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누나 믿지?!2021.12.01.
입구를 가린 휘장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보일 정도로 출구가 가까워졌다. 몇 걸음 남지 않았는데도, 내게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빨리 시계를 찾아! 어서!”
“의사는! 아니, 어서 의사부터 불러오라고!”
여기저기서 크게 외쳐 대는 사람들의 고함과 쉴 새 없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내 신경을 자꾸만 잡아당겼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뒤를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카셀이 손을 뻗어 휘장을 재빠르게 걷었다. 밖으로 나서자 어두웠던 실내와는 달리 밝은 햇살이 쏟아졌다. 아프도록 눈이 부셔 질끈 감았다 뜬 그때였다.
“이쪽입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아까 초대장을 체크하던 남자를 선두로 몇몇 병사들과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이쪽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앗……!”
내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카셀이 내 어깨를 꽉 안은 채 그대로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정신도 없고 긴장한 탓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윽고 작은 공간 안으로 몸이 밀어 넣어졌다. 후끈한 공기가 얼굴을 감싸는 동시에 등 뒤에 푹신한 무언가가 닿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보니 낯선 마차 안이었다. 천막 입구에 세워져 있던 마차 중 하나에 숨어든 모양이었다.
“카…….”
“쉿.”
내가 입을 열자마자, 카셀이 검지를 입술에 올린 채 창문에 쳐진 커튼 틈 사이로 바깥을 살폈다. 마차 바닥에 주저앉아 덩달아 숨을 죽이는데, 바로 옆을 지나가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야말로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고작 몇 초뿐인 그 찰나가 마치 몇 시간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멀어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혹시 주변엔 수상한 기색이 없는지 살펴봐라.”
“예, 알겠습니다.”
멀리서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 마차 커튼 사이로 인영을 봤나? 그도 아니면 수상한 기척을 느낀 건가?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다. 차마 창밖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물었다. 끼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병사는 우리가 숨은 곳 말고 다른 마차의 문을 연 듯했다. 하지만 고작 몇 대뿐이니 이 문을 여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걸 어떡하면 좋지? 슬쩍 시선을 돌리자, 카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이윽고 마차 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병사는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손길로 두 번째 마차의 문을 열었다. 다음은 우리가 숨은 마차일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아주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마. 죽이진 않을게.”
뭐? 믿기지 않는 소리에 놀라 되물을 새도 없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날카로운 단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비록 한 뼘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크기였지만, 손안에서 빛나는 시퍼런 날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아니, 대체 저건 어디서 저렇게 끝도 없이 나오는 거야! 그러나 그것보다 더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난동을 부리며 3,000주를 구매합니다.」 「키갈해! 키갈! 키갈! 키갈! 키갈!」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에 이어, 이번엔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맞받아칠 뻔했다. 미치셨습니까! 휴먼?! 지금 상황에서 무슨 키갈을……!
‘잠깐만, 키갈?’
그래, 어쩌면!
“카셀……!”
나는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만큼이나 재빠르게, 그가 바자회장을 빠져나오기 전 다시 뒤집어쓴 망토를 쥐어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 누나.”
하지만 카셀은 내가 불안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지, 여전히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런 잔챙이 수십 명이 몰려와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으니까.”
물론 악명이 자자한 ‘검은 뱀 길드’의 길드장이 고작 병사 몇 명을 따돌리지 못해 잡힐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진즉 황궁에서 잡아들였겠지.
‘근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카셀이야 변장까지 했으니 병사를 공격하고 빠져나가기만 하면 끝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뒤를 쫓던 병사가 내 인상착의만 말해도 금방 잡힐 게 뻔했다. 홀턴 후작이 갑자기 쓰러질 거라는 것도 미리 들은 적 없는데, 이것보다 더 일이 커지는 건 사양이다. 게다가…….
‘박진감 넘치게 20대 1로 싸운 끝에 무사히 탈출했다, 로 주식이 팔리는 건 네가 주인공일 때 이야기고…… 이건 무엇보다 로맨스 판타지라고!’
그새 남자의 발소리는 지척까지 다가왔다. 더 이상 지체할 틈이 없었다.
“카셀, 고개 숙여.”
“뭐……?”
나는 단도를 쥔 그의 손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를 낸 그 순간.
“누나 믿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마음을 담아 카셀의 망토 앞섶을 내 쪽으로 당겼다. 단숨에 숨결이 가까워졌다. 따듯한 체온이 맞닿기 일보 직전, 마차 바닥으로 단도가 떨어졌다. 재빨리 치맛자락으로 그것을 숨기자, 비로소 의도를 눈치챈 카셀이 커다란 손으로 내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입술이 비껴간 상태로 맞닿았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입술이 카셀의 입매 끝에 자리한 짙은 볼우물을 꾹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활짝 열리고 마차 안으로 빛이 쏟아졌다.
“헉……!”
낯선 남자가 놀란 듯한 숨소리를 내었다. 나는 황급히 입술을 떼고 카셀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목을 감싸 안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뭐 하는 거예요?!”
“아, 그게…….”
병사는 당황했는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 댔다. 복장이나 태도로 보건대, 정식 기사가 아닌, 일반 하급 병사인 듯했다.
“무례하군요! 당신은 노크도 할 줄 모르나요?”
“죄, 죄송합니다.”
앙칼지게 말을 내뱉자 그는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입술 옆으로 진하게 번진 립스틱. 지금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축제를 틈타 밀회를 즐기는 귀부인처럼 보일 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수상한 자가 숨은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가 변명하듯 더듬더듬 입을 여는데, 천막 쪽에서 소란스러운 고함이 들려왔다.
“왜 못 나가게 하는 건가! 당장 비키게!”
“죄송하지만 범인이 잡힐 때까진 누구도 회장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위험한 자가 이 안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래도 회장 밖으로 나가려는 귀족들과 상황을 통제하려는 병사들 간에 충돌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귀족들의 반발이 워낙에 거센 탓에 회장 앞을 막아선 사람들이 점점 열세에 몰리는 게 보였다.
“죄송했습니다!”
결국 마차 문을 가로막고 서 있던 병사 역시 상황을 확인하더니 내게 다시 한번 넙죽 사과를 건네곤 그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나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빨리 나가자……!”
그러자 카셀이 끄덕이고는 내 손을 잡고 앞장섰다. 마음 같아선 턱 끝까지 숨이 차도록 뜀박질을 하고 싶었지만, 의심받지 않기 위해선 태연한 척해야 했다. 우리는 수많은 인파 속에 숨어 최대한 평범하게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인 것처럼 굴며 바자회장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소란이 들리지 않는 곳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아…….”
심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두근두근 뛰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긴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소원이 이뤄진 것에 기뻐 날뛰며 50,000주를 구매합니다.」 「우리언니(于里言尼) 개조아여(開早牙余) 하고풍거(河鼓風去) 삭다해라(削多海蘿) 좌로인정(左虜人正) 우로인정(右虜人正) 압구루기(狎鷗漏器) 대굴대굴(大窟大窟).」 나는 반짝거리는 화면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5만 주라는 숫자보다 더욱 두 눈에, 그리고 가슴에 깊이 박혀 들어온 그 문장. 바로 ‘우리언니 개조아여’라는 메시지 덕분에! 순간적으로 가슴에 울컥함이 차올랐다. 내가 좋대. 내가 개좋대! 나랑 엮인 남자들이 아니라, 그냥 내가 좋대! 나는 있는 힘껏 방방 뛰며 기쁘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도 카셀의 손을 꼭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 * * 카셀은 그 후 로렐라와 함께 곧장 그녀의 저택으로 향했다. 계획대로라면 아침에 접선했던 그 장소에서 마차를 갈아탔겠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카셀. 저, 정말이야?”
마차에서 내리기 전, 작은 종이쪽지를 건네받은 로렐라의 입술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정말 이런 걸 나한테 알려 줘도 돼……?”
“응. 괜찮아.”
그녀에게 길드 본부 위치를 알려 준 건 역시 너무 충동적이었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셀은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원래 그런 걸 고민하는 성격도 아니고, 무엇보다 하고 싶은 건 참지 않고 바로 해야지 직성이 풀렸으니까. 왜 갑자기 말해 주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지금부터 차차 생각해 봐야겠지.
“그, 그보다…… 홀턴 후작은 정말 괜찮은 거지? 죽인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오늘 자정쯤이면 깨어날 거야. 목숨에는 지장 없어, 걱정 마.”
사람의 사지를 마비시켜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만드는 독이지만, 생명에 지장은 주지 않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후작이 바자회 내내 시계에 신경 쓸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자랑하고 싶어서 냉큼 출품은 했는데, 혹여라도 애지중지하는 보물에 흠이 생기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못할 게 뻔했다. 그리고 역시나. 홀턴 후작은 바자회 내내 시계가 들어 있는 유리 상자 근처에서 조금도 벗어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기절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가 쓰러지고,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틈을 타 상자 속 시계를 몰래 꺼내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후작은 아마도 곧 의식을 차릴 것이다. 물론, 차라리 의식이 없던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사흘간 먹거나 마실 수 있기는커녕, 그저 침을 삼키기만 해도 목구멍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 아프고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손에 닿지도 않아 긁을 수도 없는, 안쪽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괴로운 감각. 그것만큼 극심한 고통도 없었다. 그러게, 알면서도 길드의 것에 왜 손을 대. 카셀은 주머니에 넣어 둔 시계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며 조용히 생각했다. 그간 이 독을 마시고 괴로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울부짖던 사람들의 얼굴 또한 떠올랐다. 감히 길드의 물건을 탐했으니, 사흘 정도 괴롭혀 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감쪽같이 숨긴 채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걱정 마. 누나가 준 과자에 바른 것과 내가 건네준 커피 술에 탄 게 합쳐져야 비로소 효과를 발휘하는 독이니까. 마물한테서 추출한 거라 뭘 먹었는지 알아내는 것도 한참 걸릴 거야.”
“그렇구나…….”
로렐라는 여전히 걱정하는 듯 심각한 얼굴이었지만, 곧 털어 버린 듯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카셀을 향해 눈을 흘겼다.
“과자에 아무것도 안 넣었다더니, 순 거짓말쟁이잖아?”
한껏 뾰로통하게 입을 내민 채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카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미안. 정말 미안.”
뾰족하니 눈초리가 제법 매섭게 저를 노려보고 있는데도, 그는 한동안 계속 키득거렸다. 진정한 뒤인데도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대신 약속대로 데이트하자. 제대로.”
“제대로?”
“응. 누나가 가고 싶은 데라면 어디든 다 좋으니까.”
이전에 그녀를 놀리기 위해 지금 데이트하는 거라 말한 적은 있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겨우 언덕 따위를 오르내린 게 무슨 데이트라고. 무엇보다 오늘 회장을 우아하게 누비며 귀족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로렐라의 모습을 보고 솔직히 신경이 쓰였다. 자신이 진짜로 그런 걸 데이트라고 여기는 줄 알까 봐.
“왜, 제대로 된 데이트하기 싫어?”
“아, 아니.”
잠시 두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작게 웅얼거렸다.
“좋아. 데이트……하자.”
조금만 고개를 틀었어도 바로 입술이 닿을 만한 곳까지 과감히 다가올 땐 언제고, 고작 데이트라는 단어에 저토록 부끄러워하다니. 근데 저놈의 허공엔 대체 뭐가 있기에 왜 자꾸만 배시시 웃으면서 쳐다보는 거야? 정말이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같이 있으면 너무 재미있어서. ……아니, 즐거워서. 여전히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로렐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셀의 입꼬리도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 * * 로렐라가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카셀은 곧장 마차를 돌렸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아우레아를 막 벗어나기 직전 잠깐 멈춰 섰다. 그 틈을 타 누군가가 나는 듯 올라탔다. 카셀을 옛날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필하던 길드원 중 하나인 시드였다.
“고생 많았어, 카셀.”
“아니야. 고생은.”
워낙 오랜 시간 함께해 온지라 이제는 정말 가족 같은 사이였다. 그래서 둘은 서로를 부르는 호칭에서도 친근함이 묻어났다.
“지금 홀턴 후작가 상황은 어때?”
“명의란 명의는 다 불러들였지, 뭐. 뻔한 거 아니겠어?”
그 대답에 곰곰이 생각에 빠진 카셀을 바라보던 시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왜. 이번에도 해독제로 한몫 뜯어내게?”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마물의 독을 섞어서 쓰는 것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마물의 독 자체가 구하기 어려웠다. 운 좋게 판매하는 사람과 만난다 해도 무척이나 비싸며, 무엇보다 제조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를 만나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쪽 방면으로 거대한 연결망을 가지고 있는 검은 뱀 길드 정도나 되어야 쓸 수 있는 방법이니, 설명이 더 필요 없었다. 이번에 쓴 독은 해독제가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회복되는 것이긴 하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은 그걸 알 길도 없을뿐더러, 안다 해도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제발 해독제를 팔아 달라며 사정사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이중으로 남겨 먹을 수 있는 이 장사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차는 다시 어두운 거리를 달려 어딘가를 향했다. 바로, 홀턴 후작의 저택이었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카셀은 후작의 머리맡에 서서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이 방 밖에선 시드가 의사 행세를 하며 후작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을 것이다. 주인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혼란해진 저택에 숨어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침대에 누워 빈사 상태로 끙끙대고 있는 놈의 낯짝을 보니, 아까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맛만 좋으면 투자를 해 줄지도 모르지.’
그 안에 담긴 저질스러운 뜻을 모를 정도로 카셀은 순진하지 않았다. 상자를 가져가며 로렐라의 손을 훑던 것까지 생각해 보면 명백했다.
“추잡한 노인네.”
늙으려면 곱게 늙든가. 카셀은 욕설을 퍼부으며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을 날리고는 그 안에 든 검은색 액체를 그대로 후작의 입에 거침없이 부었다. 이윽고 후작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꿀렁였다. 이 수상쩍은 액체의 정체는 과자와 커피에 각각 발라 두었던 마물의 독을 합쳐 놓은 것이었다. 낮에 놈의 입으로 들어간 게 사람을 딱 사흘 동안 초주검으로 만드는 양이라고 했으니까…….
“이건 못해도 30일 정도는 되려나?”
카셀이 빈 병의 사이즈를 눈대중으로 가늠해 보며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