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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진짜로 잘라 버릴까 (43/173)

43화. 진짜로 잘라 버릴까2021.11.27.

나는 카셀의 팔을 잡은 채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앞에 보이는 보랏빛 천막, 바자회장이었다. 근처로 다가서자, 임시로 세운 듯한 커다란 아치 형태의 기둥이 보였다. 그 너머에 하얀색 휘장을 드리운 천막의 출입구가 있었다.

16550620956759.jpg“실례합니다. 여기서부턴 초대장이 있어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때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가 나와 카셀을 막아섰다.

16550620956764.jpg“여기 있어요.”

나는 생긋 웃으며 그에게 금빛 밀랍 인장이 찍힌 봉투를 내밀었다. 바자회에 초대한다는 서신과 함께 온 것으로, 밀봉된 채로 가지고 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남자는 능숙하게 레터나이프로 봉투를 찢고는 안에 든 종이를 샅샅이 살폈다. 혹여 복제해 만든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16550620956759.jpg“로렐라 메이레드 님?”

16550620956764.jpg“네에.”

16550620956759.jpg“옆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16550620956764.jpg“내 시종이에요.”

봉투를 돌려주며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셀을 유심히 살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표정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예쁘게 꾸민 것까진 좋았는데, 후드를 푹 뒤집어쓴 것도 모자라 얼굴을 반쯤 가린 탓에 아무래도 수상해 보인 듯했다.

16550620956764.jpg“아, 저기에 제가 준비한 과자가 있네요!”

발끝까지 내려간 시선이 다시금 카셀의 얼굴 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남자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남자 역시 뒤를 돌아 내 손끝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천막 입구의 바로 옆쪽엔 마차 서너 대가 일렬로 서 있었다. 바자회장에서 쓸 물품들을 실어 나른 것이었는지 근처에는 아직 안으로 나르지 못한 상자들이 놓였다. 물론, 내가 레아에게 급히 주문한 디저트가 포장된 상자들도 거기 있었다. 가게에 있는 것을 전부 사들였으나 턱없이 모자랐는데, 고맙게도 레아가 밤늦게까지 열심히 구워 준 덕분에 생각했던 수량을 맞출 수 있었다.

16550620956764.jpg“아니, 잠깐. 저걸 뜨거운 햇볕 아래에 그대로 놓아두면 어쩐담?!”

내가 올 때까지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부탁한 건 나였지만, 아닌 척 일부러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물건을 나르던 인부들은 물론이고, 우리를 잡아 둔 남자도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재빨리 카셀을 끌고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가 어영부영 우리를 따라와 준 덕분에 내 이름이 크게 적힌 상자들을 보여 줄 수 있었다.

16550620956764.jpg“어서 이걸 안쪽으로 옮기렴. 크림이 녹았을 수도 있으니까, 절대 흔들리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여. 알겠니?”

16550620956841.jpg“네, 주인님.”

카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주인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시종처럼 잽싸게 상자를 두 손 가득 들어 올렸다.

16550620956764.jpg“이건 아우레아에서 제일 유명한 디저트 판매점의 과자들이랍니다. 전부 제가 기부한 거예요.”

여전히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카셀을 훑어보고 있길래 나는 얼른 사이를 비집고 서서 거만한 척 턱 끝을 들며 말했다.

16550620956764.jpg“가격으로만 따지면 금화 열 닢으로도 어림없겠지만, 바자회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 저희 단골손님들께서도 많이 찾으시고, 멀리서 오신 분들께도 홍보할 만한 기회가 될 테니까요. 사업을 하려면 눈앞의 돈보다 더 큰 이익을 볼 줄 알아야 하는 법 아니겠어요?”

16550620956759.jpg“아, 네…….”

쓸데없는 수다가 시작된다고 느꼈는지 남자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별다른 말 없이 묵례를 건네고는 잠시 비워 놨던 자신의 자리로 휘적휘적 돌아갔다.

16550620956764.jpg“후우.”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벌써 저만치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는 카셀의 뒤를 급히 따랐다. 그러자 그가 발을 늦춰 주더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16550620956841.jpg“이제 봤더니 누나, 연기에 소질이 있네.”

가면 속의 붉은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동조했다.

16550620956764.jpg‘주식 덕분에 새로 발견한 재능이란다.’

우리는 무사히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이미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물론 황궁 무도회에 견줄 바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값비싸 보이는 드레스와 장신구를 두르고 있었다. 아우레아의 유력 가문부터 다른 지역의 귀족들까지 모두 온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사람들 사이로 마치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조그마한 유리 장식장들이 군데군데 놓인 것이 눈에 띄었다. 그뿐만 아니라 천막의 둥근 벽을 따라 늘어서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는, 자잘한 장신구나 은식기 같은 것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모두 판매되는 물건들이리라. 귀족들은 다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느라 회장 안으로 누가 들어왔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카셀의 차림새를 수상쩍게 여긴다거나,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다.

16550620956841.jpg“저 사람이야.”

그때 카셀이 어딘가를 향해 슬쩍 턱짓했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고급스러운 정복으로 뚱뚱한 배를 가린 채 와인잔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웃음소리는 유난히 컸고,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가 이야기를 하고 나면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긴 줄이 달린 동그란 무언가가 들어 있는 유리 상자가 보였다.

16550620956764.jpg“저 사람이 홀턴 후작이구나.”

원래 길드의 보물이었다는 값비싼 회중시계를 손에 넣은 사람.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목표물을 확인하니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긴장됐다.

16550620956841.jpg“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뒤쪽의 빈 테이블에 들고 있던 디저트 상자들을 모조리 올려 둔 카셀이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나와는 달리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긴장이 다 뭔가. 마치 재미있는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줄곧 기다리다 드디어 순서가 돌아온 사람처럼 두 눈을 반짝이기까지 했다.

16550620956841.jpg“그럼 이야기한 대로 잘 부탁해. 주인님.”

16550620956764.jpg“으, 응…….”

가볍고 경쾌한 몸짓으로 빙글 몸을 돌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쩐지 무척이나 들떠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카셀은 분명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데. 주식을 팔아야 내가 사는 것도 맞긴 한데.

16550620956764.jpg‘쟤랑 계속 함께 있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수명이 단축될 거 같단 말이지.’

나는 불현듯 엄습하는 불길한 생각에 바싹 말라 오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 * * 주최 측이 고용한 사람들이 상자에서 곱게 포장된 디저트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는 동안, 카셀은 어딜 갔는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멍하니 테이블 앞에 서 있던 나는 곁에서 열심히 세팅 중이던 시종 한 사람을 붙잡고 말을 건넸다.

16550620956764.jpg“죄송한데 브랜든 백작 부인은 어디 계시나요?”

16550620956759.jpg“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모셔오겠습니다.”

시종은 재빨리 어디론가 향했다가 곧 화려한 차림의 한 귀부인과 함께 돌아왔다. 아마 저 사람이 바자회를 총괄하는 브랜든 백작 부인인 모양이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16550620956759.jpg“로렐라 님, 처음 뵙겠습니다. 올해 바자회에 이렇게 큰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6550620956764.jpg“아닙니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역시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우리는 몇 마디 형식적인 덕담을 주고받았다. 백작 부인은 디저트에 관심이 있는 듯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만 힐끔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테이블은 어느새 레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보석처럼 예쁜 과자들로 가득했다.

16550620956764.jpg“오늘 바자회를 위해 부디 마음껏 써 주세요.”

나는 한발 물러나 그녀가 맘껏 디저트를 볼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리고 카셀이 부탁해 따로 빼 둔 작은 상자를 챙겨 손에 쥐었다.

16550620956759.jpg“어머나, 예뻐라!”

16550620956764.jpg“다들 좋아해 주셔야 할 텐데요.”

16550620956759.jpg“좋아하다마다요……!”

백작 부인은 무척이나 들뜬 표정으로 디저트들을 구경했다. 그녀의 지시를 받은 시종들도 과자를 은쟁반 위에 예쁘게 옮겨 담아 회장을 누볐다. 그사이 디저트를 발견한 귀족들도 테이블 근처로 다가왔다. 백작 부인은 환한 미소로 나를 그들에게 직접 소개해 주었다.

16550620956759.jpg“다들 인사 나누세요. 로렐라 메이레드 님이십니다. 오늘 바자회를 위해 정말 아낌없는 기부를 해 주셨어요.”

16550620956759.jpg“반가워요, 메이레드 양.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평소 무척이나 만나 뵙고 싶었어요.”

16550620956759.jpg“저도 그 가게의 단골이에요.”

사람들은 즐거운 듯 담소를 나누며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회장 곳곳엔 술과 함께 다른 핑거 푸드도 놓여 있었지만, 분위기를 띄우는 데에는 역시 눈으로 먼저 즐기는 예쁜 디저트가 최고였다. 덕분에 바자회장은 한층 더 활기가 돌았다. 얘기를 듣고 내게 인사하기 위해 부러 찾아오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황궁 무도회 때 한 번 경험해 본 덕분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백작 부인이 소개해 주는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가야 할 곳으로 착실히 걸음을 옮겼다. 바로, 홀턴 후작의 곁으로.

16550620956764.jpg‘이걸 후작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나눠 주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나는 손에 든 상자를 바라보며 카셀과 미리 짜놓은 계획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이 안에 들어 있는 건, 고급스러운 케이스에 따로 개별 포장된 커다란 마카롱이었다. 레아가 평소보다 더 정성껏 만드느라 제법 고생했다. 나는 그런 레아가 고마워서 함께 가게에 남아 일손을 도왔다. 후작에게 접근하기 위해 따로 마련한 예쁜 상자에 과자를 담고 포장까지 마쳤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 후 가게 안쪽 서늘한 창고에 보관해 놓았던 상자를 새벽같이 싣고 온 건 카셀의 마차였다. 내가 중간에 갈아탄, 그 마차 말이다. ……설마 여기다 그사이에 독을 탄 건 아니겠지? 걱정되어 몇 번씩이나 물어보았고 그때마다 아니라는 대답을 듣긴 했다. 무엇보다 후작에게만이 아니라 골고루 나눠 주라고까지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막상 실행을 앞두니 또다시 불안감이 차올랐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지만 내게는 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왜? 데이트가…… 아니, 주식이 걸려 있으니까! 카셀은 귀족도 아니고 사교계와도 거리가 먼 데다가, 아우레아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니 호감을 쌓을 만한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에 실패하면, 앞으로 카셀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비싼 돈을 내고 길드에 의뢰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럴 만큼 돈이 많지도 않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16550620956764.jpg‘역시 마음을 다잡는 것에 돈과 주식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니까.’

나는 상자를 꽉 잡고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드디어 문제의 홀턴 후작에게 다가갔다.

16550620956764.jpg“안녕하세요, 후작님.”

살가운 미소와 함께 건넨 인사에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16550620956764.jpg“저는 로렐라 메이레드라고 합니다. 말씀만 많이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16550620956759.jpg“이야, 아까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대체 누구신가 했더니, 사업가로 유명하신 로렐라 님이셨군요.”

얼굴을 뒤덮은 자잘한 주름만큼이나 탐욕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의 후작이 히죽거리며 나를 추켜세웠다.

16550620956764.jpg“어머나, 유명하긴요. 저명하신 후작님께 비하면 모래알만큼이나 보잘것없는걸요.”

그때 브랜든 백작 부인이 얼른 곁으로 다가왔다.

16550620956759.jpg“안 그래도 소개를 드리려 했는데, 잘됐네요. 두 분 덕분에 성공적으로 바자회를 열 수 있었답니다.”

그러더니 기다렸다는 듯 내게 홀턴 후작이 기부한 시계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

16550620956764.jpg“와, 그렇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시계는 처음 봐요.”

나 역시 일부러 유리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었다. 가까이서 본 시계는 정말로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16550620956759.jpg“하지만 로렐라 님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그저 빛을 잃고 마는군요.”

……흉측한 눈길이 나를 위아래로 훑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거다. 뭐래, 이 미친놈이. 늙수그레하고 개기름이 번들번들한 얼굴이 느끼하게 미소 짓는 걸 보고 있자니 욕지기가 치밀었다. 나는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얼른 그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16550620956764.jpg“실은 오늘 후작님을 비롯해 여러 저명하신 분들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감히 나눠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16550620956759.jpg“허허, 그게 뭡니까?”

16550620956764.jpg“저희 가게에서 특별 제작 한 디저트예요. 여러분들도 괜찮으시다면 드셔 보세요.”

상자를 열고 과자를 내보이자, 아까부터 능글맞은 미소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의 측근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

16550620956759.jpg“참 예쁜 과자로군요. 저기 있는 것들보다 더욱 신경 쓴 것 같은데요?”

16550620956759.jpg“사실 우리는 핑계고 사실은 후작님께만 드리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특별히 예쁘게 만든 걸 보면요.”

16550620956759.jpg“참, 이렇게 인기가 많으시다니 너무 부럽습니다.”

단체로 머리에 총을 맞았나……. 그들은 멋대로 떠들며 과자를 베어 물었다. 덕분에 후작은 기분이 더욱 좋아진 듯했다.

16550620956759.jpg“단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뭐 성의를 봐서 먹어 볼까요.”

홀턴 후작이 내게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16550620956759.jpg“맛만 좋으면 투자를 해 줄지도 모르지.”

그러고는 능글맞게 속삭이더니 내 손을 손바닥으로 덮어 슬쩍 쓸어내리며 상자를 가져갔다.

16550620956764.jpg‘악!’

노골적인 희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정강이를 걷어찰 뻔해, 발끝에 단단히 힘을 주어야만 했다.

16550620956764.jpg‘참자, 참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진정하려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아마도 내가 자신에게 잘 보이려, 혹은 가게에 투자를 받으려 접근했다고 단단히 착각한 듯했다. 아, 저 마카롱에 차라리 그냥 독이 들었으면……! 염원을 담아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후작과 측근들이 꾸역꾸역 과자를 처먹는 광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심지어 후작이 맛이 괜찮다며 측근들과 별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며 시간이 계속 흐르는데도 수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탁대로 하긴 했는데, 이제 뭘 어떻게 하면 좋지? 자신들도 꼭 한 번 먹어 보고 싶다고 내게 말을 거는 사람들에게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 환한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16550620956841.jpg“실례합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옆에서 기다란 팔이 불쑥 들어왔다.

16550620956841.jpg“커피 술인데 한잔 드시겠습니까?”

바로, 카셀이었다. 대체 언제 옷을 갈아입은 건지, 그는 바자회의 시종들의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들고 있는 쟁반 위엔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금빛 잔이 여러 개 놓였다. 새까만 액체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16550620956759.jpg“오, 그거 좋지. 단걸 먹어 마침 생목이 오르던 참인데.”

그 말에 카셀은 기다렸다는 듯 잔 하나를 집어 후작에게 건넸다.

16550620956759.jpg“나도 한 잔 주겠나?”

너도나도 손을 뻗는 측근들에게도 잔이 골고루 돌아갔다.

16550620956759.jpg“쌉싸름한 음료가 필요했던 참인데, 아주 마침맞게 잘 가져왔군.”

16550620956841.jpg“필요하시다면 더 가져다드릴 테니 말씀만 하십시오.”

카셀의 태도와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워서 마치 숙련된 시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빛은 몹시 싸늘했다.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질 않았다. 마치 굉장히 화가 난 사람처럼. 뭐가 잘못된 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조금 불안하던 찰나, 카셀이 내게 찡끗 눈짓을 건넸다.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사이 후작은 술을 다 들이켜고는 또다시 내게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16550620956764.jpg“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욕지기를 애써 참아내며 그에게 쌀쌀맞게 인사를 건넸다.

16550620956759.jpg“아니, 이제 얘기 좀 나눠 보려는데 왜 벌써 가십니까?”

16550620956764.jpg“방금 하신 행동을 보니, 저와 이야기가 통할 분이 아닌 것 같아서요.”

16550620956759.jpg“뭐, 뭣?”

홀턴 후작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지만, 상관없었다. 홀을 가로질러 입구에 가까워졌을 즈음, 슬쩍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후작과 그의 무리는 그 자리에 계속 모여 있었다.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어 내심 초조해졌다.

16550620956764.jpg‘이제 대체 뭘 어떡하려는 거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고개를 쭉 빼던 순간.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비명이 울려 퍼졌다.

16550620956759.jpg“꺄아악!”

16550620956759.jpg“후, 후작님!”

사람들 사이로 홀턴 후작이 바닥에 통나무처럼 쓰러져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나는 그만 자리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16550620956759.jpg“당장 의사를 불러와!”

바자회장은 순식간에 소란으로 가득해졌다. 시종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멀찍이 떨어진 사람들도 창백한 얼굴로 그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16550620956759.jpg“후작님께 지, 지병이 있었나?”

16550620956759.jpg“나야 모르지! 아무튼, 어서 의사를……!”

방금까지 함께 과자와 술을 먹던 측근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내 눈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열심히 찾고, 또 찾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지? 이제 어떡하면 좋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16550620956841.jpg“갈까, 누나?”

드디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620956841.jpg“많이 기다렸지?”

얼른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치니, 카셀이 입꼬리를 슬쩍 위로 들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재빠르게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16550620956764.jpg‘뭐가 잘못된 건가…….’

걱정이 차오른 나머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카셀의 손을 슬쩍 잡았다.

16550620956764.jpg“카셀, 괜찮아?”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갑자기 그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잠시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맞잡고 있는 손에서 거센 악력이 느껴졌다.

16550620956841.jpg“하, 그 새끼가 진짜 죽으려고…….”

동시에 거친 욕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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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20956764.jpg“왜, 왜 그래?”

깜짝 놀란 나는 카셀의 손에 거의 뛰듯이 이끌리며 물었다. 하지만 카셀은 대답 대신 여전히 손을 꽈악 잡은 채로 또다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16550620956841.jpg“……그냥 그때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버릴걸.”

음산하다 못해 살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대체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마치 얼어붙은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신 마른 침을 삼키며 그저 기계처럼 열심히 두 다리를 움직이던 그때였다.

16550620956759.jpg“시계가 없어졌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고함이 천막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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