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뭐든지 다 할게2021.11.17.
“후후, 후후훗…….”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나. 어제도, 그제도 늘 그 자리에 있던 달은 오늘따라 유독 커다란 보석을 박아 놓은 듯 반짝거렸다. 주위를 장식한 별들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정원수의 잎사귀들이 스치는 소리는 마치 천상의 노랫소리처럼 감미로웠고, 늘 마시던 밀크티의 맛조차 요정의 샘물이라도 떠 온 듯 달콤했다.
“우후후훗!”
10초마다 한 번씩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깨가 들썩이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입 꼬리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밤에, 기분이 들뜬 사람은 나 말고도 또 있었다.
“로렐라, 정말 잘했어. 넌 천재야!”
어쩐 일인지 안내자 놈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나타나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크게 박수를 쳤다. 아무래도 내 활약을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믿고 있었어. 너라면 해낼 줄 알았다니까? 내가 주인공 후보 하나는 잘 골랐지.”
그는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했다. 어찌나 들떠서 말을 쏟아내던지, 이젠 평소에 늘 입고 있던 재킷도 벗어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올려 뒀다. 심지어 이제는 소매를 팔뚝까지 걷고서 진정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내 침실 안을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서성거렸다.
“너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인재야.”
“뭐?”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그가 내 손을 꽉 잡더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빛내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보석 같은 재능의 소유자! 주식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진정한 주인공!”
참나,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한 채 칭찬하는데도 쑥스럽기보다는 좀 울컥했다. 알게 모르게 구박할 땐 언제고, 주식 좀 팔았다고 단번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뀌는구나. 이 더러운 세상! 하지만 달리 말하면, 처음으로 그에게 생색낼 기회가 내게도 찾아왔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찌뿌둥한 목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위너드.”
“응?”
“나 어깨가 좀 아프네?”
“……어?”
“어깨 아프다고.”
마음이 복잡한 듯 미묘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위너드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놓더니 잽싸게 내 등 뒤로 돌아갔다.
“당연히 내가 주물러 줘야지. 정말 고생 많았어.”
꾹꾹. 그는 다정하게 속살거리며 커다란 손으로 어깨와 목을 시원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쭈, 진짜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들을 기세잖아? 여전히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요행이나 누군가에게 기댄 게 아닌, 혼자만의 힘으로 판 주식으로 대우받는 거니까.
“겨우 이 정도로 기뻐하긴 일러.”
나는 시원한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조용히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완벽히 파악했으니까, 앞으론 지켜보기만 하라고.”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딱 하나다. 언제, 어느 때고 간에 그분들이 보고 싶어 하는 장면과 대사를 이끌어 내는 것. 펠리어트와 레어넌, 그리고 카셀에게서!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차라리 주식이 물밀 듯이 쏟아질 만한 사건을 아예 만들어 보면 어떨까…….”
혼자 중얼거린 말에 그의 손이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금 어깨를 꾸욱 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바로 그거야, 로렐라. 이 세계는 무대라고. 지켜보는 관객이 있고, 주연이 있는 연극 무대 말이야.”
그는 상체를 숙여 내 귓가에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을 여주인공은, 한 편의 극을 완성하는 것과 동시에 관객이 만족할 만한 연기를 해야 하는 법이지.”
예전 같았으면 그저 알쏭달쏭했을 말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 어느 때 한 말보다도 머릿속에 깊이 박혀 들었다.
‘……한 편의 극을 완성한다.’
나는 속으로 되뇌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 같네.”
그러자 진심으로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 소리가 뒤따랐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위너드.”
“응?”
“손이 멈췄는데.”
“뭐?”
“손이 멈췄다고.”
그간 위너드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감옥에 갇힌 내게 ‘파이팅!’ 하고 외치며 지었던 상큼한 미소, 처음으로 느낀 라이벌과의 엄청난 격차에 상심하던 내게 포기할 거냐고 다그치던 목소리, 후보가 소멸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져 있는데 다음엔 누구 차례일 것 같냐며 되묻던 싸늘한 표정. 하나하나 전부 빠짐없이 기억났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
“주물러.”
뒤에서 작게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그는 별다른 반항 없이 열심히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눈을 감았다. * * * 아침이 되자 조이는 침실로 직접 과일과 샐러드를 가져다주더니, 내가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켰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제 일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종 하나 없이 가면서 오늘은 안 돌아오겠다고 하질 않나, 타고 갔던 마차를 중간에 되돌려 보낸 것도 모자라 저녁엔 펠리어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으니. 마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가 얼마나 놀란 표정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펠리어트는 나를 데려다주고 조용히 몸을 돌려 사라졌다. 별말도 없었다. 나 역시 이제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조이를 비롯한 저택 고용인들의 술렁거림은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다들 펠리어트가 어떤 사람인지 코앞에서 지켜본 적이 있으니, 혼비백산하는 것도 무리도 아니었다. 나 역시 그때는 그가 무섭고 싫어서 치가 떨릴 지경이었으니까. 나는 조이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려 눈앞에 놓인 음식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오늘은 뭘 입을 건지, 머리는 어떻게 할 건지 잡다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하지만 머릿속 한편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카셀을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사는 곳도, 검은 뱀 길드의 본부 위치도 모르는데. 말도 없이 바람을 맞혔으니,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걸까?
“아니, 아니야! 절대 안 돼!”
나는 방에서 나와 서재로 향하던 발걸음까지 멈추고 복도 한가운데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1등짜리 로또나 다름없는 은발 주식을 이대로 날릴 수는 없어! 이제야 비로소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계획이 바로잡힌 참이다. 펠리어트에게 했듯이 카셀에게서도 더 큰 호응을 끌어낼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반드시 다시 만나야만 했다.
“괜찮아, 침착해.”
서재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깃펜과 편지지를 꺼내 들며 나는 스스로를 쉼 없이 다독였다.
“아직 방법은 남아 있어……!”
카셀을 처음 만난 그 폐건물로 가 보자. 그곳은 그냥 접선 장소라고 했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운이 좋으면 세이블과 옥신각신하던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가 길드원이지 않을까? 얼굴은 다행히 기억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그를 만나면 이 편지를 카셀에게 전달해 달라 부탁해 볼 셈이었다.
“뭐야, 지금 바빠?”
열심히 손을 움직이던 그때, 창문가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복잡해 죽겠는데 저 제멋대로인 안내자는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네. 필요할 땐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 완전 바빠.”
“……그럼 나중에 올까?”
“그래, 위너드. 내가 나중에 다시 부르…….”
순간 펜을 쥐고 있던 손이 멈췄다. 잠깐만. 위너드 목소리가 원래 이랬……었나? 기묘한 감각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문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위너드는 또 누구야?”
창문가에 걸터앉아 입술을 삐쭉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 눈부신 은발이 오색찬란하게 빛났다. 영롱한 루비처럼 반짝거리는 붉은 눈이 심장에 그대로 꽂히는 듯했다.
“카셀!”
나는 그의 이름을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는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크고 위험한 길드의 길드장이니 메이레드 백작가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이 환한 대낮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정원을 지나 내가 있는 2층의 서재까지 무슨 방법으로 도달했는지도 궁금했지만 한편으론 알고 싶지도 않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괜히 들었다가 무서워질 수도 있으니까……. 띵동!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주식 20,000주를 구매합니다.」 「내 사랑♡ 보고 싶었어.」 게다가 지금은 그런 방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종소리에 맞추어 내 몸에 밀려난 의자가 쿵,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갔지만 뒤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저, 이렇게 외치며 그에게 허겁지겁 달려갈 뿐이었다. * * * 역시 ‘큰 손’은 달랐다. 고작 얼굴만 봤을 뿐인데 2만 주를 흔쾌히 투척하다니.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이 정도인데 그분께서 보고 싶어 할 만한 장면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최애라는 건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존재이긴 하지만, 그런 최애가 만약 심장을 저격하는 행동을 한다면? 어쩌면 이 느슨한 주식 시장에 커다란 긴장감을 불어넣어 줄지도 모른다. 혹시 주식이 막 터지다 못해 시스템까지 다운되고 그러는 거 아냐? 정신없이 치솟을 주식 판매량과 존경한다며 내 앞에 무릎 꿇고 경외의 시선을 보내는 위너드를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생각에 빠져 들뜬 나와는 달리 창문가에 삐딱하게 서 있는 카셀의 표정은 어쩐지 미묘했다. 미소를 짓고 있긴 한데 서늘한 느낌이 감돌았다.
“왜…….”
나는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물으려던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그리고 넙죽 사과부터 던졌다.
“미안해!”
“미안하다니, 뭐가?”
“바람맞힌 거…… 정말 미안해!”
만나기로 한 상대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 것만큼 불쾌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게 먼저다.
“하하, 괜찮아.”
그런데 어쩐지 카셀은 불쾌해하긴커녕, 나지막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렇다고 바로 태도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재차 사과했다.
“황당하고 기분 나빴지? 진짜로 미안해. 실은 그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피치 못할 사정? 전남편하고 한가롭게 차를 마시는 걸 피치 못할 사정이라고 하나?”
어? 어떻게 알았지?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벙긋댔다. 분명 아무도 없는 길가에서 만나 펠리어트의 마차를 타고 곧장 레아의 가게로 이동했다. 비가 내리는 탓에 우리가 앉아 있는 동안 손님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나와 펠리어트가 차를 마신 걸 보고, 그걸 카셀한테 벌써 얘기해 줬다는 거지? 새삼 검은 뱀 길드의 정보력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잠깐. 설마 내가 전남편과 차를 마시며 노닥거리느라 자길 바람맞혔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펠리어트 때문에 약속 장소에 못 간 것도 사실이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것도 사실이지만, 결코 노닥거리느라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변명하기 위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 좀 들어 봐, 응? 물론 네가 보기엔 엄청 황당한 일일 거야. 그렇지만…….”
“괜찮아, 누나. 난 아주 재미있었으니까.”
카셀은 생긋 웃으며 내 말을 싹둑 끊었다.
“재밌었다니? 오래 기다렸을 텐데…….”
“그래서 재미있었다니까?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없었거든.”
그러더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에서 무언가를 휙 던졌다. 바람에 날려 바닥으로 떨어지려던 얇은 종이가 날카로운 것에 꽂혀 책상 모서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내가 방금까지만 해도 쓰고 있던 편지에, 뱀을 일격에 끝장낸 단검이 꽂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의뢰가 아니면 만나 주질 않으니, 몇 번이고 연달아 의뢰하는 수밖에요. 가족 몰래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은 영애도 한둘이 아니라더군요.’
르웬 백작 부인의 말이 귓가에 아른댔다.
‘무지 화났나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은 뱀 길드’의 길드장이 의뢰가 없이는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까지 깨며 시간을 내줬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약속을 어기고 펠리어트를 만나러 간 거니, 기분이 나쁜 것도 당연했다. 무슨 뒷공작이라도 벌이려는 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겠지. 아니, 어쩌면…… 위험할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하니 더 이상 지체할 틈이 없었다. 나는 카셀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사과의 의미로 뭐든지 할게!”
“뭐?”
“너무 미안해서 그래. 그러니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이야기해 봐.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응?”
“다 들어주겠다고? 누나가?”
“응. 대신 혼인서약서를 불태운 방법을 지금 당장 보여 달라는 건 안 돼. 그건 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물론 그 와중에도 쿠키를 쓰게 될까 봐 은근슬쩍 벽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아. 해줄 수 있는 게 하나 있긴 해.”
잠시 생각하던 카셀은 천천히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정말 누나가 해줄 수 있을까?”
“당연하지!”
누나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사람 아니야!
“그럼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해 볼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제의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있는 서재도 조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지만, 나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