그걸 잘 알아서 괜히 더더욱 불안해졌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열받게 했다니, 언제? 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잖아? 어차피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라면서.”
카셀은 여전히 음산하게 웃으며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듯 속삭였다.
“그러니 내가 뭘 하든 상관없을 테고.”
그의 시선은 걱정으로 이리저리 배회하는 내 눈동자에 못 박혀 있었다. 결국 나는 카셀의 손을 내 손등 위에 포갠 자세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괜히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귓가에는 아스라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국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슬며시 치켜들자 두 눈이 마주쳤다.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던 울림이 더욱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방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말이다.
“……하.”
카셀은 낮은 한숨을 내쉰 후에야 내 손을 슬그머니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로 내 귀에 속삭였다.
“자주 만나러 올게, 누나.”
그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더니, 곧바로 창문을 통해 사라져 버렸다. 카셀은 사라졌지만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달아오른 양 볼을 손등으로 번갈아 가며 누를 뿐이었다. * * * 혐의를 벗고 주변이 안정되니 그제야 비로소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서재에 틀어박혀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위너드의 증언을 앞두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한눈을 팔았더니, 미처 보지 못한 서신이 그새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꾸역꾸역 밀린 편지를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여기도 이메일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덧없는 희망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편지 봉투를 레터 나이프로 찢었다. 마지막 편지는 초대장이었다.
“셰릴 백작의 사냥 대회가 곧 열리는구나!”
그레이스 후작 부인의 만찬회에서 만난 영애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바로 그 사냥 대회의 초대장이었다. 펠리어트도 참석할지도 모르니 없던 일로 하겠다며 심술궂게 웃던 영애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날 골탕 먹일 셈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그녀의 제안은 오히려 고맙기만 했다. 그때 나는 주식에 미친 한 마리 짐승과도 같았으니까. 물론 지금도 별반 다를 것 없지만……. 그런데 정말 펠리어트가 올까? 연회는 물론 각종 사교 행사를 워낙 싫어하는 사람인지라 사냥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거기서 만난다면 꽤 반가울 것 같았다. 얼굴 본 지 퍽 오래되었으니까. 수해 복구로 바빴을 텐데 솔직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고……. 순간 브레이크를 당기듯 생각을 멈춘 나는 다급히 육성으로 소리쳤다.
“아는 얼굴이 있으면 안심되니까!”
나는 다른 곳으로 생각이 튀기 전에 재빨리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편지를 다시 봉투에 담고 인장까지 찍고 나니 레아의 가게에서 펠리어트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때가 또다시 떠올랐다. 제발 재수 없는 말 좀 해 달라며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던 그때 말이다. 그걸 생각하니 어쩐지 사냥 대회에 가는 게 은근히 기대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 *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위로 다시 화창한 태양이 떠올랐다. 벌써 여름이 찾아와 사람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1년 내내 서늘한 북부에 있었던 탓인지, 벌써 더위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젠 차라리 얼른 사냥 대회 날이 다가와 시원한 북쪽으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하지만 나를 도와 짐을 꾸려 주던 조이는 좀처럼 걱정스러운 표정을 풀지 못했다.
“뭐가?”
“거기 가셨다가 혹시 그분을 마주치기라도 하시면…….”
그녀는 생각만으로 끔찍하다는 듯 조심스레 말했다. 조이가 말하는 ‘그분’이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었다.
“괜찮아. 그럴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럴까요?”
“그럼. 펠리어트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순간 조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래요?”
“응. 알고 보면 말도 꽤 잘 통하고, 나름대로 상식적이기까지 한…….”
어라? 내가 왜 그의 편을 들고 있지? 나는 멀거니 눈을 깜빡이는 조이를 바라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곧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실 예정이니까 응접실에 다과 준비를 좀 해 줄래?”
반가운 손님은 바로 레어넌 단장이었다. 드디어 조사가 어느 정도 일단락됐는지 만나고 싶다는 서신이 왔다. 안 그래도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언제든 기다리고 있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미리 약속한 시간에 맞춰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로렐라 님께서 협조해 주신 덕분에 일이 해결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레어넌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정중한 인사부터 건넸다.
“아녜요, 감사는요. 전 아무것도 안 했는걸요.”
이렇게 찾아온 걸 봐선, 내 혐의는 이제 완전히 풀린 것 같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레어넌까지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여전히 예리하게 빛나는 그의 두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또다시 긴장이 차올랐다.
“어서 들어오세요.”
나는 긴장을 애써 감추며 레어넌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조이가 열과 정성을 다해 준비해 놓은 다과가 이미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일은 다 끝나신 건가요?”
사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은 완전히 마무리됐는지, 황궁에서 혹시 또 다른 임무를 준 건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혹시 검은 뱀 길드원들을 전부 잡아들이라는 명은 아닌지…….
“거의 다 마무리되긴 했지만,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시계의 행방이 아직 묘연하고, 용의자의 몽타주도 완성되지 않아서요.”
나는 레어넌의 말을 들으며 카셀의 얼굴이 전국 곳곳에 나붙는 상상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라면 그렇게 되더라도 그저 코웃음 치고 넘어갈 것 같았다. 만약 거품을 문다면,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지. 몽타주가 자신의 생각만큼 잘생기지 않았을 때. 이게 말이 되냐고 방방 뛸 카셀을 상상하며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여전히 굳은 표정을 한 레어넌이 눈에 들어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괜히 입술이 바짝 말랐다.
“단장님? 왜 그러세요……?”
나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한 채 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혹시…… 솔직히 답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서, 설마 내 혐의가 아직 벗겨지지 않은 건가? 그게 아니면 굳이 나한테 물어볼 게 뭐가 있지? 찰나의 순간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네, 그럼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이미 긴장으로 등줄기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데우스 에번이란 자와…… 어떤 사이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네?”
누구요? 그게 위너드가 위장했던 이름이라는 걸 떠올리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그나마 그게 누구냐고 묻기 전에 눈치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날 두 분을 보니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느껴져서요.”
딱히 위너드와 많은 말을 섞은 것도 아닌데,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까? 어쩌면 기사단장의 날카로운 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 아녜요. 몇 번 본 적도 없는걸요. 외출 시종이 필요할 것 같아 주위에 수소문해서 알게 된 것뿐이에요.”
나는 시치미를 뚝 뗀 채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저랑 잘 맞지 않아 정식 고용도 하지 않았고요.”
“……그렇군요.”
비로소 레어넌 단장의 눈매가 평소처럼 부드럽게 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것이 있는 듯 굳은 입매로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혹시 제가 또 협조해 드릴 일이 남아 있는 건가요? 아직 혐의가 벗겨지지 않은 거라면…….”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제가 개인적으로 데우스 에번 씨에 대해 궁금했을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다니, 어째서? 위너드가 그날 무언가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아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날 제대로 열받게 했다’는 카셀의 말이 떠올라 더욱 그랬다.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위너드, 진짜로 사고 쳤던 건 아니겠지? 이걸 해소할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직접 물어보는 것.
“혹시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갑자기 왜 여쭤보시는 건지…….”
“그 사람이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레어넌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치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위너드는 그의 눈 밖에 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예의도 바르고 몹시 정중했으니까. 그런데도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니. 어쩌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실수했을지도 모른다. 확인해야만 했다. 나는 다음 말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동그랗게 뜬 두 눈을 레어넌에게 고정시켰다.
결국 한참 만에 입술이 열렸다.
“스스럼없이 당신과 눈을 마주치며 즐겁게 웃더군요. 단지 그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이런 적대감을 느낀 적은 처음…….”
자조하듯 읊조리던 말이 뚝 멈췄다. 동시에 레어넌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짧게 탄성을 내지른 나보다, 그는 더욱 놀라고 황망한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기껏 얼굴을 뵈러 와서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놨군요. 부디 잊어 주십시오.”
나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달래 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태연하게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젠장, 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지금 욕한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레어넌 단장님이……?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바라보는데, 레어넌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둘이 만나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네?”
내가 반문하자 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지금 제가, 그러니까…….”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끝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레어넌 단장님이 나를……?’
지금 위너드를 질투……한 건가?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어디선가 멈추지 않는 북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는 듯했다. 그게 심장 박동 소리라는 걸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꽤 요란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