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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주인님. (42/173)

42화. 주인님.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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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이후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축제 때 열리는 바자회에 관한 정보를 끌어모았다. 레아와 점원들은 물론이고 가게 손님들, 르웬 백작 부인까지 동원하니 짧은 시간 꽤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카셀이 되찾아야 한다는 물건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었다.

16550620714911.jpg“괜히 아우레아에서 가장 큰 축제가 아니죠.”

16550620714911.jpg“귀족 중에도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16550620714911.jpg“어머, 그럼요. 축제 마지막 날 있을 무도회가 워낙 성대하니까요. 아우레아 출신 귀족들은 대부분 그 무도회에서 데뷔탕트를 치르거든요.”

16550620714911.jpg“올해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홀터 후작께서 내놓은 회중시계죠. 작은 다이아몬드를 엮어 만든 줄에, 태엽제어 장치는 루비와 사파이어로 연결되어 있다면서요? 케이스까지 귀한 물소 가죽을 썼으니……. 금액이 어마어마할 테니 비록 살 수는 없겠지만, 구경만 해도 눈 호강 아닌가요?”

16550620714911.jpg“올해는 그것 때문에 수도에서도 주목하고 있으니 작년보다 손님이 더 많겠어요.”

모두가 하나둘 이야기를 보탤수록 내 입은 자꾸만 바싹 말라 갔다. 파종제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여러 행사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바자회는 생각보다 중요한 이벤트인 모양이었다. 특히 아우레아 사교계에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행사 같은데……. 덕분에 마음 한구석에는 걱정이 차올랐다.

16550620714979.jpg‘내가 너무 터무니없는 약속을 해 버린 건 아닐까?’

카셀이 신분을 철저하게 확인한다고 말해 줬을 때만 해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귀족이니 걱정도 없었고, 고작 바자회에 철저하게 확인해 봤자 얼마나 확인하겠냐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정말로 카셀을 거기에 데려가도 되는 걸까……? 나는 한참 고민한 끝에 묘안을 생각해 냈다. 카셀이 보다 안전하게 바자회장에 들어갈 수 있게끔 해 줄 묘안을. 그리고 곧장 내 나름대로 인맥을 총동원해, 가게의 디저트를 바자회장에 기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렸다. 축제까지 며칠 남지 않아서 시간이 촉박한지라 불안했지만 다행히 주최 측의 긍정적인 회신을 받을 수 있었다. 티 파티 멤버인 귀부인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아우레아에 워낙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었던 사람들이라 바자회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조해질 때면 날개 돋친 듯 팔렸던 주식을 보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행여 큰일이 생겨도 그게 주식을 못 팔아서 내가 죽는 것보다 큰일이진 않을 거야.’라고 몇 번이나 되뇌며. 아무튼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파종제를 여는 이벤트나 다름없는 바자회가 내일로 다가왔다.

16550620714979.jpg“좋아. 완벽해!”

나는 내 방 안에 선 갈색 머리 남자를 바라보며 흡족하게 손뼉을 쳤다. 하지만 갈색 머리 남자, 그러니까 카셀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해서 머리를, 정확히는 자신이 쓴 가발을 만지작거렸다.

16550620714986.jpg“왜 하필이면 갈색이야? 완전 나이 들어 보이는 색인데.”

……위너드가 들었으면 거품 물었겠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손에 든 고급스러운 자수가 새겨진 망토를 흔들어 보였다.

16550620714979.jpg“금발이나 적발 같은 건 너무 눈에 띄잖아. 이걸 입는다고 해도 앞에서 보면 어쩔 수 없이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보이니까.”

16550620714986.jpg“실내에서도 뒤집어쓰고 있어야 한다니…….”

16550620714979.jpg“대신 장식용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거니까 이상하진 않을 거야. 귀족 남자들도 정복 위에 망토를 두르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아, 이것도 잊지 말고.”

그리고 이번에는 코 바로 위까지 오는 반 가면을 카셀의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눈을 아예 가릴 수는 없지만, 눈 주위가 워낙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시선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었다.

16550620714986.jpg“…….”

하지만 카셀은 여전히 탐탁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가면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에게 얼른 한 마디를 건넸다.

16550620714979.jpg“괜찮아, 그런 걸로 결코 미모가 죽는다거나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갈색 머리칼도 잘 어울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야.”

16550620714986.jpg“당연하지. 나한테 안 어울리는 게 어디 있어.”

그제야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카셀이 나를 향해 애교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띵동!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항의의 뜻을 나타내며 주식 1,000주를 구매합니다.」 「아, 카셀은 은발이 진리인데…… 대실망.」 띵동! 「‘아가.들아.보.아라’ 님이 20,000주를 구매합니다.」 「새.머리.를한.아가도.어엽쁘내요.」 둘 다 풀 매수를 해 주었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래도 바자회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빗을 챙겨 다시 카셀이 앉은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16550620714986.jpg“그런데 누나.”

16550620714979.jpg“응?”

16550620714986.jpg“내일 호칭은 뭐라고 할까?”

그리고 그가 쓰고 있는 가발 옆쪽을 정리해 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16550620714979.jpg‘외출 전담 시종이라…….’

바자회장으로 함께 들어가기 위해, 카셀은 내일 내 임시 ‘외출 전담 시종’ 역할을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마차의 문을 열어 주고 무거운 짐이 있으면 날라 주거나 대신 들고 따라오고, 에스코트부터 호위까지 전부 다 책임져 주는 시종 역할을. 다른 영애들의 말로는, 무도회나 참석자의 명단이 정확하게 정해진 만찬회와 달리 이런 축제에서는 ‘외출 전담 시종’을 놓고 귀부인들끼리 은근한 경쟁이 붙는 일이 비일비재하단다. 누구의 시종이 더 멋지고 근사한지에 따라 사교계에서의 위치 또한 미묘하게 달라진다나? 처음에 그 얘기를 듣고 ‘아니, 무슨 그런 문화가 다 있어?’ 싶었지만 귀부인들의 ‘키링남’이라고 생각하니 대충 납득이 갔다. 덕분에 카셀을 대동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됐으니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좋아, 시종이자 키링남에겐 이 호칭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지. 나는 아래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카셀을 향해 상큼하게 웃으며 단박에 말했다.

16550620714979.jpg“주인님.”

16550620714986.jpg“뭐?”

16550620714979.jpg“주인님 어때?”

16550620714986.jpg“…….”

카셀의 붉은 입술이 말없이 슬쩍 벌어졌다. 대답도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뭐야,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짓궂은 마음이 차올랐다. 늘 의기양양하고 장난스러운 카셀이 부끄러워하다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16550620714979.jpg“자, 빨리 말해 봐. 어차피 쑥스러움은 한순간…….”

16550620714986.jpg“주인님.”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입술만 움직여 속삭였다. 여전히 능청스럽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16550620714986.jpg“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본 채, 왼쪽 옷소매의 리본을 입술로 물어 끌어당기며 풀어 버렸다. 도발적인 미소에 순간 내 정신까지 아찔해졌다.

16550620714986.jpg“……이런 플레이가 취향이시라면.”

16550620714979.jpg“아, 아니야!”

나는 당황하여 빗을 던지듯 내려놓고 그가 물고 있는 리본을 황급히 당겼다. 얼굴에 확 열이 올라 더운데, 카셀은 그런 나를 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가발을 벗어 던졌다. 그 속에 갇혀 있던 찰랑거리는 은발이 빛처럼 쏟아졌다. 한숨처럼 얕은 숨이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뱉어지고, 하얀 손이 고급 은사 같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그때였다. 띵동! 띵동! 띵동!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주식 50,000주를 구매합니다.」 「아! 진짜 카며든다! 우리 예쁜이, 사랑해!!!♡」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주식 30,000주를 구매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나라를 감싼 3면의 바다는 카셀 야해! 섹시해! 요염해!」 「‘아가.들아.보.아라’ 님이 50,000주를 구매합니다.」 「인.생은.매우덧업시.짤븐것이라.요즘젋은이의.좀더확끈한.모습에존하루.보내십.시오.」 터졌다. 주식도 터지고, 내 심장도 터질 것처럼 뛰었다. 나는 장난에 성공한 소악마처럼 입술 끝을 올려 웃고 있는 카셀을 모른 척한 채, 반짝반짝 빛나는 화면만 괜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 * 축제의 아침이 밝았다. 카셀이 도대체 무슨 경로로 알아 왔는지 모를 바자회장의 동선은 이미 머릿속에 저장되어 까먹으려야 까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고, 목표물의 위치도 당연히 파악해 놓았다. 나는 미리 약속한 지점에서 초조하게 카셀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인적이 드문 길 끝에서 아주 크고 화려한 마차가 다가왔다. 바퀴가 멈추자마자 문을 열고 내린 것은 평소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카셀이었다. 몇 번이고 확인한 변장은 실로 완벽했다. 정복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화려한 외출복 차림에 에메랄드빛 자수가 놓인 고급스러운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그는 누가 봐도 호리호리하고 잘생긴 시종 청년 그 자체였다.

16550620714979.jpg“금방 왔네?”

반갑게 맞으며 묻자 카셀이 나를 향해 흰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16550620714986.jpg“주인님께서 기다리시면 안 되니까요.”

그 말에 나는 마차의 발판을 올라가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어제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16550620714979.jpg“아, 아니. 벌써부터 그럴 필요는…….”

16550620714986.jpg“그러다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주인님.”

카셀은 흠잡을 곳도 없이 완벽한 미소로 활짝 웃었다. 유혹적으로 올라간 입술 사이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붉은 석류알을 그대로 알알이 따다 박아 놓은 것 같은 두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16550620714986.jpg“주인님, 오늘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차 안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주인님 타령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었다.

16550620714979.jpg“……왜?”

하나로 묶은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시선은 말없이 이마 아래로 내려와 목 언저리와 어깨를 지나 이윽고 예쁜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는 손끝까지 옮겨 갔다. 황궁 무도회 이후 이렇게 큰 행사는 처음이었기에 나 역시 옷과 머리 장식에 힘을 줬다. 특히나 바자회에는 얼굴을 익히 아는 귀족들은 물론, 지역의 모든 인사가 거의 다 모인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간 카셀을 만날 땐 대부분 간소한 차림이었던지라 잘 꾸민 나를 샅샅이 살피는 그의 시선이 왜인지 민망하게 느껴졌다. 좁은 마차 안에서 시선을 피할 수도 없어 괜히 코끝만 긁적이는데.

16550620714986.jpg“주인님이 너무 아름다우셔서요.”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마차 안을 가득 메웠다. 나를 놀리는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16550620714986.jpg“이렇게 꾸미니까 누나, 정말 몰라보게 예쁘다.”

16550620714979.jpg“뭐, 뭐야?”

나는 카셀을 향해 방석을 냅다 던졌다.

16550620714986.jpg“물론 안 꾸밀 때도 예쁘긴 했지. 아니…….”

하지만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그걸 받아 내고는 계속해서 놀려 댔다.

16550620714986.jpg“처음부터 예뻤어.”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 * * 광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평소에도 몇 번이고 오간 곳인데도 오늘처럼 사람이 많았던 적은 없어서 어쩐지 생경했다. 화려하게 갖춰 입은 거리 악사들은 신나는 곡을 연주했고 펄럭이는 깃발들이 줄줄이 매달린 천막 사이로는 무언가를 굽는 듯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16550620714979.jpg“저기다.”

그때 내 눈에 유독 크고 고급스러운 천막이 보였다. 바로 바자회장이었다. 이 많은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려면 꽤 시간이 걸릴 듯해 급히 걸음을 옮기려는데, 카셀이 내게 팔을 스윽 내밀었다.

16550620714986.jpg“이렇게 하는 거지?”

16550620714979.jpg“응.”

레어넌이나 펠리어트에 비하면 몹시 어설픈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배운 티가 났다. 문제는…… 그래도 역시 어설펐다는 거지만.

16550620714979.jpg“응, 맞아.”

어색한 자세에 웃음을 참느라 부들대는 손을 살포시 그의 팔에 올려놓으려던 찰나였다.

16550620714911.jpg“어머, 로렐라 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16550620714979.jpg“안녕하세요, 몰리 자작 부인.”

나는 그녀를 향해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 가게의 단골이자 아우레아에서 제일 큰 와이너리를 경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친한 부인 중 하나였다.

16550620714911.jpg“이런 데서 뵙다니, 더 반갑네요. 마침 잘됐어요!”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매우 들뜬 기색으로 나를 살짝 잡아끌었다. 그 탓에 손이 카셀의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순간 예전에 티 살롱에서 그녀와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길드장하고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지독하게 엮어보고 싶다’던 이야기가. ……설마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힐끔 카셀을 바라보자, 내 시선을 눈치챈 그가 후드를 더욱더 깊게 눌러썼다.

16550620714911.jpg“실은 로렐라 님이 오늘 바자회에 오신다기에, 꼭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이 있었거든요.”

자작 부인은 다행히 시종 차림을 한 카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내 앞에 누군가를 끌어다 놓기 바빴다.

16550620714911.jpg“인사 나누세요. 여긴 미드웨이 백작가의 장남, 에이든 미드웨이 님이시랍니다.”

그녀의 팔에 붙들려 앞에 선 건, 훤칠한 젊은 남자였다. 그는 처음엔 좀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16550620714911.jpg“에이든 님은 미드웨이 가문의 후계자이시자, 우리 와이너리의 최대 고객이시랍니다. 에이든 님, 여긴 제가 줄곧 말씀드렸던 로렐라 메이레드 영애세요.”

몰리 부인의 빠른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세련되게 인사를 건넸다.

16550620714911.jpg“처음 뵙겠습니다. 로렐라 메이레드 님.”

16550620714979.jpg“네. 안녕하세요…….”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혼기가 꽉 차 보이는 두 싱글 남녀를 소개해 주는 이유가 다 뭐겠어. 아니, 그런데 이렇게 공개된 광장에서 이래도 되는 건가? 이것도 혹시 지역 사회 사교 모임의 특징 같은 건가?

16550620714911.jpg“말씀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로렐라 님. 사업 수완이 좋으시다 들어 여쭙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로렐라 님의 얼굴을 뵌 순간 전부 잊게 되는군요.”

남자의 말에 자작 부인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호호, 들뜬 목소리로 웃었다. 어떻게 대꾸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새 내 바로 곁에, 카셀이 다가와 있었다. 어깨에 걸친 유달리 긴 로브가 드레스 자락에 스친다 싶더니, 따듯하고 단단한 손이 내 손가락 사이를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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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20714979.jpg‘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비록 지금이야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겠지만, 언제 들킬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옷자락 안에서 손을 이리저리 꼼질댔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은 나를 놓아주긴커녕 더 세게 얽혀 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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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20714979.jpg“죄, 죄송해요. 몰리 부인. 그리고 미드웨이 님.”

나는 여전히 잡혀 있는 한 손이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쓰며 재빨리 사과를 건넸다.

16550620714979.jpg“제가 선약이 있어서 지금 급히 가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16550620714911.jpg“어머, 그래요?”

16550620714911.jpg“아, 그렇습니까.”

남자는 아쉽다는 듯 멋쩍게 웃더니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꼭 따로 뵙고 싶다고 말했다. 자작 부인 역시 옆에서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다시 한번 묵례를 건네고 허둥지둥 돌아섰다. 그러고는 옷자락이 펄럭이지 않도록 반대쪽 손으로 꼭 잡은 채 인파 속으로 재빨리 향했다. 한참을 걸어 그들이 안 보이게 될 즈음에야 자리에 멈춰 서 카셀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16550620714979.jpg“지금 뭐 하는 짓이야?”

카셀은 그제야 천천히 힘을 풀고는, 내 손을 끌어다 아까처럼 자신의 팔에 올려놓았다.

16550620714986.jpg“내가 뭘?”

16550620714979.jpg“당황스럽게 갑자기 이러면 어떻게 해?”

16550620714986.jpg“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16550620714986.jpg“그럼 가실까요? 주인님.”

그러고는 날 향해 예쁜 미소로 웃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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