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검은 뱀 길드2021.11.03.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기 빛 같은 손을 놓칠세라, 나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어디로 달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참이나 달려 커다란 건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물론, 우리 뒤를 쫓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자리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맞잡고 있던 손을 놓자마자 나는 타는 듯한 옆구리를 부여잡고 격한 숨을 토해 냈다. 하늘과 땅이 한꺼번에 빙빙 도는 듯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호흡조차도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구두를 신은 발은 아팠고 갑작스러운 뜀박질에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헉, 흐어억.”
아이고, 나 죽네! 나 죽……! 띵동!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또다시 20,000주 구매합니다.」 아니, 살았다. 난 이제 살았다고! 여전히 하늘이 노랗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지만 내 머릿속은 희망, 기쁨, 안도의 하모니로 가득했다. 역시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구나……! 나도 모르게 기쁨의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간신히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린 그때였다. 선이 가느다랗고 예쁜 얼굴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흐음.”
분홍빛이 도는 붉은 눈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까이 서서 날 꿰뚫어 보듯 관찰했다. 덕분에 나도, 이 새로운 구원자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귀족은 아닌 듯 말투와 차림새는 몹시 자유분방했지만, 그에게선 왠지 모를 귀태가 넘쳐 흘렀다. 잘생겼다는 말로도 모자라 황홀하게까지 느껴지는 얼굴 탓인지도 모른다. 남자가 사르르 녹을 듯한 눈웃음을 치며 내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누나.”
“응, 응.”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누나라니, 날 언제 봤다고?’ 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겠지만, 그저 지금은 저 팡팡 터지는 과일즙처럼 상큼한 미소에 마음이 설레기만 했다. 정확히 말하면, 팡팡 터지는 주식 생각 때문이지만.
“궁금한 게 있는데.”
그래, 마음껏 물어보렴. 난 뭐든 다 말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단다.
‘그전에 우리 먼저 통성명부터…… 어?’
싱글벙글하던 것도 찰나였다. 그가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고 생각이 들자, 마음과는 달리 내 다리는 점점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도 남자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뭐, 뭔데…….”
대답 대신 한 발자국, 그리고 또 한 발자국. 주춤주춤 물러나던 내 등 뒤에 급기야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흘끗 고개를 돌려 보니 커다란 나무였다. 몸을 빼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찰나, 삽시간에 뻗어진 양팔이 나무를 짚었다. 그사이에 갇힌 나를 응시하는 붉은색 눈동자는 위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왜 이러……!”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당황한 것도 잠시. 띵동!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주식 10,000주를 구매합니다.」 「이 장면 빨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해.」 헉, 또 1만 주! 이분은 기본이 만 단위이신, 정말 통 큰 고객님이시구나! 참을 수 없는 기쁨에 내적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데, 목에 닿은 무언가 때문에 뒷덜미가 쭈뼛 섰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흡.”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뱀의 아가리에 날아가 박혔던 단검이 자꾸만 생각났다. 보이지 않는데도 그것과 같은 것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목적이 뭐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려왔다.
“모, 목적이라니 무슨…….”
“남들 몰래 덤불 뒤에 숨어 있던 이유 말이야.”
만면엔 여전히 해사한 웃음이 가득했지만, 남자의 목소리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섬뜩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누굴 노리는 건지 말해. 나야, 아니면 세이블 릴리야?”
당장이라도 내 목에 깊은 상처를 낼 듯 닿아 있는 날붙이의 느낌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선연했다. ……잘못했다간 이대로 X 될 수도 있겠는걸. 불길한 예감에 뒷골이 서늘하게 당겼다.
“그, 그게 그러니까…… 세이블 릴리 때문에!”
“뭐?”
“우연히 마주쳐서 나도 모르게 뒤를 밟았지 뭐야. 내가 실은 그녀의 숨은 팬이거든!”
나는 일단 사실이 적당히 섞인 대답을 던지고, 그럴듯하게 덧붙일 말을 생각해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무도회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로, 너, 너무 근사해서 남몰래 동경했어. 나도 저런 숙녀가 되고 싶다 뭐 그런 거 있잖아!”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거짓말이 절로 술술 나왔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지만 제법 설득력도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처럼 영롱한 두 눈으로 쉴 새 없이 떠드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그래, 그렇구나.”
“그런 거야. 그러니 일단은 이거 치우고…….”
“라고 말할 줄 알았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서슬 퍼런 쇠붙이는 멀어지긴커녕 내 목덜미에 더 가까워졌다.
“역시, 목적은 나지?”
“어?”
“나한테 푹 빠진 것까진 상관없는데, 의뢰와 관계 없인 만나지 않는다는 규칙은 지켜야지.”
아니,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푹 빠지긴 누가 푹 빠졌다고 그래!”
나는 고개를 치켜든 채 바락 외쳤다.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
순간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었다는 듯, 그의 눈이 약간 커졌다. 단도를 쥔 손에도 힘이 살짝 빠지는 게 느껴졌다.
“날…… 진짜 몰라?”
그 틈을 타 남자를 재빨리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다.
“당연히 모르지, 오늘 처음 봤는데. 대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뒤라서 그런지 본의 아니게 날카로운 어투가 튀어 나왔다. 남자는 순순히 칼을 거두며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물었다.
“그럼 누난 누군데?”
“수상한 사람은 아니야. 나는 로렐라라고 하는데…….”
또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황궁 경비에게 그랬듯 신원을 황급히 밝히려는데,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누나가 그 사람이구나?”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깐 주춤한 사이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체임버스 공작저에서 벽을 부수고 탈출한 것도 모자라 혼인서까지 불태우고 도망친 미친 여자. 맞지?”
“어?”
나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혼인서가 불탄 것까진 그렇다 치자. ……하지만 벽을 부순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 얘길 듣고는 완전 또라이라고 생각했지.”
나만큼이나. 남자는 밝은 목소리로 덧붙이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듯 또다시 경쾌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반면에 내 미간은 와작 구겨졌다. 미친 여자도 모자라 또, 또라이?!
“이게 아까부터 듣자 듣자 하니까……!”
띵동!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또다시 주식 30,000주를 구매합니다.」 「은발 미남이 웃는 얼굴에 전 재산 올인 합니다.」
“후, 그래.”
종소리와 함께 전의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마음을 다스리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나를 북부의 미친년이라고 불렀었지.”
“과연.”
내게 경탄의 눈길을 보낸 것도 잠시. 남자는 풀밭에 그대로 털썩 앉아 내 손을 마구 잡아끌었다.
“누나, 궁금한 게 있어. 여기 앉아 봐. 응?”
방금까지만 해도 서늘한 기세로 날 위협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근사근한 말투였다. 게다가 입꼬리만 끌어올려 어딘가 꺼림칙했던 아까와는 달리, 진심으로 활짝 웃는 얼굴은 바라만 봐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눈부시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곁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뭐, 뭔데 그래?”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뭘?”
“벽을 부순 것도 그렇지만 혼인 신고서 말이야. 성력으로 보호되고 있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불태웠어? 마도구를 쓴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단 한 번도 묻는 사람이 없어 나조차 잊었던 기억. 절대로 발설해선 안 되는 금기사항을 들킨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그렇지. 마도구야. 그거 말고 무슨 방법이 있겠어.”
“어떤 마도구인데? 나도 알려 주면 안 될까?”
“그건 나만 쓸 수 있는 거야. 계약을…… 맺었거든.”
“어떤 힘인지 보여 주기만 하면 안 돼? 내가 이런 쪽에 워낙 관심이 많아서 그래.”
뭔가 냄새라도 맡은 걸까. 몇 번이나 거절해도 남자는 무척이나 끈질기게 요구해 왔다. 사실대로 설명하는 건 절대로 안 될 말이니, 어떻게든 최대한 자연스럽게 상황을 모면해 보는 수밖에.
“절대 안 된다니까. 게다가 네가 누군 줄 알고 그런 걸 함부로 알려 줘?”
“카셀.”
남자는 기다란 다리를 접어 무릎을 양팔로 껴안은 채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내 이름이야, 카셀 베스페라.”
처음 경계심을 풀었을 때 보여 주었던 미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햇볕을 받아 빛나는 은발과 빛나는 붉은 눈이 마치 사람을 홀리는 듯했다. 잠시 멍하니 있자, 서운한 사람처럼 카셀의 눈꼬리가 추욱 아래로 향했다.
“나 꽤 유명한데. 진짜 나에 대해서 몰랐나 보네.”
붉고 유혹적인 입술이 뾰로통하게 앞으로 살짝 내밀어졌다. 왜인진 몰라도 머리 위로 털이 복슬복슬한 귀가 튀어나와 시무룩하게 접힌 것 같은 착시마저 보였다. 그 순간 또다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띵동! 띵동! 띵동! 어찌나 요란스러운지 내 정신까지 혼미할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숫자가 올라가는 화면의 맨 아래, 작게 반짝이는 동그라미가 눈에 들어왔다. 쓰지 않고 고이 아껴 둔 쿠키였다.
‘이 능력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틀림없이 마법이나 마도구를 사용한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 역시 처음 시스템 창이 떴을 때는 펠리어트가 흑마법을 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알려 주면 안 돼?”
잠시 다른 생각에 팔려 있던 그때, 낮게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나지막이 들려왔다.
“알려 주라, 응? 누나아.”
카셀이 어느새 바짝 붙어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헉.”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확 피했다.
“이래도 안 넘어오네.”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몸을 물렸다. 그러고는 땅을 짚고 있던 양손을 갑자기 탁탁 털었다. 마치 더 이상 미련 없다는 듯이. 금세라도 벌떡 일어나 홀연히 등을 돌릴 것 같은 분위기에 초조해진 나는 드레스를 말아 쥐었다. 쿠키니 시스템이니, 이런 얘길 함부로 할 수도 없고 내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밝혀서 좋을 것도 없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이 남자와 친해져야 해.’
어떻게 만난 구명줄인데 놓칠 순 없지. 나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게 원한다면 보여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진짜?”
내 말에 카셀이 반색하며 다시 바짝 다가왔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진짜로 내 상황을 다 알려 준다거나 당장 쿠키를 써서 뭔가를 보여 줄 생각은 아니었다. 쿠키는 꼭 필요할 때, 그리고 정말 위급할 때 써야 하니까. 만약 오늘 카셀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저택으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이 쿠키에 내 운명을 걸었겠지. 그 정도로 소중한 것인데 아무렇게나 써 버릴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초월적인 힘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작용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함정도 있었고. 어차피 마도구의 일종이라고 했으니, 이 능력을 쓰려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는 식으로 적당히 둘러대면 될 듯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인데?”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네 얼굴을…… 보러 가도 될까.”
“내 얼굴을?”
창피해서 순간 목덜미가 화끈 달아올랐지만 나는 애써 괜찮은 척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물론 기, 깊은 관계를 바란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안심해!”
혹시 몰라 다급히 덧붙였지만 누가 봐도 음흉한…… 아니, 의뭉스러운 제의였다. 단박에 거절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이상해 보일 걸 알면서도 이런 제안을 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주식 10,000주를 구매합니다.」 「바라만 봐도 행복한데, 이게 사랑인가요?」 이런 메시지가 떴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냐고! 얼굴이 홧홧해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셀이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하, 뭐야. 역시 누나도 내 얼굴이 마음에 드나 보네.”
“어?”
“괜찮아. 그런 사람들이 한둘도 아니고.”
정말로 별것 아니라는 듯한 어투에 되레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원래 의뢰를 받을 때가 아니면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지만…… 좋아. 누나는 예외로 해 줄게.”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나는 재차 다급히 물었다.
“정말로 얼굴 보러 가도 되는 거지?”
“그래. 아까 말한 거 알려 준다고 약속하면.”
만세! 해냈다. 해냈어! 역시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너무 기쁜 나머지 마음속으로 커다랗게 만세 삼창을 외쳤다. 좋아, 이제부터 열심히 출근 도장을 찍어야지. 그렇게 결심한 것도 잠시, 불쑥 궁금증이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세이블을 지켜볼 때도 의뢰받기 싫은데 자꾸 찾아와서 곤란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정체가 뭐지?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돼?”
나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가득 차 물었다.
“검은 뱀 길드로 찾아오면 돼.”
……응?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이 귓전을 강타했다.
“어디……라고?”
“내 길드로 찾아오라고. 길드원들한테 말해 둘 테니까.”
카셀은 이번에도 아름답게 씨익 웃었지만, 난 목이 뻣뻣하게 굳어 갔다. 티파티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뇌리 가득 맴돌았다.
‘검은 뱀 길드는 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길드라고 알려진 곳이에요.’
‘길드장이 돈 되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한대요. 살인 청부 같은 건 일도 아니랬어요.’
‘누구든지 길드장에게 찍히면, 그날로 끝이라고 하더라고요.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할 만큼 사람을 생지옥으로 떨어뜨린다나요.’
분명 내 길드라고 했지. 그렇다는 건…… 설마. 설마! 이제는 목뿐만이 아니라 사지까지 돌로 변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누나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구나. 보통 사람들은 웬만해선 길드와 약속 같은 건 하지 않는데. 혹여라도 어기면 큰일이 나니까.”
하얗게 재로 변한 것 같은 머릿속에 카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하물며 길드장인 나와의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든 억지로 고개를 움직여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알지?”
그 누구보다도 살벌한 미소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