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유레카!2021.10.30.
내 절규가 심상치 않다 느꼈는지, 집사는 최선을 다해 다시 한번 북부로 향하는 수단을 수소문해 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다리도 문제지만, 북부로 가는 길 여기저기에 큰 나무가 쓰러졌고 커다란 구덩이가 생긴 곳도 많아 도저히 못 간다며 마부들은 전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꼭 북부로만 가야 하는 건 아니니 생각을 바꾸어 레어넌 단장이 있는 국경 지대로 향하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었다. 자칫하면 일주일 뒤에 소멸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물불 가릴 상황이 아니니까. 하지만 집사가 백방으로 알아보는 사이에 기사단 관저로 사람을 보내 물어봤지만 돌아온 건 또 다른 절망뿐이었다.
‘기사단이 파견 나간 곳까지 가는 데 딱 일주일 걸린다는군요. 그것도 숙련된 기사가 쉬지 않고 말을 달린다는 전제하에서요.’
‘조사하는 동안엔 보호 결계를 쳐 두어 일반인은 발을 들일 수도 없을 거라고 합니다. 반대로 그만큼 안전하니 레어넌 단장님께서 위험하실 일도 절대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아가씨.’
나는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다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는 일이 없을 수가……!”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수단으로 위너드에게 제발 북부나 국경으로 보내 줄 수 있겠냐고 사정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익숙한 잔소리뿐이었다.
‘난 후보의 상황에 개입할 수 없다는 말, 벌써 잊었어?’
아니,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냐고! 이쯤 되면 안내자가 아니라 날 사지로 모는 지옥의 파수꾼이 아닐까. 절박한 심정을 눈물로 호소했지만, 위너드는 끝끝내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그분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그러니 너만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 같은 걸 남김없이 활용해 봐.’
그는 이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잘 알고 있으면 뭐 하냐고!”
나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토해 내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새로운 사람이 주식을 사 주지 않는 이상에야, 아무런 답도 없는 상황…….”
어? 잠깐만.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이 멈췄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사람이 보였다.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내 모습에 줄곧 전전긍긍하며 주변을 맴돌던 조이였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뭐라도 도와드릴까요?”
걱정이 듬뿍 담긴 선한 눈망울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다급히 외쳤다.
“수도까지 갈 마차를 준비해 줘!”
“수, 수도요?”
“응! 지금 당장!”
* * * 그래. 여기에 온 건, 그야말로 내가 가진 것을 전부 써 보기 위함이었다. 즉 나의 ‘독자력’을 활용하기 위해서! 위너드가 해 준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레어넌과 펠리어트 외에도 ‘그들’이 열광할 만한 인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니…….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엔 무조건 주식이 팔릴 만한 사람이 있을 거야.”
커다란 성벽 뒤로 우뚝 솟은 높은 건물들을 나는 결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궁. 수도의 정중앙에 세워져 어디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제국의 상징적 건물. 내가 또다시 이곳에 와 있는 이유는, 황궁이 바로 로맨스 판타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사건과 로맨스의 근원이자, 음모와 계략의 중심! 수도는 아직도 승전 축제가 한창인지라 황궁 근처 역시 마차들로 가득했다. 나는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돌아다니다 보면 분명 한두 명쯤은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지닌 금발의 젊은 공작이라든지, 아니면 신분을 숨기고 서민 레스토랑에 가는 걸 좋아하는 장발의 다정한 황태자라든지! 나는 벽에 기대어 서서 쉴 새 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매의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커다란 후드가 달린 망토를 뒤집어쓴 탓에 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지만 꾹 참았다. 이런다고 주식 파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저택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끙끙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인데 당연히 뭐라도 해야지! 게다가 적어도 내가 사는 아우레아보다는 수도에서 훨씬 더 다양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주식을 팔기도 좀 더 수월할 거고. 따라서 오늘부터 잠복에 들어간다! ……라고 결심한 것도 잠시. 나는 기다린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다.
“황궁 주변을 서성이는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황궁 경비대원들이 나를 에워쌌다. 그 언젠가, 티 파티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황궁이야말로 최고로 안전한 치안을 자랑하는 곳이라는 사실 말이다.
“저,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온갖 노력 끝에 내 신분을 증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이런 것 때문에 내 계획을 포기할 순 없지!
“이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그래, 어떤 역경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
“자꾸 이러시면 구금되실 수도 있습니다.”
……아, 포기. 마지막 경고라는 듯, 경비원들이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이번에 명령을 듣지 않았다간 정말로 잡아갈 기세였다. 나는 결국 황궁에서 먼 곳으로 밀려나 커다란 가로수 뒤에 숨어 울음을 삼켰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좀 봐주지……!”
이쯤 되니 온 우주가 나의 소멸을 바라는 것 같았다. 황궁 근처가 안 된다면 또 다른 장소를 찾으러 가는 수밖에 없다. 가슴에 묵직한 돌이라도 얹힌 사람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아선 그때였다. 건너편 도로에서 익숙한 얼굴이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바삐 재촉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이블이잖아?”
내 라이벌, 세이블 릴리는 무섭도록 굳은 얼굴이었다. 물론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뿐이겠지만……. 오늘은 착해 보이던 무도회 때와도, 마치 공포 영화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오싹하게 웃어 대던 처음의 인상과도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녀도 바뀐 규칙에 대해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대응하기로 했을까. 원래도 주식을 많이 팔았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을까? 아니면…… 나처럼 초조해졌을까? 조금씩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더워서 벗어 버린 망토를 다시금 슬그머니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그녀의 뒤를 조용히 밟기 시작했다. * * * 그녀는 황궁을 뒤로한 채 쉬지 않고 걸었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마차 한 대도 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이윽고 색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코끝을 찌르는 악취와 함께 쓰레기가 떠다니는 작은 개천. 조악한 징검다리가 놓여 있긴 했지만, 건너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무성한 덤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수도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흉흉한 광경인데도 세이블은 당황하지 않고 수풀 안쪽으로 계속해서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나는 놓칠세라 급히 뒤를 따랐다.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헤치느라 손등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겨났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건물 한 채가 나타났다. 혹시 폐건물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낡은 벽에는 난잡한 낙서들이 가득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엔 지저분한 구정물이 흐르는 도랑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혹시라도 밟을까 봐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걸었는데도, 드레스 밑자락에는 그새 새카만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건물 입구에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다 해어지고 너덜너덜해져서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을 수조차 없었다. 나와는 달리 더러운 웅덩이와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요리조리 잘도 피한 세이블은 어느새 건물 앞에 도착해 급한 손길로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건 거구의 사내였다. 나는 사람 키만큼 크고 빽빽한 수풀 뒤에 숨어 그들을 남몰래 지켜보았다. 덤불에 시야가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다소 멀어 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나서야 어렴풋이 다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안내해.”
“말씀드렸지만 자리에 안 계셔서…….”
“설마 의뢰를 가려서 받겠다는 개수작은…….”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거지? 한껏 귀를 기울이면서 수풀 안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딘 그때, 발끝에 무언가 물컹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잔뜩 얼어붙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마자,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날 향해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흐……!”
나도 모르게 비명을 터트리려던 찰나.
“쉿.”
어디선가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갑자기 내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벌린 뱀의 아가리에 날카로운 단도가 바람처럼 꽂혔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길고 징그러운 짐승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린 것과 동시에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나지막이 울렸다.
“아, 저 누나는 의뢰받기 싫다는 데도 자꾸 찾아오네. 곤란하게.”
쯧, 하고 나지막이 혀를 차는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누나라니. 세이블을 말하는 건가? ……그보다 이 남자, 누구지? 여전히 입이 막힌 채로 굳어 버린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리며 움직이던 그때, 강하게 불어온 바람에 남자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두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달빛을 가져다 물들인 듯한 아름다운 은발이 부드럽게 휘날리며 눈앞을 수놓았다. 석류알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 역시 유혹하듯 시선을 잡아끌었다. 띵동! 넋이 나간 내 귓가에 오랜만에 듣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처음으로 30,000주를 구매합니다. 신기록입니다!」 「여기가 은발 적안 맛집이라는 소식 듣고 왔습니다.」 화면에 뜬 숫자를 발견하고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일, 십, 백, 천, 만……. 오, 맙소사. 세상에. 자꾸만 힘이 풀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준 채, 다시 한번 0이 몇 개인지 세어 나갔다. 일! 십! 백! 천! 만! 진짜로 만 단위였다. 그것도 삼만! 다 죽어 가는 거지에게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면 이런 기분일까. 호흡이 가빠져 오고, 눈에 촉촉한 눈물이 고였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보석 같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투명한 시스템 창 너머로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린 얼굴이 들어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까지 잘생긴 얼굴은 처음이었다. 아니, 잘생긴 걸 넘어서 사람을 홀리는 미모라고 해야 맞겠다. 새하얀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었고, 그래서 더더욱 눈 밑에 찍힌 눈물점이 눈길을 앗아 갔다. 이제 막 소년기를 벗어난 듯 앳된 얼굴이었지만 넓은 어깨와 큰 키에서 그가 어리기만 한 소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누나는 누구야?”
나야말로 되묻고 싶었다. ……그러는 너는 누군데?! 그런데 그때, 인기척을 느꼈는지 세이블이 이쪽을 확 돌아보았다.
“이런, 큰일 났다.”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잡고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누나 뛰어!”
그 말에 주문이라도 걸린 듯 나 역시 덩달아 열심히 달렸다. 반짝거리는 은발이 마치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아스라이 빛났다. 금방 숨이 차올랐지만 이를 악문 채 최선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를 돌아보며 상큼하게 웃었다.
“누나, 잘 뛰네?”
띵동! 「‘은발 적안에 인생 건 사람’ 님이 또다시 30,000주 구매합니다.」 「눈물점이라니, 이건 정말 귀하군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합시다.」 ……아니, 이 누나는 네가 누구든 상관없단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노다지 같으니! 유레카다. 이건 유레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