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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계획만큼은 완벽했다 (37/173)

37화. 계획만큼은 완벽했다202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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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늦은 시각. 마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조이와 집사인 웨번이었다. 시종인도 없이 수도까지 간 데다가 늦게 돌아오기까지 한 내가 걱정되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이상해진 내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걱정이 더 많았던 듯했다.

16550619258759.jpg“많이 늦으셨군요, 아가씨. 걱정했습니다.”

16550619258759.jpg“여전히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16550619258759.jpg“근심이 있으신 거라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걱정 어린 말을 쏟아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그들을 향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16550619258773.jpg“근심은 무슨.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

물론 마음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16550619258773.jpg‘주식에 눈이 돌아서, 제국에서 제일 악랄하다는 검은 뱀 길드의 길드장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야.’라는 말 따위…….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젠장!

16550619258773.jpg“그래도 어쨌든 당분간 주식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16550619258759.jpg“네? 뭐라고 하셨어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곁에 있던 조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16550619258773.jpg“아, 아무것도 아니야.”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에 살짝 경련이 나는 걸 들킬세라, 얼른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조이가 다시 내 뒤를 쪼르르 따라오며 물었다.

16550619258759.jpg“아가씨, 내일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예정대로 외출하실 거라면, 미리 준비해 놓게요.”

16550619258773.jpg“내일…… 뭔가 있었던가?”

16550619258759.jpg“네. 르웬 백작 부인과 가게에서 만날 거라고 하셨잖아요.”

16550619258773.jpg“아, 그랬지, 참.”

황궁 연회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 르웬 백작 부인. 그때 둘이서 레아의 가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기투합해 즉흥적으로 약속을 잡았던 것이 비로소 떠올랐다.

16550619258773.jpg‘마침 타이밍이 좋네.’

나는 반색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19258773.jpg“응, 예정대로 만나 뵐 거니까 외출 준비를 부탁해.”

16550619258759.jpg“알겠습니다, 아가씨.”

자타가 공인할 만한 사교계의 마당발, 르웬 부인이라면 분명 검은 뱀 길드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알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중엔 도움이 될 만한 정보도 분명 있겠지. 아우레아의 귀부인들이 여는 소소한 티 파티에서조차 검은 뱀 길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까, 그녀가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반면에 나는 티 파티에서 들은 이야기 말고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카셀이 길드장이라는 것도 오늘에야 알았으니 말 다 한 거지 뭐. 그러니 귀족들의 정보망을 활용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끌어모을 생각이었다. 제아무리 위험한 곳이라 해도 주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리라. 이번엔 조이와 함께 날 따라오던 집사 웨번을 향해 물었다.

16550619258773.jpg“기사단장님께 보내는 서신은 잘 전달되었나요?”

바로 엊그저께, 패닉 상태에 빠진 와중에도 나는 레어넌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나러 가지 못하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어서 돌아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하루 빨리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다소 노골적인 내용이 떠올라, 관자놀이 근처가 뜨거워졌다. 물론 처절하고 다급한 심정으로 써 내려간 탓에 그때는 민망한 줄도 몰랐지만, 막상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집사는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0619258759.jpg“네. 국경에 추가로 지원 가는 기사들이 있어서, 그들 편에 맡겼습니다.”

16550619258773.jpg“고마워요.”

16550619258759.jpg“참, 아가씨. 북부로 향하는 서신은 어떻게 할까요? 긴급한 용건이니 가능한 한 빠르게 전달해 달라고 말은 넣어 두었습니다만, 전에 말씀드렸듯 언제 배달이 될지 모르는 상태랍니다.”

그러고 보니 펠리어트한테도 비슷한 편지를 썼었지. 물론 레어넌과 뉘앙스는 전혀 다르긴 하지만, 당신을 꼭 좀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용 자체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16550619258759.jpg“원하신다면 이쪽으로 다시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길이 원상복구 되면, 그때 보내셔도 되니까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0619258773.jpg“아뇨, 그대로 두세요.”

만약 길이 복구되면,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밀려 있던 서신을 보내려고 할 것이다. 못 해도 수백 통은 넘게 북부로 향할 텐데, 그 대란에 굳이 섞일 필요는 없었다. 상황이 그렇다면 차라리 배달부에게 맡겨 두는 게 조금이나마 빨리 갈 가능성이 높겠지.

16550619258773.jpg“가급적 빨리 보내 달라는 얘기도 한 번 더 해 주세요. 아, 그리고 북부로 가는 길 상황도 계속 확인해서 알려 주시고요.”

16550619258759.jpg“네, 알겠습니다.”

현대 문명이 발달한 이전 생과는 달리 이곳은 모든 게 느리고 기술도 많이 부족했다. 아마 통째로 떠내려간 다리를 다시 지으려면 최소 두 달은 걸릴 것이다.

16550619258773.jpg‘차라리 잘됐어.’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워 볼까? 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고는 조이와 웨번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바삐 서재로 향했다. * * * 서재의 벽에 걸려 있던 조그마한 달력을 떼어 낸 나는, 그대로 푹신한 소파로 직행했다.

16550619258773.jpg“카셀이랑은 3일 뒤에 만나기로 했지.”

당장 내일부터 만나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의뢰가 있어 자리를 비운다고 했다. 물론 어떤 의뢰인지 묻지는 않았다. 물어봤어도 대답해 주지 않겠지만. 비스듬히 기대앉아 달력을 팔랑팔랑 넘기다가 탁자에 놓인 붉은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걸로 중요한 디데이에 크게 별을 그렸다.

16550619258773.jpg“레어넌 단장님이 돌아오는 건 한 달 뒤니까…….”

좋아. 그렇다면 이 한 달 동안은 무조건 카셀에게 올인 간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아낌없는 투자를 해 주시던, 은발에 목숨 건 그분을 떠올리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16550619258773.jpg“단장님이 돌아오고 난 다음에는, 둘을 동시에 공략하자.”

주접킹의 주식도 놓칠 수는 없지.

16550619258773.jpg‘……그런데 단장님은 잘 계시려나?’

내 생각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집사에게 듣기로 국경 지대는 날씨가 궂은 거로 유명하다던데, 혹시 감기에 걸리진 않았을까.

16550619317427.jpg‘돌아오자마자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때는 둘이서 함께 식사라도 하시지 않겠습니까?’

  수줍은 듯 말하며 얼굴을 붉히던 레어넌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이서 함께 식사라니, 그건 꼭 데이트 신청 같은…….

16550619258773.jpg“아, 아니!”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순간 화들짝 놀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괜히 손으로 휘휘 저었다. 이런 중요한 때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자책에 자책을 거듭하며, 거의 찢을 기세로 달력을 더욱 거칠게 마구 넘겼다. 덕분에 날짜는 금세 두 달 뒤로 넘어갔다.

16550619258773.jpg“좋아, 이때부턴 펠리어트도 만날 수 있을 거야.”

펠리어트는 비록 골칫덩이긴 하지만, 지금은 목숨이 달려 있는 상황이다. 단 한 주라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새끼가 남주가 아니길 바라는 분과 집착 광공을 먹는 괴식성을 지닌 분이 서로 설전을 벌였던 일이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둘이서 경쟁하듯 주식을 사 줬으니, 일단은 내게 좋은 상황이라 봐도 무방했다.

16550619258773.jpg“아무튼 펠리어트에게도 서신을 보내 놨으니, 그쪽은 답장이 오고 나면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워 보자.”

……서신이라. 달력 한쪽에 낙서를 끄적이던 손이 우뚝 멈췄다.

16550619345068.jpg‘전쟁터에 나간 2년 동안 편지 한 통 없던 인간이, 이제 와서 무슨 대화냐고 했었지.’

  어느새 머릿속에 펠리어트의 목소리가 맴돌기 시작했다.

16550619345068.jpg‘난 분명히 보냈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 말이 사실이라면 거의 700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다. 매일매일 짧은 일기를 두 어 줄 쓰는 것도 힘든 일인데, 대체 뭐라고 썼을까. 대화 한번 변변찮게 해 본 적 없는 이름뿐인 아내에게. 그것도 평소 말 없기로 유명한 무뚝뚝한 남자가. 혹시 보고 싶다거나, 집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겠…….

16550619258773.jpg“으앗!”

당황스러운 신음이 터진 것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창문가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뜨거워진 얼굴을 금세 식혀 주었지만 머리끝까지 차오른 당혹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미쳤어.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16550619258773.jpg“이럴 때가 아니라고!”

책망을 당해도 싼 상대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재차 소리 높여 외쳤다.

16550619258773.jpg“오로지 주식 벌 생각만 하라고!’

하지만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어디선가 푸드득 하고 새가 날아가는 소리뿐이었다. * * * 국경 지대는 며칠째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리고 있었다. 기사단이 머물고 있는 숙소 또한 궂은 날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를 뚫고 문밖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16550619258759.jpg“단장님, 잠시 실례합니다.”

16550619317427.jpg“그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망토를 두른 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국경 지대를 지키는 기사단의 책임자였는데, 이곳에 있는 동안 레어넌 기사단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할 사람이기도 했다.

16550619317427.jpg“무슨 일이지?”

레어넌의 질문에 남자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망토를 걷었다. 그러자 눈가리개를 한 채 그의 팔에 앉은 커다란 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를 맞아 추운지 떨고 있는 그 새는, 레어넌에게도 낯익은 것이었다.

16550619317427.jpg“에크레투스 기사단에서 전서구가 온 건가?”

16550619258759.jpg“네, 그렇습니다.”

어지간한 일은 처리했고, 다른 업무는 보좌관이 대신할 테니 전서구가 올 만한 일은 없을 텐데……? 레어넌은 반신반의하며 새의 다리에 묶여 있던 자그마한 통을 풀어냈다. 그 안에는 두 통의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굳은 눈으로 첫 번째 편지를 읽고 다음 편지로 시선을 옮긴 레어넌 갑자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곧, 입가에 곧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16550619317427.jpg“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라…….”

16550619258759.jpg“네? 빨리 돌아오셔야 한답니까? 혹시 성기사단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그 미소를 미처 보지 못한 기사는 순수하게 걱정이 들었다.

16550619317427.jpg‘별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국경 지대의 일도 급했지만, 성기사단이 전서구까지 동원한 일이니 어쩌면 더 시급한 일일지도 몰랐다. 초조한 마음으로 편지를 쥐고 있는 레어넌의 손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기사에게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619317427.jpg“그냥 일상적인 보고로군.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왜 전서구로? 기사로선 오히려 더 의아한 대답이었다. 고작 일상적인 보고를 보내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전서구를 보낸다는 게 쉬이 납득되지 않았다. 물론 그건 그가 잘 모르는 탓이었다. 국경 지대에서 고생하고 있을 자신들의 상사를 위해, 그가 제일 기뻐할 만한 서신을 일부러 전서구까지 동원해 보내 준 에크레투스 기사단원들의 충심을.

16550619317427.jpg“지금 조사는 어디까지 진행되었지? 마물이 출몰할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는 곳이 총 여덟 군데였던 것 같은데, 맞나?”

멍하니 있던 기사의 귀에, 어쩐지 다급한 듯한 레어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619258759.jpg“네, 그렇습니다. 첫날부터 애써 주신 덕분에 이제 여섯 군데 남았습니다.”

16550619317427.jpg“좋아. 내일부터는 속도를 올려야겠군. 협조해 주지 않겠나?”

16550619258759.jpg“물론입니다, 단장님. 변경된 지시사항을 알려 주시면 최선을 다해…….”

16550619317427.jpg“이제부터 이틀에 한 군데씩 끝낸다. 그렇게 하면 2주 안에는 전부 마무리되겠지.”

16550619258759.jpg“네?!”

예상치 못한 강행군에 기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16550619258759.jpg“그럼 성력의 소모가 심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물의 흔적을 찾는 건 성력을 지닌 성기사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중 가장 정확하고 빠른 것은, 당연하게도 기사단장인 레어넌이었다. 작업의 속도를 빠르게 높인다 해도 그의 성력이 고갈되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피로는 말할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기사가 우려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레어넌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0619317427.jpg“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서로에게 이득 아닌가. 우리는 예정보다 빠르게 본부로 돌아갈 수 있어서 좋고, 자네들은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어서 좋고.”

16550619258759.jpg“그거야 그렇지만…….”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인 것도 잠시, 기사는 곧 차렷 자세로 외쳤다.

16550619258759.jpg“알겠습니다. 단장님의 명에 따라, 작업할 병사들의 수를 늘리겠습니다!”

16550619317427.jpg“좋아. 내일부터 무척 힘든 일정이 될 테니, 이만 가서 쉬도록.”

16550619258759.jpg“네!”

마지막까지 씩씩하게 대답은 했지만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고된 일정이 될 레어넌 기사단장은 대체 왜 저렇게 들뜬 기색이 역력한 걸까. 기사는 알쏭달쏭한 궁금증을 끝까지 풀지 못한 채 그대로 방을 나서야만 했다. * * * 북부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큰 비가 휩쓸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유독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북부 사람들은 씩씩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올해는 다른 사람도 아닌 펠리어트 공작이 직접 재건을 지휘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비가 내리고 나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매서운 추위도 비로소 자취를 감춘다는 걸 그들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16550619258759.jpg“공작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통나무들이 여기저기 뽑혀 엉망이 된 강둑 위에 서 있던 남자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수하가 저 멀리서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펠리어트는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16550619258759.jpg“죄송합니다.”

쉼 없이 달려 펠리어트 앞에 당도한 남자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고급스러운 검은색 가죽 부츠가 온통 엉망이 된 것을 본 탓이었다. 수하의 몰골도 엉망진창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허리께까지 온통 진흙투성이라 마치 진창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 하지만 펠리어트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무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50619345068.jpg“상황은?”

16550619258759.jpg“건너편의 강기슭은 다행히 무사합니다. 바로 다리 기둥을 세워도 문제없을 것 같다는군요. 그쪽 지방의 영주께서도 아낌없이 자재를 조달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다리가 무너져 며칠째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서 수하가 겨우 강을 건너갔다 온 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비로 인해 하류에 잔뜩 쌓인 진흙이 비로소 단단해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늪 같아서 말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그 말인즉슨, 온몸이 푹푹 빠지는 더러운 진창과 사투를 벌여야만 간신히 걸음을 뗄 수 있다는 소리였다.

16550619345068.jpg“좋아. 당장 사람들을 투입해.”

16550619258759.jpg“네, 알겠습니다.”

16550619345068.jpg“그런데 그건 뭐지?”

펠리어트의 시선이, 수하가 품에서 꺼낸 서신에 머물렀다. 진흙투성이인 수하의 몰골과는 다르게, 서신은 먼지조차 묻지 않고 깨끗했다.

16550619258759.jpg“건너편의 영지에 도착해 있던 서신입니다.”

물론 다리를 건너지 못해 쌓여 있는 서신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16550619258759.jpg“굉장히 급한 건인 듯했습니다.”

하지만 수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이 편지만 콕 집어서 가져온 이유를 펠리어트가 눈치라도 채면, 제게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편지를 받아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펠리어트의 눈썹이 순간 움찔했다.

16550619345068.jpg“나를, 만나고 싶다고……?”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온 것과 동시에 그의 손에서 편지가 와작, 하고 구겨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살벌한 기세에 눈도 마주치지 못했겠지만, 수하는 달랐다. 오랜 세월 그의 곁을 지키며 작은 표정 변화도 읽을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무척이나 놀랐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기쁜 상태라는 것을.

16550619345068.jpg“오늘 당장 재건 공사에 들어가면 완공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펠리어트는 답지 않게 빠른 어투로 물었다.

16550619258759.jpg“다리 말씀이십니까? 못해도 두 달 정도는 걸린다고 합니다.”

16550619345068.jpg“좋아.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빠르게 착수하도록. 무엇보다 안전에 신경 써서 진행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고.”

16550619258759.jpg“알겠습니다.”

16550619345068.jpg“임시로 통행할 길을 닦기 위해 케튼 남작이 작업자들을 데리고 곧 도착할 거야. 뭐든 지원해 주고, 진행 상황은 나중에 내게 보고해.”

16550619258759.jpg“……네.”

뭐지? 공작님은 그때 자리를 비우기라도 하시려는 건가?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꾸벅 묵례를 건네고 돌아서려던 그때였다.

16550619345068.jpg“이제 안내해.”

16550619258759.jpg“네?”

16550619345068.jpg“안내하라고.”

16550619258759.jpg“어딜…… 말씀이신지요?”

16550619345068.jpg“방금 네가 갔다 온 길.”

그러니까, 늪이나 다름없는 그 진창으로 안내하라 이건가? 수하는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보다, 저도 모르게 물었다.

16550619258759.jpg“거, 거긴 왜 가시려는 겁니까?”

펠리어트는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16550619345068.jpg“아우레아에 다녀오려면, 강을 건너야 할 것 아닌가.”

16550619258759.jpg“네?”

수하는 깜짝 놀라 거의 펄쩍 뛰며 되물었다.

16550619258759.jpg‘그러니까 거긴 왜 다녀오시려는 거냐고요…….’

하지만 제아무리 가장 가까운 심복이라 해도, 감히 이런 것까지 물을 순 없었다. 수하는 그저 멍하니 서서, 붉어진 목덜미를 슬쩍 문지르는 펠리어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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