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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감금만큼은 안 돼! (41/173)

41화. 감금만큼은 안 돼!2021.11.20.

아우레아의 중심지인 광장에서 제법 걸어야 나오는 북쪽 시가지는 중앙과는 달리 지대가 꽤 높았다. 길이 좁아 마차가 들어갈 수 없는 터라 우리는 근처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백작저에서 살게 된 지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정확하게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좀처럼 왕래하지 않았다. 상점도, 티 살롱이나 고급 레스토랑도 없는 데다가 귀족들이 사는 저택 부지와도 멀었으니까. 빈민촌이 늘어선 구역인지라 치안이 안 좋다는 소문도 한몫했다. 수도 없이 나 있는 작은 골목 사이로 붉은빛이 도는 노을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빈민촌의 굴뚝 위로 매캐한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올랐다. 간판조차 없는 허름한 식당 안쪽으로는 지저분한 앞치마를 두른 채 좁은 테이블 사이를 간신히 지나다니는 점원들이 보였다. 아무도 사지 않을 것 같은 잡동사니를 좌판에 늘어놓은 채 옆자리 상인과 수다 삼매경에 빠진 행상들도, 까르르 웃으며 아슬아슬하게 곁을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도 무척이나 남루한 차림이었다.

16550620477285.jpg“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나는 옆에서 로브를 쓴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카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무작정 따라오긴 했지만, 대체 왜 여기 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더니, 그게 무엇인지도 여전히 말해 주지 않고.

16550620477291.jpg“글쎄.”

카셀은 이번에도 대답 대신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16550620477291.jpg“산책이나 할까 해서.”

16550620477285.jpg“뭐?”

16550620477291.jpg“왜? 시종인도 없이 외출하려니 불안해?”

순수한 질문이라기에는 어쩐지 목소리가 좀 심술궂게 들렸다.

16550620477285.jpg“아니, 전혀.”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6550620477285.jpg“난 원래 외출할 때 시종들이랑 같이 안 가는데?”

16550620477291.jpg“……뭐?”

카셀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16550620477285.jpg‘그렇지만 사실인걸.’

그 덕분에 조이를 필두로 한 저택의 고용인들이 나를 얼마나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지 모른다. 하루가 멀게 외출하면서 어디로 가는지, 언제 들어오는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것도 모자라 시종조차 대동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주식을 팔기 위해선 이런 일, 저런 일 다 해 봐야 하고 갈 곳도 많은데 그때마다 시종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저택 안에서 좀 도와주는 거면 모를까, 바깥에서까지 누군가가 계속 수발을 들어 주는 것이 좀 불편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백작가 영애일지 몰라도, 빙의하기 전에는 그냥 평범한 현대인이었다고! 공작 부인일 때도 밖에 나간 적이 없어서 그런 건 좀 부담스럽단 말이야. 아무튼 궁금해서 물어보긴 했지만 사실 카셀이 날 어디로 데리고 가든, 무엇을 부탁하든 나는 무조건 협력할 생각이었다. 주식을 팔 수만 있다면, 장소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어.

16550620477285.jpg‘이 기회에 카셀이 어떤 사람인지도 더 많이 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은발 적안에 목숨 건 분께만 주식을 파는 게 아니라 다른 주식도 한번 끌어내 보자는 것이 내 야심 찬 계획이었다. 솔직히 카셀에겐 팔색조 같은 매력이 있어서, 고작 외향 하나에만 매진하기에는 좀 아까웠다. 한눈에 시선을 앗아 갈 정도로 예쁜 외모와는 달리 성격은 의뭉스러웠고 때론 가까이 둬선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까지 물씬 풍겼다. 하지만 사르르 녹을 듯한 눈웃음을 치며 누나, 누나 부를 때는 무척이나 귀여워서 정말 무시무시한 길드의 길드장이 맞긴 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 상반되는 매력을 지닌 연하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있지 않나? 생각에 잠겨 땅만 보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카셀이 나를 제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순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단단하고 넓은 가슴팍에 그대로 이마를 부딪쳤다.

16550620477291.jpg“위험해.”

퍼뜩 고개를 드니 간발의 차로 커다란 짐을 잔뜩 실은 수레가 내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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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20477291.jpg“앞을 똑바로 봐야지, 누나.”

그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나를 도로 안쪽으로 밀어 자리를 바꿔 서 주었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애꿎은 바닥만 바라보던 그때였다. 띵동! 「‘아가.들아.보.아라’ 님이 설레하며 첫 주식 5,000주를 구매합니다.」 「요.즘.남정네.들은.저.희때완^^.다르.게.아주.과감하고.좋.읍니.다.내.주위동.년배들.다.몸조은.연하남.좋아헌.다.」 앗! 아니, 생각하자마자 나타나시네. 메시지 내용은 뭔가 좀 이상하지만……. 가독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메시지였지만 반갑기 그지없었다. 연하남은 역시 세대와 국적, 심지어는 차원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사랑받는 키워드구나. 연하남 좋아하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뭐가 있더라? 보편적인 취향이니까 금방 생각날 거다. 나는 기쁨과 설렘으로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앞으로 쏟아질 주식만 생각하면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16550620477291.jpg“왜 그래, 누나?”

투명한 화면 뒤에서 카셀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6550620477285.jpg“응,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모른 척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미 기대와 흥분으로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빈민가를 빠져나가자, 곧이어 야트막한 산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카셀은 눈앞에 있는 돌계단을 가뿐히 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쭉 올라가면 언덕의 정상인데, 거긴 아우레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근사한 전망대나 마찬가지였다. 북쪽 지구의 유일한 볼거리인 덕분에 꽤 많은 사람이 찾곤 해서, 정상에는 그들을 상대로 한 작은 가판점들이 열려 있을 정도였다. 대신, 볼 만한 것도 그게 전부고 워낙 가파른 데 있는 터라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는 사람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접선 장소로도 아주 제격이었다.

16550620477291.jpg‘뭐, 모르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곳이지만.’

카셀은 헉헉대면서도 열심히 저를 쫓아오는 로렐라를 힐긋 곁눈질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서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신기한 듯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역시 여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안 눈치였다. 그때 로렐라의 높은 하이힐이 눈에 들어왔다.

16550620477291.jpg‘대단하네.’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말도 없이 바람맞힌 것에 대한 복수로 좀 골려 주려고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군말도 없이 따라 올라올 줄은 몰랐다. 저런 불편한 신발을 신고도 한 번 휘청이지도 않은 것도 대단하고. 옷도 거추장스러워서 더 힘들었을 텐데도 그녀는 꼭대기에 다다르자마자 풍경을 보고는 눈을 빛내며 흥분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16550620477285.jpg“와, 여기서는 시가지가 다 내려다보이는구나!”

노을빛에 잠긴 아우레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얼굴도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감상하던 로렐라는 곧 카셀의 곁으로 다가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16550620477285.jpg“이러고 있으니까 꼭…… 그, 그런 거 같다.”

16550620477291.jpg“그런 거라니?”

16550620477285.jpg“그러니까 이렇게 노을도 아름답고, 경치도 예쁜 곳에 보통 이성과 단둘이 오는…… 그런 거 있잖아.”

16550620477291.jpg“그래? 그런 게 있어?”

16550620477285.jpg“서로에 대해 알아 가면서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는…….”

16550620477291.jpg“그게 뭘까?”

그녀가 말을 돌리면 돌릴수록 카셀은 일부러 더 모른 척하며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건지 눈치챈 지 오래지만, 어쩐지 호락호락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다 맞춰 주는 건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했고.

16550620477285.jpg“데, 자로 시작하는 건데, 혹시 이래도 모르겠어?”

결국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노골적인 말까지 입에 담았다.

16550620477285.jpg“내가 정답을 알려 주는 것보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하는 걸 꼭 들어야 하는…… 아니, 꼭 듣고 싶은 기분이라……!”

이상한 요구긴 한데,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껏 일방적으로 그를 쫓아다녔던 사람들도 늘, 항상, 뭔가를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했으니까.

16550620477291.jpg“음…….”

카셀은 또다시 골몰히 생각에 몰두하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그녀는 몹시 초조해 보였다. 그러자 어쩐지 좀 웃음이 나왔다. 악취미인 건 안다.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익숙하니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16550620477291.jpg‘……잠깐.’

순간 느껴진 위화감에 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역시나, 로렐라가 보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시선은 그의 오른쪽 어깨 너머를 향해 있었다. 여전히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카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의 끝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16550620477291.jpg‘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다시 얼굴을 바로 했을 땐 로렐라도 다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맞춘 채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16550620477291.jpg“아하, 혹시 데이트?”

16550620477285.jpg“어, 그렇지!”

로렐라는 마치 큰일을 해낸 사람처럼 주먹을 꽉 쥐고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20477285.jpg“바로 그거야……!”

어찌나 진심으로 기뻐하는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사람 같았다. 설마 아까는 부끄러워서 시선을 맞추지 못한 건가? 그렇게 생각한 카셀은 의미심장하게 씨익 미소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16550620477291.jpg“우리가 하는 게 데이트 같아?”

16550620477285.jpg“……그, 글쎄.”

16550620477291.jpg“데이트 맞는데?”

툭 던진 말에 로렐라는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향해 있었다.

16550620477291.jpg‘이 누나, 대체…… 뭐지?’

말도 못 할 만큼 기뻐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자꾸만 아무것도 없는 곳을 열심히 바라보니 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뭐가 있는 건 아니겠지. 서늘해진 목덜미를 슥 문지르는데,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620477285.jpg“그럼 혹시 또…… 데이트해 줄 수 있을까?”

그제야 카셀도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수 있었다.

16550620477291.jpg“아, 말 한번 잘했어.”

그는 대답 대신 예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멀리 보이는 아우레아의 광장을 가리켰다.

16550620477291.jpg“저기 보여, 누나?”

16550620477285.jpg“어, 어디?”

16550620477291.jpg“저기 광장의 왼쪽 아래, 보라색 깃발이 꽂혀 있는 커다란 천막 말이야.”

16550620477285.jpg“응, 보여. 저 굉장히 큰 천막 말이지?”

로렐라는 목을 쭈욱 빼고 천막을 살펴보더니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20477291.jpg“응. 누나는 모르나 본데, 축제 때 저기서 귀족들 상대로 바자회가 열릴 거래.”

16550620477285.jpg“바자회?”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는 기억난 게 있는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16550620477285.jpg“아, 얘기는 들었어. 우리 가게도 축제 때문에 바빠서 이런저런 얘기가 들리거든. 그런데 그게 왜?”

16550620477291.jpg“저 바자회에 출품될 물건 중에 내가 꼭 갖고 싶은 게 있거든. 엄밀히 말하면 갖고 싶은 게 아니라, 반드시 돌려받아야 하는 거지만.”

16550620477285.jpg“돌려받아야 한다고……?”

16550620477291.jpg“응. 원래는 길드의 보물이었으니까.”

보물을 바자회에 가져올 마르첼로 홀터 후작은, 자신을 뽐내고 드러내는 데에 안달인 남자였다. 과시하고 사치하는 걸 좋아하는 전형적인 귀족. 대체 어떤 경로로 그 물건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어찌나 진귀한 보물을 얻었다고 자랑을 해 대는지 모른 척해 주려야 해 줄 수가 없었으니까. 후작은 그것도 모자라 그걸 이번 바자회에 내놓겠다고 뽐내듯 자랑까지 했다. 실제로 남에게 팔 생각은 없을 거다. 그저 더 많은 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뿐이겠지. 하지만 속내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후작의 배포를 칭찬했다. 사교계에서도 후작의 이름이 들리는 날이 많아졌고, 그의 콧대는 날로 높아져 갔다. 바자회에 출품한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보물의 행방을 뒤쫓던 검은 뱀 길드가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카셀은 곧장 수도에 헛소문을 퍼뜨렸다. 검은 뱀 길드가 승전 연회를 틈타 황궁에 진상된 보물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수도 전역의 경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삼엄해졌다. 흔들기 위해서 몇 번 작은 교전까지 반복했더니 근방 지역을 지키던 기사단들까지 수도로 집결시켰다.

16550620477291.jpg‘여기 아우레아를 포함해서 말이지.’

카셀은 로렐라와 다정히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승전 연회는 끝이 났지만 황궁에선 곧장 기사단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검은 뱀 길드가 아직도 때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남아 있었으니까. 게다가 한두 명도 아니고 대규모의 기사단이 다시 원래 지역으로 복귀하기까지는 원래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영주들은 성벽 방비가 다소 허술한 때에 이런 큰 행사를 치러야 하는 것에 몹시 부담감을 느끼겠지만, 그렇다고 날짜를 미루거나 변경할 수도 없다. 파종제는 한 해의 농사가 번창하길 기원하는 의미에서 반드시 그 절기에 맞춰 열어야 하니까. 카셀의 계획은 생각대로 흘러갔다. 축제는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기사단이 아직도 복귀하지 못한 것이다. 뭐, 정확하게는 복귀하지 못하도록 길드 차원에서 말썽 몇 번 부려 준 거지만. 파종제가 시작되고 바자회장 안까지만 들어가면 그 뒤는 식은 죽 먹기였다. 카셀은 이게 보물을 손에 넣을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사치품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후작가의 경비는 삼엄했고, 후작은 이동할 때조차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기사들을 여럿 대동하고 다녀서 영 틈이 안 났으니까. 억지로 무력을 쓴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뒤처리가 곤란해진다. 바자회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알아서 잘 풀릴 일인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도 없었다. 카셀은 쓸데없는 위험을 최소화하고, 효율을 중시했다. 어린 나이에 길드장이 된 것 또한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단지 잔인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부분 덕분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검은 뱀 길드는 나날이 커져 갔다. 이런 정보 따윈 손쉽게 얻을 수 있을 정도로.

16550620477291.jpg“홀터 후작은 바자회를 위해 기부하는 척하겠지만, 어차피 그걸 다시 사들이는 것도 후작의 측근이야. 측근을 매수하려 했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더라고.”

카셀은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는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16550620477291.jpg“그래서 말인데, 나를 좀 도와줘.”

이게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목적이다.

16550620477285.jpg“내가? 어떻게?”

16550620477291.jpg“애석하게도 바자회에는 엄격한 절차를 밟아 신분이 확인된 귀족만 출입할 수 있다지 뭐야. 누나가 나랑 동행만 해 주면 돼. 그러면…….”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달콤하고 감미롭게 내려앉았다.

16550620477291.jpg“누나가 원하는 걸 들어줄게.”

로렐라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카셀로서는 그녀가 거절해도 상관없었다. 굳이 로렐라가 아니어도 말 한마디면 제발 돕게 해 달라며 나설 만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번거로운 수고까지 해 가며 그녀에게 제의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온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혼약서까지 불태우고 도망친 사람. 그러고도 태연히 전 남편과 마주 앉아 사이좋게 차를 마시는 사람. 자신의 사명 외에는 관심도 없기로 유명한 레어넌 기사단장의 벽을 허문 사람. 부하에게 보고받은 그녀도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직접 대면한 것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앞으로 계속 얼굴을 보게 해 달라며 부탁해 놓고 말도 없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화가 나기보단 오히려 재밌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아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적어도 그의 손바닥 안에서 뻔한 행동만 하는 다른 사람들과 있는 것보단 덜 지루할 것 같았다.

16550620477291.jpg“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부드럽게 말을 덧붙이자…….

16550620477285.jpg“아니, 도와줄 수 있어.”

로렐라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말투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20477285.jpg“걱정 마. 뭐든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한 건 나잖아.”

살짝 들뜬 듯해 보이는 얼굴은 그가 숱하게 봐 왔던 다른 영애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카셀은 이번만큼은 전혀 불쾌하거나 거슬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유로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내리막길을 걷기 위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로렐라였다.

16550620477285.jpg“그런데 그런 정보는 다 어디서 얻는 거야? 지인한테 들었는데 검은 뱀 길드는 모르는 게 없다며?”

16550620477291.jpg“각종 방법을 다 동원해. 때론 감금해서라도 말하게 할 때도 있고.”

16550620477285.jpg“……안 돼!”

갑자기 벼락같은 고함이 귓가에 짜랑짜랑 울려 퍼졌다. 아, 귀야.

16550620477285.jpg“감금은 안 돼!”

16550620477291.jpg“뭐?”

카셀은 그녀 쪽을 향해 있던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16550620477285.jpg“가, 감금만큼은 안 된다고……!”

자리에 우뚝 멈춰 선 로렐라는 허공과 그의 얼굴을 다급히 번갈아 힐끔대며 어깨를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수십만 골드에 달하는 보물을 훔치는 건 되고, 감금은 안 된다고?

16550620477291.jpg‘이 누나 진짜 뭐지?’

카셀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이렇게 황당하고 우습고,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 덕분이었다. 로렐라의 화면에 뜬,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저 새끼 남주 아니죠?’ 님이 빡쳐서 주식 1,000주를 구매합니다.」 「뭔 요즘은 개나 소나 다 감금한다고 **이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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