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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그럴 리가 없다 (48/173)

48화. 그럴 리가 없다2021.12.15.

고요하기만 한 이른 새벽녘의 침실. 나는 조이 몰래 방에 놓인 테이블 위로 2인분의 다과를 준비해 두었다. 테이블이 비좁은 탓에 많은 걸 준비하진 못했지만, 대신 찻잎이라든가 곁들일 과자 같은 건 모두 최고급품으로 갖췄다. 이건 일종의 ‘뇌물’이니까. 사실 응접실이나 하다못해 서재의 책상이었더라면 더 많은 걸 준비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한시가 급했고 이 시간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침실뿐이었다.

16550621970947.jpg“좋아.”

은근 이런 걸 즐기는 것 같으니 마음에 들어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뿌듯한 미소와 함께 뒤로 돈 찰나였다.

16550621970951.jpg“싫어.”

16550621970947.jpg“으앗!”

곁에서 들린 낮은 목소리에,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16550621970947.jpg“아, 깜짝이야…….”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드는 레이스 커튼 앞에, 팔짱을 낀 채 불퉁하게 서 있는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16550621970947.jpg“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하지만 그는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간을 잔뜩 구기고선 다가왔다. 그리고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16550621971009.jpg“안 해.”

16550621970947.jpg“뭘?”

16550621971009.jpg“다 지켜봤으니까 시치미 떼지 마.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고.”

16550621970947.jpg“…….”

16550621971009.jpg“안 할 거야.”

역시나. 부탁을 하기도 전에 단칼에 거절하다니, 과연 피도 눈물도 없는 나의 안내자답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물론 좌절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적어도 여덟 번은 더 찍어 볼 거니까! 몇 번이고 각오를 다지며 일단 위너드를 테이블 앞으로 이끌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도 팔짱을 낀 채로 그저 빈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얼른 손수 차를 따라 주며 애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0621970947.jpg“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 응?

16550621971009.jpg“…….”

16550621970947.jpg“이건 주식을 파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상황은 아니잖아. 물론 따지고 보면 주식 때문에 얽힌 일이긴 하지만…….”

직접 공수한 값비싼 홍차로 찻잔을 채우자 위너드는 그것을 말없이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의 눈치를 열심히 살피던 나도, 마치 따라 하듯 얼른 잔을 집어 들었다. 우리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16550621971009.jpg“……뭐? 나이 들어 보이는 머리 색?”

기가 차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곧바로 그 뒤를 이었다. 아, 역시 그것도 들었구나. 그것 때문인진 모르겠는데, 위너드는 오늘따라 유달리 한층 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붉은색 실크 재킷 위에는 금으로 만든 단추가 달려 있고, 옷에 놓인 자수마저도 금사였다. 크라바트에는 큼지막한 에메랄드가 박힌 장신구를 달았는데 그의 녹색 눈동자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옷에 저렇게까지 힘을 준 걸 보면 그 말이 꽤 상처였나 보다. 뭐,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방향이 좀 달라서 그렇지, 위너드는 카셀만큼이나 자기애가 남다른 사람 같으니까……. 자꾸만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나는 얼른 머릿속을 정리하고 다시 한번 애원했다.

16550621970947.jpg“진짜 한 번만 도와줘. 별거 아냐.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돼.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하면 되거든.”

16550621971009.jpg“싫어.”

16550621970947.jpg“혹시 어깨 아프지 않아? 내가 좀 주물러 줄까?”

16550621971009.jpg“괜찮아. 사양할게.”

어쩜 이렇게 가위로 싹둑 잘라 낸 것처럼 매정한지. 일곱 번째 거절당했을 때 즈음 결국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기로 했다. 어깨에 힘을 빼 잔뜩 풀이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트리고, 누가 들어도 근심으로 가득한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16550621970947.jpg“하아, 이제야 겨우 주식 파는 데에 몰두할 수 있을 만한 환경을 만들었는데, 혹시 이러다 모든 게 수포가 되면 어떡하지?”

잔을 내려놓는 위너드의 손이 순간 멈칫하는 게 보였다.

16550621970947.jpg“내가 혐의를 벗지 못하면, 사실상 주식은 반토막 날 게 뻔해. 레어넌 단장님을 못 만날 거 아냐. 누구보다 정의로운 분이니까 디저트에 독이 들어 있다는 걸 알았든 몰랐든 간에 그런 일에 가담한 날 만나 줄 리 없어. 그렇지?”

16550621971009.jpg“…….”

16550621970947.jpg“아니지, 아니야. 어쨌든 일에 가담한 건 맞으니까 감옥에 들어갈지도 몰라. 그럼 주식도 못 팔 거고…… 다음에 소멸하는 건 내가 되겠지.”

이걸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굴 리가 없다. 실제로 미세하지만 위너드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보란 듯 더 크게 한탄하며 말을 이었다.

16550621970947.jpg“증거가 없어 풀려나도 카셀과는 당분간 안녕이겠지. 의심받는 와중에 만날 수는 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앞으로 영영 못 만날지도 몰라. 이런 일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이용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게 뻔해.”

16550621971009.jpg“……그럼 그 길드장 녀석이 말한 대로 하면 되잖아. 녀석이 변장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16550621970947.jpg“그건 네가 레어넌 단장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는 위너드가 미끼를 다시 뱉지 않도록 살살 달래듯 말문을 열었다.

16550621970947.jpg“기사단장이면서 동시에 제국에서 제일가는 검술 실력자라고 정평이 나 있다고. 나는 검사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대신 그가 얼마나 날카로운 눈썰미의 소유자인지는 잘 알아.”

위너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겪은 모든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털어놓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16550621970947.jpg“황궁에서 검은 뱀 길드를 쫓고 있다는 얘기, 너도 알 거 아냐. 추종자까지 있는 마당에, 레어넌 단장님이 카셀의 얼굴을 모를 리가 있겠어? 변장하더라도 똑같아. 눈치채지 못할 거라 장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생각에 빠진 듯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 톡 두드렸다. 어쩌면 넘어올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내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16550621970947.jpg“시계는 원래 길드의 물건이라고 했으니까, 검은 뱀 길드의 소행이라는 걸 밝혀 내는 것도 얼마 안 걸릴지 몰라.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분장했다 해도 길드장을 직접 대면시키는 게 과연 현명한 생각이라고 봐? 혐의를 벗긴커녕, 더 위험해지지 않겠어?”

반복적으로 움직이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그래! 지금이 바로 종지부를 찍을 때다.

16550621970947.jpg“내가 괜히 이러는 것 같아?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주식도 못 팔고 소멸하면 어떡해.”

그를 흔들기 위해 꺼낸 말인데 머리끝부터 서서히 먼지처럼 부서질 내 모습을 떠올렸더니 진짜로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이렇게 잡힐 순 없다.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안 된다. 레어넌도, 카셀도 절대 놓칠 수 없다고!

16550621970947.jpg“내가 오죽하면…… 흐흑, 이 새벽에 잠도 못 자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우는 시늉을 내며 구구절절하게 하소연하자 위너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창문가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하늘을 바라보는 듯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 역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16550621971009.jpg“……뭐, 후보자의 상황에 개입할 수 없다는 규칙은 주식에 직접 영향을 줄 때 얘기니까 가능하긴 해.”

희망적인 말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재빨리 고개를 들자 어스름한 빛을 얹은 조각 같은 콧대와 날카로운 턱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16550621970947.jpg“도, 도와줄 거야?”

16550621971009.jpg“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드디어 살았다! 나는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를 꽉 끌어안으며 외쳤다.

16550621970947.jpg“정말 고마워!”

순간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위너드는 방방 뛰는 내 등을 조심스레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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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21970947.jpg“내가 안내자 하나는 잘 만났다니까.”

피식하는 웃음이 내려앉은 것도 잠시,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621971009.jpg“로렐라.”

16550621970947.jpg“응, 응!”

16550621971009.jpg“나 갑자기 좀 어깨가 아픈데.”

16550621970947.jpg“어?”

16550621971009.jpg“어깨가 아프다고.”

16550621970947.jpg“…….”

천천히 팔을 풀고 몸을 떨어뜨리자 입술 한쪽 끝을 살짝 위로 올린, 그래서 유독 심술궂어 보이는 미소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50621970947.jpg“그럼 주물러 줘야지!”

그러고는 얼른 그의 손을 끌어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지금과는 완전히 반대였던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상관없었다. 누가 이런 거에 눈 하나 깜짝할 줄 알고?

16550621971009.jpg“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주물러.”

16550621970947.jpg“그래!”

위너드의 말에 힘차게 대답하며 넓고 단단한 어깨를 열심히 꾹꾹 누르고, 또 눌렀다.

16550621971009.jpg“후.”

만족스럽다는 듯한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리다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16550621970947.jpg“그런데 위너드.”

16550621971009.jpg“왜?”

16550621970947.jpg“네가 내 외출 시종 행세를 하게 되면 말이야.”

16550621971009.jpg“그래.”

16550621970947.jpg“그땐 나한테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알지?”

16550621971009.jpg“…….”

내 손길에 맞춰 목을 이리저리 여유롭게 돌려대던 그가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비록 볼 수는 없지만 위너드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훗.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마음속으로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넌 아직 멀었다. 그것도 한참 멀었다고! * * * 홀턴 후작은 해독제를 투여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정신을 차렸다. 그간의 고생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살이 쭉 빠져 홀쭉한 모습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이마가 땅에 닿을 기세로 레어넌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제 그의 회복은 의사들의 손에 맡기면 될 일이었다. 레어넌은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당사자인 후작과 바자회 날 그와 동행했던 시종들은 물론, 혹시 일이 있기 전에 이상한 일은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저택의 모든 사람에게서 빠짐없이 진술을 받아냈다. 그다음 레어넌이 만난 것은 바자회를 총괄했던 브랜든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그날 바자회에 온 귀족부터 회장 근처와 입구를 지키던 경비원들, 안에서 시중을 들던 인력들의 명단까지 전부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걸 후작의 증언에 맞춰 시간대와 그룹별로 하나하나 분류해 의심스러운 사람을 추려 갔다. 증언이 필요하면 시간을 내 만나기도 했다. 조사는 무척이나 빨리 진행되었다. 수없이 쌓이는 서류만 봤을 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사람들은 경이로운 속도에 혀를 내둘렀지만, 레어넌이 어떤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는 기사단원들에겐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레어넌의 일 처리는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으레 조사는 원래 벽에 막히기도 하는 법이었지만, 그래서가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딱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며칠 후, 다시 후작가를 찾은 레어넌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16550622113223.jpg“후작님이 쓰러지기 직전에 드신 것이 달콤한 과자와 커피 술, 이 두 가지 맞습니까?”

16550622113231.jpg“네, 네. 그렇습니다.”

묽은 수프를 후르륵 들이켜던 홀턴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22113231.jpg“로렐라 메이레드 영애가 디저트를 가져왔거든요. 왜, 그 디저트 가게에 투자한 영애 말입니다.”

16550622113223.jpg“그녀가 직접 드린 겁니까?”

16550622113231.jpg“네. 원래 달콤한 과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절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라는 말에 기분이 들떠서……. 일단 먹긴 했는데 역시 너무 달더군요. 그때 마침 시종이 커피 술을 가지고 왔길래 마셨습니다.”

후작은 잠시 두 눈을 껌뻑이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16550622113231.jpg“하지만 두 가지 모두 제 측근들도 함께 먹었는데요.”

16550622113223.jpg“……잘 알겠습니다.”

레어넌은 짧게 대답하고 몸을 휙, 돌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하나로 길게 묶은 금발이 사르륵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줄곧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 증언이 하나 있었다. 그날 바자회장의 입구에서 초대장을 확인하던 병사의 말이었다. 로렐라 메이레드 영애가 디저트를 옮기기 위해 외출 시종과 함께 바자회장에 들어갔다는 것. 얼핏 들으면 문제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날 바자회장에 있던 사람 중 신원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대동한 외출 시종뿐이었다.

16550622113223.jpg‘아니, 한 사람 더 있지. 커피 술을 나눠 준 사람.’

대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후작에게 바자회장에서 일했던 시종들의 얼굴을 확인하게 해 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오히려 눈에 띄게 잘생긴 청년이라 똑똑히 기억한다고 답했다. 함께 커피 술을 마신 측근들의 증언도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김새의 시종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브랜든 백작 부인 또한 알지 못한다는 입장이었다. 혹시…… 그녀가 데리고 온 시종과 커피 술을 나눠 준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면?

16550622113223.jpg‘아니. 그럴 리가 없어.’

레어넌은 후작이 당한 독에 대해 잘 알았다. 그가 마물을 상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악명 높은 어느 ‘길드’가 주로 쓰는 탓이었다. 한 방울로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자랑하는 독이다. 홀턴 후작을 저렇게까지 오래 앓아눕게 하려면 꽤 많은 양이 필요했을 텐데, 그 정도의 재력을 지닌 이는 흔치 않았다.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범인은 ‘검은 뱀 길드’와 관련된 자인 게 틀림없다. 훔쳐 간 시계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길드 그 자체일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들과 협력했을까.

16550622113223.jpg‘……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레어넌은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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