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애송이 자식2021.12.22.
나와 위너드는 물론, 그날 마차를 운전했던 마부까지. 우리는 레어넌의 안내를 따라 걸었다. 우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던 레어넌은, 그 뒤로 묵묵히 앞장섰다. 안 그래도 앞으로 벌어질 일에 긴장되는데, 공기까지 싸늘하게 내려앉아 더 마음이 불편했다. 저택 안에는 실로 많은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작과 그의 측근들은 물론, 바자회를 주최한 브랜든 백작 부인과 입구를 지켰던 경비원, 심지어 그날 회장에서 일한 직원들까지 모인 모양이었다. 나와 위너드는 응접실 안으로 안내받았다. 이제부터 조사에 필요한 사람들을 차례대로 대면시킬 거라고 했다. 레어넌은 제일 먼저 ‘데우스 에번’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과연 카셀이 장담한 대로 완벽했다. 아우레아 시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자작이 이리저리 뜯어봤음에도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였다. 그다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후작과 그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위너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입을 모아 대답했다.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그날 술을 나눠 준 사람과는 인상이 전혀 다르군요.”
주최자인 브랜든 백작 부인도 이런 사람은 고용한 적이 없다고 말했고, 회장의 시종들도 하나같이 이런 사람이 회장을 돌아다니는 건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해 주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경비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날 후드에 가면까지 쓰고 있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갈색 머리였던 건 확실한데.”
“가면이요?”
“아, 그건……!”
나는 얼른 중간에 끼어들어 가면을 씌운 이유에 대해서 둘러댔다. 축제라 들뜬 나머지 평소와 다른 걸 해 보고 싶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아주 없는 일도 아니라서 적당히 둘러댈 수 있었다. 물론 얼굴은 좀 화끈거리긴 했지만……. 그러고는 그날 카셀이 썼던 가면을 보란 듯 위너드 얼굴에 댔다가 뗐다가를 반복했다. 그 광경을 유심히 보던 경비원이 아까와는 달리 제법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맞는 것 같습니다. 가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잘생긴 외모를 보니 기억이 나네요. 남자인 저조차 가면 속이 궁금했을 정도니까요. 이런 얼굴이 흔한 것도 아니고요, 하하.”
그 말에 사람들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사람들은 불쾌한 호기심이 가득 어린 눈으로 나와 위너드를 번갈아 바라보기까지 했다.
‘위너드의 외모가 카셀에 밀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괜히 이런 생각을 하며, 애써 참아 넘기려던 그때였다.
“…….”
또다시 굳은 눈으로 말없이 위너드를 바라보는 레어넌 단장이 눈에 들어왔다. 묘한 적대감과 경계가 뒤섞인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단장님……?”
평소라면 곧바로 반응해 주었을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선을 눈치챈 위너드가 기가 차다는 듯 엷게 웃었다. 레어넌의 얼굴 또한 조금 더 험악해졌다. 더욱 당황한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레어넌 단장님?”
“아, 네.”
그제야 비로소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황급히 서류를 넘기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쪽에 계신 분이 그날 두 사람을 태워 준 마부가 맞습니까?”
그러자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마부가 크게 고개를 숙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로렐라 님께서 바자회에 계시는 동안 시종, 데우스 씨와 함께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데우스가 아가씨의 짐을 안까지 날라드리고 난 뒤에는 계속 함께 있었죠. 천막에서 좀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워 두어 그 안에서 기다렸습니다.”
레어넌의 묵직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마부는 청산유수로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능숙하게 대답하는 남자를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어넌 단장 앞에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카셀의 길드원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순간, 유독 서늘하고 날카로운 레어넌의 목소리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두 분이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은 없습니까?”
허를 찌르는 질문에 마부는 위너드를 흘끗대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희가 줄곧 마차 안에 있어서 말이죠…….”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십니까. 두 분의 말 외에, 거기 계셨다는 다른 증거가 없는데.”
“글쎄요……. 거참, 어떻게 증명해 드려야 할지…….”
방금과는 다르게 확연히 긴장한 목소리. 마부는 위너드를 힐끔 바라보았다. 정황상 말을 맞추라는 신호를 보내는 게 틀림없었다.
‘제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나 또한 덩달아 초조해져 마른침만 꿀꺽 삼키고 있는데……. 딱. 어디선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그 소리는, 지금까지 몇 차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황급히 시선을 올리자, 위너드가 태연자약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역시 손가락을 튕긴 건 그였던 모양이다. 위너드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줄곧 마차에 있었지만, 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 잠깐 나가긴 했습니다. 워낙 난리통이었던지라 그때 저희를 본 사람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요.”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긴장으로 한껏 굳어 있던 마부의 표정이 어느새 편안하게 풀려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 역시 무척이나 자신감이 넘치고 또박또박했다.
“아, 그렇지. 좌판에서 물건을 팔던 행상들끼리 싸움이 나서, 그걸 구경했었죠. 밖으로 나가 봤더니 덩치 큰 남자가 보라색 옷을 입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있더군요.”
“한 명은 음료수를 팔던 사람이고 한 명은 꽃을 파는 사람인 것 같던데, 왜 싸웠는지 원인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봤을 땐 이미 고성이 오가고 있었으니까요.”
“맞아요. 주먹다짐까지 한 건 아니지만, 꽤 질펀한 욕설까지 하더라고요. 뭐, 얼마 안 돼 병사들이 와서 상황은 금방 끝났지만요.”
위너드와 마부는 정말 그날 함께 시간을 보낸 친구인 것처럼 손발이 척척 맞았다. 나조차도 순간 정말 그들이 그 광경을 봤을 거라 믿을 뻔했다. 나도 모르게 위너드의 손 쪽으로 스르륵 시선이 갔다. 그가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본인이 사라지거나, 멈췄던 시간이 다시 가거나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까도 그 능력을 쓴 게 확실해! 나는 땀이 밴 손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위너드의 능력이라면, 저 말도 꾸며 낸 게 아닐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어넌이 눈짓하자 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사실입니다. 상인 둘이 호객 행위를 하던 중 시비가 붙어 일이 커지기 전에 저지했습니다.”
“그게 언제쯤이지?”
“시간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황을 정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님께서 쓰러지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는 듯하던 레어넌의 고개가 이윽고 위아래로 가볍게 움직였다.
“수색 범위를 넓힌다. 그날 회장에서 커피 술을 나눠 준 사람이 누군지,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 즉시 찾아내도록.”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모여 있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커피 술의 양으로는 부족해. 분명 정신을 잃고 쓰러진 후작님께 한 번 더 접근했을 거다. 그자의 인상착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후작가 근처에 수상한 사람은 없었는지 조사해. 반드시 잡아야 한다.”
“네!”
그의 명을 들은 기사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기사들이 응접실을 빠져나간 뒤, 레어넌은 내게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직 범인을 잡은 것도 아니건만, 레어넌은 비로소 어깨의 짐을 좀 덜어낸 사람처럼 후련한 표정이었다. 아픈 양심은 가슴 한편으로 밀어 둔 채 나는 그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줄 뿐이었다. * * * 황궁의 복도가 남부럽지 않을 만큼 커다란 조각상이며 장식장들이 열을 맞춰 늘어서 있는 후작가의 화려한 복도. 커다란 대리석 사자상 뒤에 숨어 기척을 숨긴 채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카셀의 눈이 일순 더없이 크게 뜨였다. 그는 로렐라와 위너드가 출발하자마자 몰래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의 수하인 시드와 함께 정정당당하게 후작가 안으로 들어왔다.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후작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시드가 의사를 가장해 후작가 사람들과 안면을 텄으니까. 신임을 얻기 위해 병세를 아주 약간 완화하는 약도 지어 주었으니, 시드에 대한 홀턴 후작의 신뢰는 무척이나 높았다. 심지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불러들인 의사 역시 시드였으니까. 그런 의사를 연기하고 있는 시드의 조수로 변장했으니, 카셀에게도 후작저에 들어오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범인을 잡기 위해 온갖 병사들과 심지어 성기사단까지 와 있는 후작저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만약 로렐라가 위험에 빠지면 곁에서 도와줄 사람은 자기뿐이니까. ……분명 그랬는데.
‘좌판에서 물건을 팔던 행상들끼리 싸움이 나서, 그걸 구경했었죠. 밖으로 나가 봤더니 덩치 큰 남자가 보라색 옷을 입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있더군요.’
마부, 아니. 그의 수하의 대답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카셀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수하는 그날, 마차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 도주 경로를 미리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어넌이 질문을 던졌을 땐, 카셀조차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순간, 갑자기 응접실의 문이 열리더니 숨을 죽인 채 서 있는 그의 코앞으로 기사들이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곧이어 레어넌과 로렐라가 담소를 나누며 걸어 나왔고, 후작과 측근들도 그 뒤를 줄줄이 따랐다. 이윽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카셀은 장식장 뒤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응접실 안에 남아 있던 유일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 대신 외출 시종 역할을 맡은 그 갈색 머리 남자였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갈색 곱슬머리 아래 드러난 반듯한 이마와 남자답게 쭉 뻗은 굵은 눈썹, 에메랄드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까지. 어딘지 모르게 묘한 느낌을 주는 그가 천천히 카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손 위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축제 날 바자회장에서 입었던 갈색 망토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가 입고 있던. 동시에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먼저 눈동자를 움직인 건 카셀이 아니라, 남자였다. 그는 카셀이 그러했듯 노골적으로 카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엷은 미소를 띤 채 말없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시선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애송아. 남자가 두드린 자신의 어깨를 매만지던 카셀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았다. 동시에 빠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