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누구보다도 마음 약하고 여린 그대2021.12.08.
로렐라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물론 손잡이를 힘껏 꽉 잡고는 있지만, 컵 받침에 컵을 내려놓을 때 유달리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응접실에 숨길 수 없이 울려 퍼졌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그녀를 찬찬히 살피던 레어넌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안 좋은 기억을 상기시켜드린 것 같군요.”
“아, 아니에요, 단장님.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요.”
얼핏 의연한 듯 보였지만 그녀의 얼굴엔 힘겹게 입술을 여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지는 걸 보셨으니, 얼마나 충격이 크셨겠습니까.”
누구보다도 명랑하고 쾌활한 사람이지만, 로렐라는 기본적으로는 귀족 가문의 영애 아닌가. 기사단을 이끌며 전장을 누비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온갖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던 그와는 다를 것이다. 이리 생각한 레어넌은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역시나 로렐라는 창백한 안색으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평소처럼 씩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파르르 손끝을 떠는 모습이 마음에 턱 걸렸다. 레어넌의 눈동자에 더욱 애잔함이 스몄다. 그날, 회장이 아비규환이 되었다는 것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후작이 쓰러진 데다 시계까지 사라져 괴한이 있는 게 아니냐며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벌써 듣고 오는 길이니까. 그 사이에서 홀로 떨고 있었을 그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놀랐을까.’
마음속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힘들어하고 무서워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게 좋겠지.’
여전히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앞에 두고, 그 화제를 고집하는 건 현명하지 않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도 못 물어봤군요. 제가 없는 동안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하진 않으셨나요?”
레어넌은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여전히 로렐라의 곁에 나란히 앉아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특별한 초대장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는 바자회에 다녀온 걸 보면 지역 사교계에서 바삐 활동했던 게 아닐까. 그런 건 주변의 지인을 통해 얻는 게 보통이니, 명랑하고 쾌활한 그녀라면 분명 누구보다 쉽게 친구를 사귈 수 있…….
“아니요!”
그때, 로렐라의 입에서 갑자기 높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덕분에 또다시 생각이 뚝 끊긴 레어넌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녀를 보았다. 로렐라는 정색을 하며 다시 말했다.
“만난 적 없습니다.”
“네?”
“새로운 친구 같은 건, 전혀! 만난 적 없습니다.”
“아…… 네.”
그녀의 유난히 굳은 말투와 표정을 보며, 레어넌은 또다시 큰 후회에 빠졌다.
‘내 질문이 조금 주제넘게 들렸을 수도 있겠구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앞선 바람에 저지른 실수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인데, 갑자기 누굴 사귀었는지를 다짜고짜 물어본다면 충분히 거부감이 들 만했다. 그건 극히 개인적인 일이니까.
‘더더군다나 그녀와 나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고.’
순간 레어넌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그저 친구 사이일 뿐. 이 말을 속으로 곱씹어 보니, 입 안에 쓴 물이 고이는 듯했다. 그는 침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몸을 스윽 일으켜 다시 맞은편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자 로렐라의 모습이 더욱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답게 물결치고 있는 붉은 머리, 살포시 내리깐 기다란 속눈썹, 유달리 하얀 피부, 거기에 곱게 모은 채 무릎에 포개진 작고 예쁜 두 손까지. 정말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숨길 수 없는 갈망과 열기가 계속해서 가슴속에 일렁였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 * * 진정해. 진정하자, 로렐라! 나는 테이블 너머 바닥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남몰래 심호흡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손끝이 떨렸다. 입술은 벌써 오래전에 바짝 말라 있었지만, 찻잔을 들었다간 또다시 티 나게 덜그럭댈 것이 뻔해 축이지도 못했다. 게다가 심장이 계속 콩닥거리고 있었다. 곁에 앉아 있던 레어넌이 갑자기 맞은편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굳어 있었다.
‘역시 티가 났나 봐.’
그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았냐고 물은 순간, 나도 모르게 카셀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재빨리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하긴 했는데, 누가 봐도 어색했을 것이다. 아, 바로 이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것인가?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뇐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막 돌아왔는데 또 중대한 일을 맡으셨다니 힘드시겠어요. 우선은 좀 쉬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괜찮습니다. 황궁에서도 결과를 기다리고 계실 테니, 바로 내일부터 조사에 착수해야죠.”
……한시가 급하구나. 레어넌 단장이 개입한다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지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거짓말처럼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 응접실엔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른침을 삼키자 그 소리까지도 천둥 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결국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단장님, 괜찮으시다면 함께 정원을 산책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래, 차라리 탁 트인 야외로 나가자. 여기서 계속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간, 마치 심문당하는 범인처럼 굴고 말 거야!
“좋은 생각이군요.”
레어넌도 침묵이 어색했는지 바로 동의했다.
“그럼 우리 얼른 나가요.”
내 재촉에 그는 상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몸을 일으켰다. 두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그의 목덜미가 다시 슬그머니 붉어졌다.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빠져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홀을 가로질러 문밖으로 나가자 살짝 후덥지근한 바람이 이마를 간질였다. 정원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가볍게 산책하기에는 알맞은 규모였다.
“단장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는 예쁜 꽃들이 올망졸망 피어 있는 화단 옆을 거닐며 물었다. 내 근황보다는 레어넌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얼굴이 좀 야위신 것 같아요. 일이 너무 고되었던 건 아닌가요?”
“아, 아닙니다. 다만 마물의 흔적을 쫓는 동안 조사 반경이 좀 넓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요.”
“국경 지대에 정말…… 마물이 출몰했나요?”
부러 순진해 보이도록 두 눈을 깜빡이며 묻자, 레어넌이 잠시 고민하더니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종적은 확실히 발견했습니다만, 조사 결과 위험한 건 아니라고 판명 났습니다. 누군가가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던 마물이 도주한 흔적이 아닐까 하는 의견에 힘이 실린 상황이고요.”
“헉, 세상에.”
나는 순간 놀라서 작게 신음했다. 동시에 뇌리에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얼굴을 재빨리 지웠다.
“마물을 불법으로 소유할 수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마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각종 이유로 거래되곤 합니다. 신비하고 희한하게 생긴 것들은 관상용으로 거래되는데, 순전히 약이나 독을 얻기 위해 거래되는 것도 제법 있지요.”
“그렇군요.”
“그런 마물들을 전문적으로 잡아들이는 사냥꾼들도 있고요. 하지만 모두 불법이라, 보통 뒷세계에서나 자행됩니다.”
불법, 그리고 뒷세계. 이번엔 그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물론 카셀이 어떤 경로로 마물의 독을 손에 넣은 건지 아주 눈치를 못 채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레어넌 단장의 입을 통해 듣는 건 무게감이 사뭇 달랐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온갖 위험한 일을 하는 길드장과, 정의를 위해서라면 네 일 내 일 할 것 없이 발 벗고 나서는 기사단장.
‘아니, 이건 완전히 자석의 N극과 S극 아니냐고!’
서로 너무 다르다 못해 죽을 때까지 웬만해선 만날 수 없는 사이다. 아니, 아니다. 오히려 마주쳐서는 큰일 나는 사이! 나는 남몰래 마른침만 삼키다가 그가 시선을 돌린 사이 얼른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니 정말 무섭네요.”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법을 강화해도 소용없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레어넌의 입에서 나지막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반듯한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에는 일반 사람들까지 꾐에 넘어가 불법적인 일을 돕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다 붙잡히면 초범임을 강조하며 눈물 어린 호소와 함께 자비를 구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누구보다도 남을 위해 앞장서는 선량한 정의의…….
“제게 걸린 이상 절대로 자비란 없습니다.”
“…….”
흔들림 없는 냉철한 목소리가 귓전을 강타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온몸을 우뚝 굳히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시선을 돌리자,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고 냉철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제야 내가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레어넌 단장이 한없이 자비롭고 선량한 건, 정의를 해치지 않는 사람들을 도울 때뿐이다. 눈앞의 사람을 돕는 게 옳고 정의로운 일이 될 때.
‘반대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정의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일을 저지른다면…….’
……그땐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사자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인물로 변하게 된다는 소리다. 내가 어쩌다 카셀을 알게 된 걸까. 어째서 겁도 없이 카셀의 일을 도와준다고 했을까. 아니, 애초에 주인공 후보는 왜 되어 버린 걸까! 후회와 자책, 한탄이 차례대로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초범이니 제발 한 번만 봐 달라고 울며불며 비는 나와, 가차 없이 고개를 흔드는 레어넌 모습이 저절로 그려져 나도 모르게 두 눈이 꽉 감겼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아무래도 또 다른 오해를 낳은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제가 쓸데없이 또 무서운 이야기를 한 모양이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로렐라 님 같은 분은 그런 범죄자들과 스칠 일조차 없을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얼굴과 이름과 본거지의 주소까지 다 압니다. 그런데도 함구할 수밖에 없어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입술을 꽉 짓깨물며 속으로 목 놓아 외쳤다.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레어넌은 또다시 믿음직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번 바자회장 사건처럼 무서운 일을 겪지 않으시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지켜드릴 테니 안심하십시오.”
“네? 아뇨. 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는걸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레어넌은 다 안다는 듯 따듯한 미소를 만면에 띠었다.
“제 앞에서는 그렇게 씩씩한 모습만 보여 주려 노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저는 아니까요. 당신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리고, 마음도 약한 분이라는 걸.”
‘아니, 진짠데.’
사실 바자회장에서 무서웠던 건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내가 잡히는 것.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레어넌은 다소 쑥스러운 기색으로 웃더니, 단호한 말투로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군요.”
“뭐가……요?”
“국경에 가서도 계속 당신만 생각난 이유가.”
순간, 두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훤히 보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람에 살랑거리는 그의 긴 금빛 머리칼만 보았다.
“잘 계시는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레어넌은 잠시 말을 멈추며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살짝 귀 뒤로 넘겨 주고는 이내 멀어졌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30,000주를 구매했습니다!」 「단장님, 왜 자꾸만 비를 내리시는 거예요! 심장마비!」 비록 작정하고 만든 상황은 아니지만 많은 주식이 팔려 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함박웃음을 지었겠으나 나는 여전히 레어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빨리 무슨 수를 써야만 해.’
이대로 가면 주접킹 님을…… 아니, 레어넌 단장님을 영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안 된다고! * * * 같은 시각. 정원의 커다란 나무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움직였다.
“……하.”
푹 뒤집어쓴 후드 아래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는 아랫입술을 내민 채 위로 후,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은발이 눈썹 위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편지 곳곳에 초조한 마음과 걱정이 잔뜩 묻어나기에 일부러 여기까지 보러 온 건데…… 저건 또 무슨 광경이야?
“레어넌 기사단장이라…….”
그가 지독히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수줍어하고 있었다. 레어넌 기사단장은 새하얀 정복과 잘 어울리는, 기품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로렐라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붉은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꼭 그만큼 얼굴을 발그스레 물들였다. 정말이지 그림 같은 한 쌍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손을 뻗어 로렐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긴 순간, 카셀은 눈이 가려질 정도로 후드의 천을 잡아당기며 돌아섰다. 어쩐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