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나 X 된 거 같아2021.12.04.
바자회 이후, 파종제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위축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온 행상들은 아예 성내 출입을 금지당했고, 수도 없이 늘어서 있던 천막들도 절반은 철거되었으며, 예정되어 있던 행사 역시 줄줄이 취소되었다. 아우레아 내에서 힘깨나 쓰던 홀턴 후작에게 해괴한 변고가 생겼는데, 눈치 없이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은 없었던 탓이었다. 후작이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사경을 헤맨다는 소문이 돌자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시계를 도둑맞은 충격에 몸져누운 게 아니냐고 떠들어 댔다. 전말을 알고 있는 나는 내심 불안했지만, 카셀의 말을 굳게 믿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금방 깨어날 거라고 했으니까, 곧 잠잠해지겠지?’
하지만 그 생각이 박살 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작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진 것이다. 몸 안쪽이 간지럽다 못해 타는 것 같다며 제발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다가 까무룩 기절하길 반복한단다.
“아니, 분명 금세 괜찮아질 거라고 그랬는데……!”
나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낮에 사교계의 소식통인 르웬 백작 부인과 나눈 대화 때문인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유명하다는 의사들은 죄다 불러들였대요. 수도는 물론이고 국경에 있는 사람까지요. 그런데도 정확한 병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나요. 그래서 이번엔 신전에 도움을 요청했대요.’
‘시, 신전에요?’
‘네, 병이 아니라면 저주 말고 더 있겠어요? 벌써 그 이야기로 다들 떠들썩해요. 아우레아에도 신전이 있는 게 정말 다행이에요.’
그나마 내게 다행스러운 건 그날 후작이 먹은 음식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거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와 함께 먹고 마셨던 다른 사람들은 전부 멀쩡하니까. 아마 후작이 마신 술잔에만 반응을 일으킨다는 나머지 독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의심을 받는 일은 없었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거 말고도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거 아냐?’
과자에 마물의 독을 발라 놓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들켜 놓고도, 미안하다며 그저 헤헤 웃던 태평한 얼굴을 떠올라 불안감이 엄습했다. 카셀과 엮이면 어떤 식으로든 수명이 단축될 것만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불길한 예감이 이렇게나 잘 맞아떨어질 줄이야. 그때, 활짝 열어 둔 창문가를 통해 은빛 날개를 가진 작은 새가 파다닥 날아들었다. 길드에 배달부가 들락거릴 수는 없다면서 언제든 연락이 필요할 때 쓰라고 카셀이 준 새였다. 나는 다급한 손길로 새의 발목에 묶여 있던 쪽지를 풀었다. [괜찮아, 괜찮아.] 지금까지 아우레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후작의 상황은 어떤지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보고하듯 써 내려간 내 편지에 비해, 답장의 첫 줄은 맥이 탁 풀릴 정도로 태평했다. [신전에선 절대 못 알아낼걸. 금방 깨어날 줄 알았는데, 독의 양이 좀 과했나?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과했냐니, 지금 그걸 설마 나한테 묻는 거야?! [정 불안하면, 내가 곁에 있어 줄까?]
“아니, 오지 마. 절대 오지 마!”
마지막 줄을 읽은 순간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쳐 버렸다. 안 그래도 경비가 삼엄한데, 카셀이 여기로 돌아오면 범인은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걸 증명하는 꼴밖에는 안 됐다. 나는 온갖 부정문을 전부 다 끌어다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게 새를 날려 보내고 증거물이 될지도 모르는 편지를 태운 후, 안락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카셀이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그러니 지금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를 믿을 수밖에……. 그를 믿어…….
“못 믿겠어!”
나는 고작 1분 만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내가 아는 거라곤 카셀이 기가 막히게 예쁜 외모의 길드장이라는 것뿐인데. 아, 하나 더 있다. 정작 중요한 건 슬쩍 빼고 알려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그런 그를 믿느니, 차라리 ‘그 새끼 남주 아니죠?’ 님이 펠리어트를 남주로 밀고 있다는 걸 믿는 게 낫겠다! 난 그저 열심히 주식을 팔아 보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이러다 진짜 큰일이 생기는 거 아닐까. 만약에 후작이 정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렵사리 한숨을 내쉬었다. * * * 요 며칠간 나는 주위의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무언가 새로운 소식은 없는지 계속해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신전에선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극비에 부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별다른 해결법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후작의 용태는 여전히 변함없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초조한 마음을 억누른 채, 서재에서 진득이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그간 주식을 팔겠다고 계속 밖으로 나돈 탓에 알게 모르게 일이 잔뜩 쌓인 탓이었다. 세금 보고도 해야 했고, 무도회 이후 꾸준히 들어오는 초대장에 참석 여부를 알려 주는 답장도 써야 했으며, 저택 관리를 위한 시종들의 건의에도 답을 해 주어야 했다. 이렇게 일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집중해서 하나둘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열어 놓은 창문 밖으로 뭔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있는 힘껏 고개를 빼 바깥을 살피니, 저 멀리 대문 밖에 서 있는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눈에 익은 듯한……. 어?!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황급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꺄악.”
너무 문을 벌컥 연 탓에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하녀와 부딪힐 뻔하기까지 했다.
“미안……!”
나는 고개를 돌려 재빨리 사과하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 그가 돌아갈까 봐서.
“레어넌 단장님!”
정원으로 나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뒤돌아서던 몸이 멈칫했다. 나풀거리는 붉은 머리칼 사이로 나를 돌아보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조금 쑥스러운 듯,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는 햇살 같은 미소가 두 눈에 가득 찼다. 동시에 내 호흡도 가빠지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그의 곁으로 다가간 나는 활짝 웃으며 고양된 목소리로 외치듯 물었다.
“아직 국경에 계신 줄 알았는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게…….”
레어넌은 살짝 목을 가다듬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국경으로는 안 가셔도 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완전히 철수하는 길입니다.”
“다행이네요!”
반가움과 기대감, 그리고 흥분으로 인해 목소리가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사실은 지나는 길에 이것만 전해드리고 가려 했는데…….”
그는 다급히 정복 안쪽에서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주셨던 서신에 대한 답장입니다.”
“이걸 위해 여기까지 일부러 오신 거예요?”
“……아, 아닙니다. 정말,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딱딱하게 끊어지는 말투와 새빨간 얼굴. 태어나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티가 났다. 나는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를 바라보며 남몰래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마냥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문득 그를 너무 오래 우두커니 세워 두고 있단 생각이 들어 한 발자국 자리를 비키며 길을 열어 주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차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오랜만이잖아요.”
“그렇군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세상 둘도 없는 다정한 미소가 쏟아졌다. 레어넌은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는 금발 머리를 부드럽게 휘날리며 나를 따라 저택 안으로 향했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조이는 물론이고, 그를 본 고용인들은 모두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펠리어트가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대였다. 나는 응접실 소파에 앉자마자 조이에게 부탁했다.
“조이, 차 좀 준비해 줄래?”
“네, 네. 그럼요! 두 분 부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조이는 웃으며 밖으로 거의 달리듯 나갔다. 이윽고 복도 밖에선 수선을 피우는 하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레어넌과 눈을 마주치는 게 어쩐지 쑥스러웠다. 나는 괜히 소매에 달린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로렐라 님도요.”
레어넌의 손과 목 근처가 살짝 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일이 퍽 고되었는지 얼굴이 좀 야위어 보여 안타까웠다.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라 뭐부터 물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찰나.
“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로렐라님께는 별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밝아 보이셔서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네? 이야기라뇨?”
“홀턴 후작이 원인 불명의 독을 먹고 쓰러진 날 바자회에 계셨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순간 나는 입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아, 네.”
“신전에서도 애를 먹고 있는 것 같더군요. 홀턴 후작은 오랫동안 황궁에 충성을 다했던지라, 폐하께서도 소식을 듣고 정식으로 사명을 다하라 명하셨습니다.”
“폐, 폐하께서요……?”
눈앞이 새하얗게 부서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증상에 관한 보고도 받았는데, 독니에 부상을 입었던 병사들과 비슷한 증상이라 아무래도 마물의 독을 쓴 것 같더군요. 물론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 하는 일이긴 합니다.”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수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깜짝 놀란 레어넌이 벌떡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내 어깨를 다정하게 잡아 주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마치 전속력으로 뛴 사람처럼 가쁜 숨을 억지로 들이마시고 내쉬며 어질어질한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그러자 크고 따듯한 손이 내 어깨를 상냥하게 토닥여 주었다.
“얼굴이 창백합니다, 로렐라. 많이 놀라셨군요.”
이윽고 그는 키를 낮춰 걱정이 담뿍 담긴 푸른 두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젠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세상 든든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