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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비슷한 건 키밖에 없는데 (49/173)

49화. 비슷한 건 키밖에 없는데202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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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대로, 레어넌의 조사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당시 후작과 함께 있던 측근들과 그가 만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모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어넌이 저택의 문을 두드렸을 때,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물론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1655062221167.jpg“정말 미안합니다, 로렐라.”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건 조사가 제법 고된지 얼굴엔 피로와 수심이 가득했다.

1655062221167.jpg“그때 동행하셨던 외출 시종의 신분을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얘기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느껴지는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1655062221167.jpg“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끝까지 공과 사를 구별하려는 모습이 과연 레어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안해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16550622211739.jpg“단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서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먹을 꼭 쥐고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50622211739.jpg“최선을 다해 협력할게요. 수사는 공정해야 하니까요.”

그 대답에 레어넌의 얼굴이 비교적 환해졌다.

16550622211739.jpg“그러니까 그날 제가 축제에 대동했던 시종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시다는 거죠?”

1655062221167.jpg“네, 그렇습니다. 수상한 사람이 음료를 날랐다는 제보가 있어서, 혹시 동일 인물이 아닌지 확인하려 합니다. 그자의 신분도 확실히 증명해 주실 수 있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 같군요.”

16550622211739.jpg“네에, 알겠습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1655062221167.jpg“함께 바자회장 안으로 들어가셨다고 들었는데, 그 이후에 시종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물어보고 싶습니다.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꼭 확인이 필요한 일이라……. 내일 그와 함께 후작저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16550622211739.jpg“물론이죠. 함께 있던 마부와도 같이 가도 될까요?”

1655062221167.jpg“그럼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는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일이 바빠 이만 가 봐야겠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왜 그러는 건지 모르지 않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현관까지 배웅해 주면서도 나는 계속 그의 얼굴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1655062221167.jpg“오늘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작별 인사를 건네며 다정하게 웃는 두 눈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 듯 피곤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16550622211739.jpg“많이 힘드셔서 어떡하죠.”

1655062221167.jpg“괜찮습니다. 빨리 조사가 마무리되면 좋겠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초조했으니까. 홀을 가로지르고 현관을 지나, 마차가 대기하는 정원의 연석에 이르기까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길게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든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기 위해 열심히 이것저것 떠들었다. 레어넌은 늘 그랬듯 온화하게 들어 주었지만, 역시나 평소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그 중간중간, 사건에 대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어보기도 했다.

1655062221167.jpg“시계가 없어진 것도 큰일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게 제일 큰일이죠. 고통도 상당했을 겁니다.”

레어넌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음속에서 깊은 빡침이 차올랐다. 바꿔 말하면 카셀이 그런 미친 짓만 안 했어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단 소리잖아.

16550622211739.jpg“하아, 욕이 나오려고 하네…….”

1655062221167.jpg“네?”

살짝 커진 레어넌의 두 눈을 보며, 나는 재빨리 변명하듯 덧붙였다.

16550622211739.jpg“타, 타인을 그렇게 힘들게 하다니 말이에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카셀, 이 개XX야. 그 말에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퍼졌다. 다시 한번 정중히 작별 인사를 건넨 레어넌은 도착했을 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 * * 다음 날, 나는 홀턴 후작가로 출발하기 전에 위너드에게 망토를 건넸다. 그날 카셀이 입었던 것과 같은 옷 위에 똑같은 망토까지 두르니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16550622211739.jpg“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완벽해!”

16550622271025.jpg“……다음부터 이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위너드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투덜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연신 엄지를 세워 주었다. 물론 카셀이 좀 더 호리호리한 체형이지만 어차피 망토를 두르고 있으니 그 정도 차이는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 그날 카셀에게 갈색 머리 가발을 씌운 건 신의 한 수였어.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나는 약속대로 서재의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위조 신분증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만나려면 역시 내가 움직이는 것보다는 카셀이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나와 내 외출 시종은 후작에게 독을 먹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자칫 잘못했다간 변명할 틈도 없이 잡혀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위너드는 창문 앞에 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윽고 기가 차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50622271025.jpg“이 2층 창문으로 들어올 거라고? 매번 이렇게 드나들고 있는 거야?”

16550622211739.jpg“응. 봤으니 알 거 아냐.”

왠지 불퉁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16550622211739.jpg“너랑 조금 비슷하지?”

16550622271025.jpg“대체 어디가.”

그는 진심 말도 안 된다는 듯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험악하게 인상까지 구긴 채로 말이다. 뭐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카셀이랑 비슷하다는 말이 유쾌하게 들리진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늘 조금씩 늦곤 하던 카셀은 오늘만큼은 정확히 제시간에 찾아왔다. 혹여라도 너무 늦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마음도 흩날리는 은발에 금방 진정되었다. 아래에서 불쑥 나타나 창문턱을 훌쩍 넘는 그를 바라보던 위너드가 고개를 살짝 숙여 내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16550622271025.jpg“엄청난 주식을 보유하신 사고뭉치를 드디어 뵙게 되는군.”

괜히 그 말이 웃겨서 나는 그를 돌아보며 슬쩍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바로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창문 근처에 우뚝 멈춰 선 카셀이 보였다. 나는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16550622211739.jpg“카셀, 왜 그래? 내가 부탁한 건 가져왔어?”

하지만 돌아온 건 동문서답이었다.

16550622271056.jpg“……또 그러네.”

16550622211739.jpg“뭐가?”

16550622271056.jpg“그날과 똑같은 기분이야.”

카셀은 알 수 없는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손으로 본인의 가슴팍을 꾸욱 눌렀다. 그날과 똑같은 기분? 대체 무슨 소리지? 그러는 사이 위너드도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순간, 카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16550622271056.jpg“……완벽한 대역이라더니, 대체 어디가?”

카셀은 그날의 자신과 똑같은 차림을 한 위너드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쏘아보더니 불만스러운 듯 혀를 찼다.

16550622271056.jpg“나랑 비슷한 거라고는 키밖에 없잖아. 왜 나 대신 이 자식을 끌어들인 건지 모르겠네.”

왜인지는 몰라도 화가 난 듯 보였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주식 창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카셀의 기분에 따라 함께 울고 웃는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난동 부리는 탓이었다. 노골적인 적의에 솔직히 몹시 당황했다. 이런 사태는 예상 밖이었다. 나는 얼른 카셀을 달래기 시작했다.

16550622211739.jpg“무, 물론 카셀이랑 비교할 순 없지. 근데 정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래.”

16550622271056.jpg“……누구보다?”

16550622211739.jpg“그래, 진짜로 믿어도 괜찮아. 내가 보증할게!”

16550622271056.jpg“하.”

하지만 카셀은 설득되긴커녕, 낮은 조소와 함께 눈썹을 구길 따름이었다. 그때, 우리를 잠시 지켜보던 위너드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16550622271025.jpg“이번 일만 해결되고 나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니 걱정 마.”

어?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말에 황급히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위너드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16550622271025.jpg“아예 눈앞에서 영영 사라져 줄게.”

16550622271056.jpg“……그 말, 진짜여야 할 거야.”

16550622271025.jpg“물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지.”

카셀은 확언에도 여전히 적대적인 태도로 으르렁거렸고, 위너드의 능글맞은 미소는 점점 짙어져만 갔다. 아니, 저기요. 나만 빼고 둘이 이야기하지 말아 줄래?! 황당하기 짝이 없어서 멍하니 내 곁에 선 장신의 남자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때였다.

16550622271056.jpg“하아…….”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카셀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더니,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한 후에야 품에서 두꺼운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16550622271056.jpg“……여기 있어.”

혹시 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길까 봐 나는 카셀의 손에서 얼른 두루마리부터 빼앗듯 가져왔다. 준비해 주기로 한 위너드의 위조 신분증이었다.

16550622211739.jpg“정말 괜찮겠지?”

16550622271056.jpg“그래.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안심해. 가짜는 진짜보다 훨씬 더 진짜 같아야 하는 법이니까.”

16550622211739.jpg“정말 고마워!”

그제야 비로소 안심되어 카셀을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가 붉어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16550622271056.jpg“뭘 이런 작은 걸 가지고 감동하고 그래…….”

어느새 날 선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카셀의 입가에는 천진난만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어쩐지 그의 등 뒤로, 마구 흔들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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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와 위너드를 태운 마차는 곧장 홀턴 후작의 저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으리으리한 저택의 커다란 대문을 지나 정원 안쪽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로 마차 여러 대가 보였다. 내 외출 시종이 커피 술을 나눠 준 사람과 동일 인물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증인들이 먼저 도착해 있던 모양이었다. 카셀을 다시 분장시킬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세우기로 한 내 전략은 옳은 듯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분장으로 가릴 수 없는 특징 같은 걸 기억하고 있다면 낭패였을 테니까. 조금 더 달려 현관에 도착하니,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어넌 기사단장이었다.

1655062221167.jpg“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로렐라 님.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요.”

가까이 다가온 그가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하지만 시선은 내 뒤를 따라 내린 위너드에게 닿아 있었다. 위너드는 그에게 말없이 꾸벅 인사를 건넸다.

1655062221167.jpg“데우스 에번 씨?”

16550622271025.jpg“네, 그렇습니다. 베르하르트 기사단장님.”

어쩐지 나까지 숨죽이며 지켜보게 되는 광경이었다. 카셀에 이어 레어넌까지. 안내자인 위너드가 그들과 직접 말을 섞는 장면을 보리라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1655062221167.jpg“그럼 세 분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그러자 위너드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16550622271025.jpg“가실까요, 주인님.”

내가 부르라고는 했지만 정작 주인님이라는 말을 들으니 낯이 간지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위너드에게선 고위 귀족이자 황궁 소속의 성기사단 단장인 레어넌과 나란히 서 있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아우라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옷도 평상시에 즐겨 입던 화려한 정복이 아니라, 시종 의상일 뿐인데도 그랬다. 단둘이서 만날 땐 신경 쓴 적이 없는데,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이상했다. 그리고 안내자 위너드가 아니라, 인간 위너드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는 위너드한테 툴툴거리지 말고 잘해 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슬쩍 그를 바라보자, 위너드도 기다렸다는 듯 날 향해 눈을 마주쳐 주었다. 씨익 웃는 얼굴이 왜인지 즐거워 보였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작 하나하나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라 순간 무척이나 긴장되었다. 위너드 역시 시선을 눈치챘는지, 나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레어넌 단장이었다. 평소라면 안심이 되었을 얼굴인데도,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웃는 얼굴을 가장하기도 어려울 만큼. 그의 표정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늘 상냥하고 다정한 그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날이 선 분위기. 상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 저런 눈빛의 레어넌 단장을 예전에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언젠가, 호숫가에서 펠리어트를 마주쳤던 때와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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