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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34/173)

34화. 안 돼, 이럴 수는 없어!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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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로렐라는 조용히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커튼을 살짝 열었다. 창밖은 어슴푸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의 머릿속에 위너드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생생히 떠올랐다.

16550618598745.jpg‘이제부턴 정말 어떻게 될지 몰라.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주식을 파는 일에만 집중해.’

  하지만 무엇보다 선득하게 뇌리를 파고든 것은, ‘지루해하는 분들이 많다’는 말이었다. ‘지켜보는 입장’이었을 땐,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 나오면 가차 없이 하차해 버렸었다. 독자의 눈은 냉정하니 어쩌니 하며 댓글까지 남겼다. 그래서 더욱 위너드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 마음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일주일이 될지 한 달이 될지, 아니면 당장 내일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젠 미친 듯이 주식을 팔지 않으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다. 로렐라는 창틀을 힘주어 잡았다. * * * 머릿속이 온통 주식 생각뿐인 것과 별개로, 그녀의 일상은 무척이나 바빠졌다. 황궁 연회에 참석해 여러 사람과 안면을 익힌 덕분이었다.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운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에른 그레이스 후작 부인의 만찬회였다.

16550618598751.jpg“안녕하세요, 로렐라 영애. 레어넌 단장님도 어서 오세요.”

후작 부인은 제시간에 맞춰 도착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16550618598759.jpg“안녕하십니까, 그레이스 후작 부인.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어넌은 평소와 다름없이 서글서글하고,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다.

16550618598763.jpg“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후작 부인.”

로렐라도 그를 따라 흠잡을 데 없이 예의 바른 인사를 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묘한 위화감이 들어 그녀를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무도회 때와는 퍽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무척이나 쾌활하고 발랄한 인상이었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얼굴에 수심이 그득했다. 그뿐만 아니라 며칠간 잠을 조금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두 눈에 핏발까지 섰다.

16550618598751.jpg‘긴장되는 모양이지.’

그렇게 짐작한 후작 부인은 오늘 그녀를 특별히 더 신경 써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정하게 이끌었다.

16550618598751.jpg“두 사람 다 와 줘서 고마워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두 사람이 응접실로 안내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지막 손님까지 모두 도착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가벼운 식전주를 즐기고 나자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되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과 함께 진귀한 와인들이 기다란 테이블 위에 빼곡히 차려졌다. 영롱한 크리스털 램프가 잔뜩 걸려 있는 커다란 다이닝 룸에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말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16550618598751.jpg“로렐라 영애, 이것도 좀 들어 봐요. 우리 저택의 요리사가 자랑하는 파이……. 어머, 그러고 보니 영애께서는 아우레아에서 제일 유명한 디저트 사업가셨죠. 괜히 우쭐한 것 같아 부끄럽네요.”

모두가 즐겁게 떠들던 와중에도 유달리 말이 없던 로렐라가 후작 부인의 이야기에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0618598763.jpg“별말씀을요. 아주 맛있어요.”

모임의 주최자인 그레이스는 만찬 내내 기운이 없어 보이는 로렐라를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물론 로렐라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쓰는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16550618598759.jpg“혹시 컨디션이 좋지 않으신 거라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한시도 로렐라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레어넌은 그녀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고맙다며 작게 미소 짓고는, 못내 부끄러운지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다정해 보였는지 주위 영애들이 부러운 시선을 보낼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누군가의 질투를 사기에도 충분했다. 바로 지금처럼.

16550618598751.jpg“로렐라 님.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참 기뻐요.”

로렐라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영애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16550618598751.jpg“제게도 로렐라 님과 친해질 기회를 주세요. 제 숙부이신 셰릴 백작께서 곧 사냥 대회를 열 예정인데, 함께 가시지 않을래요?”

그러더니 곧바로 실수했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의 입을 황급히 막았다.

16550618598751.jpg“어머, 이런. 괜한 이야길 꺼냈네요. 사냥터가 북쪽 영지와 맞닿아 있어서, 분명 펠리어트 공작님도 초대되실 텐데…….”

실수인 듯 굴었지만, 만면엔 이미 심술궂은 미소가 가득했다.

16550618598751.jpg“이 제의는 없던 것으로 할게요. 로렐라 님을 곤란하게 해 드릴 수는 없죠.”

당연하게도, 그런 의도로 한 말이었다. 모두가 주목하는 앞에서 전남편 이름을 꺼내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 레어넌 단장이 퍽이나 다정하게 구는 것을 보면 그녀가 이혼당한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한데, 이 기회에 똑똑히 알려 줄 생각도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사정을 모르던 손님들에게 어찌 된 일인지 알려 주려 속삭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여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우아하게 와인 잔을 들어 올린 그때였다.

16550618598763.jpg“그게 언제죠?!”

로렐라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0618598751.jpg“……네?”

16550618598763.jpg“그게 언제냐고요. 저 꼭 참석하고 싶어요!”

반짝이는 두 눈과 옅게 홍조가 도는 얼굴. 누가 봐도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영애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바로 답하지 못했다.

16550618598763.jpg“초대장을 보내 주시는 건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부디 부탁드려요. 아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날짜부터 먼저 알려 주세요.”

16550618598751.jpg“아니, 그게…….”

16550618598763.jpg“초대해 주겠다는 게 설마 빈말은 아니시겠죠?”

16550618598751.jpg“그, 그럴 리가요. 로렐라 님이 정 원하신다면야…….”

여자는 미간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나 로렐라는 멈추지 않고 되물어, 기어코 날짜를 알아냈다. 3개월 후라는 말에는 심지어 실망한 기색까지 내비쳤다. 덕분에 여자는 그녀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붙이지 못했다. 잠시 조용해졌던 만찬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즐거운 분위기로 돌아갔다. 그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로렐라의 사정을 알고 있던 그레이스 후작 부인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16550618598751.jpg‘주눅 들어 있기에 걱정했는데, 의외로 강심장인 아가씨구나.’

사교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때론 저렇게 역으로 들이받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건 경험이나 연륜이 쌓인 뒤에나 가능한 일인데.

16550618598751.jpg‘장차 사교계의 중심이 될 수도 있겠어.’

그녀는 엷게 웃는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전부 로렐라의 진짜 ‘속사정’을 알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레어넌은 물론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펠리어트 또한 만나야만 하는……. 아니, 주식을 팔 기회를 결코 놓쳐선 안 되는 그녀의 절박함을 말이다. * * * 즐거웠던 만찬도 별 탈 없이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레어넌과 로렐라도 다시 한번 후작 부인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 마차에 함께 올랐다. 로렐라는 바퀴가 움직이기가 무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16550618598763.jpg“단장님, 매번 이렇게 에스코트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답례도 할 겸 꼭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언제 다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가장 빠른 휴일을 알려 주시면, 제가 맞춰서 초대 서신을 보낼게요.”

서신은 직접 가져다줄 예정이었지만, 그 얘기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 말에 레어넌은 무언가를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작은 탄식을 흘렸다.

16550618598759.jpg“그러고 보니 한동안은 뵙기 어렵겠군요.”

16550618598763.jpg“네? 왜, 왜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로렐라가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16550618598759.jpg“국경 근처에 마물의 사체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직접 조사하러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6550618598763.jpg“네?!”

16550618598759.jpg“돌아오자마자 꼭 찾아뵙겠습니다. 아, 그때는 둘이서 함께…… 식사라도 하시지 않겠습니까?”

살짝 홍조를 띠며 말하는 그와는 달리, 로렐라의 안색은 점점 새파랗게 질려 갔다.

16550618598763.jpg“……언제 돌아오시는데요?”

16550618598759.jpg“글쎄요. 국경까지는 거리가 있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으니 아마도 한 달 뒤쯤에나 돌아올 것 같습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6550618598763.jpg“안 돼!”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레어넌이 놀라 그녀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냐 물을 수도 없었다. 그의 시야에 울먹이는 얼굴과 이슬이 맺힌 듯한 눈가가 가득히 들어온 탓이었다.

16550618598763.jpg“그렇게 오랫동안 뵙지 못한다니…….”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16550618598759.jpg‘한 달 동안 나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저토록 서운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심장 소리가 거세져 그의 귓가에 쿵, 쿵 울려 퍼졌다.

16550618598759.jpg“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꾸준히 서신 보내겠습니다.”

서러운 듯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을 보니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뻐서 자꾸만 미소가 새어 나왔다.

16550618598759.jpg“그러다 보면, 한 달은 금방 지나갈 겁니다.”

그녀를 위로하며 달래 주긴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도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16550618598759.jpg‘정말…… 가고 싶지 않군.’

난생처음,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 * * 모두가 잠자리에 든 늦은 밤.

16550618598763.jpg“안 돼. 이대로는 절대 안 돼!”

메이레드 저택의 서재에서는 아직도 잠을 청하지 못한 누군가의 처절한 외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주먹까지 부르르 떨어 대며 소리를 지른 사람은 로렐라였다. 정말 얄궂은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하필이면 레어넌 단장마저 자리를 비운다니. 치밀어 오르는 절망감에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길 몇 차례.

16550618598763.jpg“좋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그녀는 핏발이 서다 못해 아예 붉게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뜨고 또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16550618598763.jpg“북부로 간다!”

제 발로 걸어 나온 북부에 이런 식으로 다시 찾아가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주식만 팔 수 있다면, 지옥에라도 기꺼이 찾아갈 판이니까. 오히려 솔직하게 펠리어트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로렐라는 굳은 표정으로 서재에서 나와 침실로 향했다.

16550618598763.jpg‘내일 날이 밝자마자 집사에게 당장 북부행 마차를 수배해 달라고 해야지.’

비로소 희망이 보이는구나. 침대에 누운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 이불을 꼭 말아 쥐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딱 반나절 후. 희망을 가득 안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또다시 비통한 외침이었다.

16550618598763.jpg“안 돼!”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에 맞닥뜨렸을 때는 더더욱.

16550618598763.jpg“안 된다고. 나는 북부에 꼭 가야 한다고!”

16550618598751.jpg“진정하세요, 아가씨.”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연거푸 같은 소리만 해 대는 그녀를 달래느라 집사는 연신 쩔쩔맸다.

16550618598751.jpg“그런 큰 홍수는 몇십 년 만에 처음이랍니다. 오죽하면 북부로 향하는 다리가 통째로 유실될 정도였을까요.”

16550618598763.jpg“아흑…….”

로렐라는 절망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치켜들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16550618598763.jpg“그럼 다른 길은? 아무리 멀리 돌아간다 해도 상관없으니까!”

이렇게까지 펠리어트를 만나고 싶었던 적이 있던가? 아니, 결코 없었다.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만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고, 어쩌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직접 말을 몰아서라도 꼭 펠리어트를 만나러 가야만 했다! 로렐라는 결의를 다지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밥 먹는 시간도 아낀 채 말을 달리다 보면 시간은 어떻게든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절망하기엔 이르…….

16550618598751.jpg“안 그래도 알아봤지만, 다른 길도 마찬가지랍니다.”

유능한 집사는 자그마한 가능성마저 아무렇지 않게 부숴 버렸다.

16550618598751.jpg“제일 큰 다리가 무너졌는데 작은 다리들이라고 멀쩡할 리 없겠지요. 급류가 넘실대는 강에는 배를 띄울 수도 없어서 나룻배들도 모조리 철수했답니다.”

젠장. 이놈의 인생은 왜 이렇게 뜻대로 되는 게 없어! 왜!

16550618598763.jpg“그럼 서신만이라도 어떻게 보낼 수 없을까? 펠리어트에게 내가 꼭 좀 만나고 싶어 한다고……!”

16550618598751.jpg“아가씨, 우편 마차도 똑같지요. 길이 다 무너졌는데 배달부가 무슨 수로 갈 수 있겠습니까.”

16550618598763.jpg“어허엉……!”

결국 로렐라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16550618598763.jpg“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집사는 거의 통곡하기 시작한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관절 무슨 이유로 갑자기 북부에 가겠다고 이러시는지 도통 알 수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16550618598763.jpg“이럴 수는 없다고, 허어엉!”

16550618598751.jpg“죄송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 절규하는 로렐라 앞에서 이유를 물을 수도 없어서 그는 그저 자기 잘못인 양 푹 고개만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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