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바로 이거다. 이거라고! (39/173)

39화. 바로 이거다. 이거라고!202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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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리듬 있게 창문을 두드렸다. 레아는 기분 좋은 빗소리를 들으며 가게 안에서 느긋이 티 타임을 즐겼다. 이런 궂은 날씨에는 손님도 별로 없거니와, 마침 시음이 필요한 새 찻잎도 들어온 덕분이었다. 간만에 점원들도 일찍 퇴근시켰다. 축제가 시작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바빠질 테니, 지금 미리 쉬어 두라는 의미에서.

16550619839287.jpg‘그래도 늘 북적이던 가게가 이렇게까지 조용하니 좀 쓸쓸한걸.’

그런 생각을 하며 은은한 연둣빛 차를 홀짝이던 그때였다. 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리더니 커다란 키와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젊은 남자가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는 까만 망토에, 까만 정복을 입고, 심지어 머리까지 흑발이었다.

16550619839287.jpg“……어, 어서 오세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레아는 다소 경직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가게를 찾는 손님 대다수는 주로 여성이지만, 그래도 남자 손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레아가 지금껏 만난 손님 중 이 장소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날렵한 턱선, 날카로운 콧대. 그리고 한순간에 주변을 얼려 버릴 듯한 서늘한 눈빛까지.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잘생긴…… 무서운 얼굴이다. 대체 누, 누구지? 분위기에 압도된 나머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묻지도 못하고 얼어붙어 서 있는데, 그의 뒤에서 익숙한 붉은 머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16550619839287.jpg“로렐라 님!”

레아는 그제야 한결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반갑게 외쳤다.

16550619839287.jpg“갑자기 여긴 어쩐 일로…….”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로렐라가 쪼르르 달려와 두 손을 꼭 잡았다.

16550619839306.jpg“늦어서 미안해요!”

16550619839287.jpg“네?”

늦어서 미안하다니? 우리가 무슨 약속을 했던가? 영문 모를 상황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로렐라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16550619839287.jpg‘아, 곤란한 상황인가 봐.’

이젠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업자답게 그녀는 금세 상황을 눈치채곤 모른 척 메뉴판을 챙겨 들었다.

16550619839287.jpg“손님이랑 같이 오셨으니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우리.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레아는 가장 크고 좋은 테이블로 그들을 안내했다. 고풍스러운 테이블과 맞추기라도 한 듯 잘 어울리는 의자는 무척이나 편안하지만, 좀 무거운 것이 흠이었다. 로렐라를 위해 그것을 미리 빼 주려는데, 어느새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저지했다. 그러더니 직접 의자를 뺀 채 기다리는 게 아닌가? 로렐라는 남자와 의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윽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남자는 어쩐지 조금 들뜬 기색이었다. 맞은편에 앉자마자 느긋하게 내부를 살피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16550619839324.jpg“여기가 바로 그곳인가?”

16550619839306.jpg“……그래.”

16550619839324.jpg“생각보다 꽤 크군.”

16550619839306.jpg“얼마 전에 확장했거든.”

16550619839324.jpg“대단한걸.”

16550619839306.jpg“응, 고마워…….”

영혼 없는 대답과 초점 잃은 눈동자, 거기다 절망이 느껴지는 목소리까지. 로렐라는 마치 나라라도 빼앗긴 사람 같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테이블 위로 메뉴판을 조용히 내려놓고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 우리는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비로소 마실 것을 주문할 수 있었다. 펠리어트가 가게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답해 주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레아가 커다란 쟁반 위에 향긋한 차와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쿠키를 올려서 가지고 왔다. 그것들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사이, 나와 그녀는 펠리어트 몰래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갑자기 나타나 놀랐을 텐데, 재빠르게 눈치채고 말을 맞춰 줘서 너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펠리어트의 앞에는 진한 블랙커피가, 내 앞에는 뜨거운 홍차와 함께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수가 놓였다. 나는 우선 물방울이 맺힌 물 잔을 집어 들고는 그대로 얼른 꿀꺽꿀꺽 들이켰다. 하지만 타는 듯한 속은 좀처럼 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6550619839306.jpg‘미치겠네, 진짜!’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꼬일 수가 있지? 그런 곳에서 펠리어트를 마주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데려다주기까지 하겠다니, 도대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거듭 거절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마땅한 이유를 대지 못하자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도대체 어딜 가길래 이러는 거냐며 그가 수상쩍게 생각한 탓이었다.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펠리어트의 마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그걸 생각하니 또다시 속이 탔다.

16550619839306.jpg“어흑.”

나는 애달픈 탄식을 내뱉으며 남아 있던 냉수를 모조리 비웠다. 그리고 컵을 내려놓는데, 순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16550619839324.jpg“급히 갈 데가 있다더니, 그게 여기였나?”

16550619839306.jpg“으, 응.”

목적지를 묻는 그에게 레아의 가게 주소를 댄 건 사실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길을 나서던 찰나에 딱 마주쳤으니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른 델 가자니 딱히 생각나는 곳도 없었으니까. 다른 영애들과 함께 갔던 티 살롱도 순간 떠올랐었으나, 그런 곳에서 펠리어트와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사교계에 괜한 소문이 돌 게 뻔했다.

16550619839324.jpg“안 그래도 궁금했어.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던 참이었는데, 마침 타이밍이 좋았군.”

16550619839306.jpg“인내심이 바닥을 보여? 왜?”

16550619839324.jpg“당신이 초대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펠리어트는 다시 한번 가게를 쓰윽 둘러보더니 태연하게 덧붙였다.

16550619839324.jpg“우연히 기회가 닿아서 다행이야.”

뭐? 다행? 지금 내 앞길을 막아 놓고 다행?! 지금 내 심정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대체 뭐라는 거야. 그의 입가엔 근사한 미소까지 서려 있어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게 웃지도 마! 정들어!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3,000주를 구매합니다.」 「우리 펠리어트 많이 참았구나. 이 할미가 상을 주마.」 그때 종소리와 함께 주식이 팔려 나갔다.

16550619839306.jpg‘……고작 3천 주. 이게 카셀이었으면 지금쯤 뒤에 0이 몇 개씩 더 붙어 있었을 텐데.’

실망한 것도 잠시,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 생각에 깜짝 놀라 펠리어트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고 뺨을 양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16550619839306.jpg‘정신 차려! 대체 언제부터 3천 주가 ‘고작’이 되어 버린 거야?’

이것도 엄청 대단하고 소중한 주식이지 않은가. 천 주에 목숨 걸고 레어넌과 입술 박치기도 불사하던 예전이랑 비교하면 너무나도 배부른 생각이었다. 몇만 주씩 쏟아지는 카셀과 비교하면 당연히 아쉬울 수밖에 없긴 하지만, 지금은 단 1주도 헛되이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단 100주에 운명이 갈릴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16550619839306.jpg‘언제 어디서든 최선을 다해야 해!’

마음속에서 투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16550619839306.jpg‘내가 가진 지식을 십분 활용하면 분명 길이 열릴 거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갈증이 이는 목을 축이며 힐끔, 펠리어트를 바라보았다. 새카만 흑발과 날카로운 콧대, 싸늘함과 그윽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눈동자까지. 확실히 펠리어트는 ‘그분’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모든 요소를 빼놓지 않고 갖춘 인물이었다. 북부 대공, 집착광공의 현신 같은 존재니까. 그뿐만 아니라 레어넌이나 카셀 또한, 그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냉정히 말해 주식을 사 주는 분들이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누군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대신에 그들은 취향을 저격하는 행동이 보일 때마다 아낌없이 주식을 사 준다. 바로 지금처럼. 생각해 보면, ‘고작 3천 주’가 아니라 ‘인내심이 바닥났다’라는 말 한마디에 ‘3천 주씩이나’ 산 거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16550619839306.jpg‘펠리어트가 메이레드 백작저에 찾아왔을 때는 무려 9천 주나 사 줬지.’

솔직히 그땐 나를 잡으러 온 미친 남자라고만 생각해서 그저 도망치고, 외면하기 바빴다. 당시 9천 주가 팔린 건 거의 얻어걸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거다. 만약 그의 입에서, 집착광공 처돌이라면 취향 저격일 만한 말을 작정하고 끌어낸다면? 그럼 9천 주가 문제가 아니라 1만,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가만히 심호흡한 뒤, 작은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16550619839306.jpg“초대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어. 실은 조금 곤란한 일이 생겨서 도움을 청할 곳이 필요했었거든.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사람이 당신과 레어넌밖에 없어서 얼마나 곤란했는지.

16550619839324.jpg“곤란한 일이라니, 그게 뭐지?”

펠리어트가 양손을 포갠 채 거만하게 턱을 괴었다. 들어 줄 테니, 말해 보라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0619839306.jpg“아니야. 이젠 다 해결해서 괜찮아.”

그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16550619839306.jpg“다행히 다른 분이 도와주셨거든.”

나더러 반드시 자신의 눈길과 손이 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그였다. 그러니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다는 사실을 들으면 ‘집착’에 불이 붙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그분’이 만족할 만한 상황은 반드시 올 것이다. 나는 슬쩍 펠리어트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미간이 무섭게 구겨져 있었다.

16550619839324.jpg“다른 사람 누구.”

16550619839306.jpg“응?”

16550619839324.jpg“누가 도와줬냐고.”

16550619839306.jpg“그게, 그러니까…….”

16550619839324.jpg“당장 말해.”

그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선연히 돋은 그 순간.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9,000주를 구매합니다.」 「펠리어트 뚜껑 열린다고 소맥 말아먹으면 사형. 위스키만 마셔야 함. 근데 취해서 혀 꼬부라지면 참수형.」 역시. 예상이 적중했다.

16550619839324.jpg“설마 레어넌 베르하르트는 아니겠지.”

펠리어트는 몹시 화가 치민 사람처럼 장갑을 벗더니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또다시 15,000주를 추가 구매합니다.」 「집착에 질투? 다 비켜. 내가 다 퍼먹을 거야. 츄릅츄릅 쩝쩝 낼름낼름 할짝할짝.」 온갖 망측한 의성어가 난무하는 메시지에, 나 역시 입맛이 몹시 당겼다. 3천 주에 이어 9천 주, 그리고 지금은 무려 1만5천 주다. 이러다가 진짜로 카셀처럼 3만 주, 아니 그 이상도 터뜨릴 수 있지 않을까? 이제야 내가 주식을 팔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이 보인다. 여태 너무 멍청했다. 가만히 마주 앉아 있는다고 해서 활로가 열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 멀리 매달려 있는 먹이를 발견한 굶은 짐승처럼, 나의 본능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16550619839306.jpg“그냥…… 개인적으로 가깝고, 또 내가 많이 의지하고 있는 분이야.”

16550619839324.jpg“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16550619839306.jpg“당신에게 일일이 전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16550619839324.jpg“뭐?”

펠리어트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매섭게 바라보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16550619839324.jpg“로렐라, 당신이 잊은 모양인데…….”

그래! 어서 말해 줘. 나는 조바심에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시야에서 벗어나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든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멋대로 행동하는 건 있을 수 없다든가! 제발…… 말해 줘!

16550619839324.jpg“하아…….”

하지만 펠리어트는 예상과는 달리 그저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16550619839306.jpg‘아, 뭐야!’

쫄깃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나는 안타까움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좋아, 그렇다면 다시 한번!

16550619839306.jpg“내가 뭘 잊었다는 거야? 말해 줘.”

자, 던졌다. 다시 제대로, 아주 노골적으로 던졌다고, 펠리어트. 그러니까 응? 제발, 응?

16550619839324.jpg“당신은…….”

그래, 그래! 그러나 이번에도 펠리어트는 입을 꾹 다물더니 손으로 이마를 누르듯 문지르기만 했다. 마치, 무언가를 참아내기라도 하는 듯이.

16550619839324.jpg“지금 이런 말은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아니, 왜 안 하는데!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세차게 흔들며 소리치고 싶었다. 평소에는 완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 다 하더니, 오늘따라 대체 왜 그러냐고! 밥상을 다 차려 놨는데도 떠 먹지를 못하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어떻게 해야 펠리어트에게서 ‘그 대사’를 끌어낼 수 있을까? 생각해라, 생각해라 로렐라! 지금까지 읽어 온 로맨스 소설 안에 그 답이 있을 거야. 나는 분명히 답을 알고 있다고! 빨리 생각해, 이 멍청한……. 아!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무심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16550619839306.jpg“펠리어트,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이 나를 쏘아보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건 절대 적의가 아니겠지!

16550619839306.jpg“내가 아는 건 딱 하나야. 우리는 이제 남남이라는 거.”

16550619839324.jpg“하.”

짧은 조소를 내뱉은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16550619839324.jpg“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정말 유감이야. 로렐라.”

말과는 달리 지독하리만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전혀 유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16550619839324.jpg“왜냐하면 당신은 어차피 내 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16550619839306.jpg“…….”

16550619839324.jpg“말하지 않았나.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고.”

바로 그거야아아아아!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집의 기둥뿌리까지 뽑아 50,000주를 구매합니다! 신기록입니다!」 「바로 이거지이이이이!」 크고 둥근 태양이 내 앞길을 밝게 비추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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