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다음엔 누구 차례일까?2021.10.23.
여느 때처럼 화창한 아침이 밝았다,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일찍 눈을 떴다.
“아가씨. 피곤하실 텐데 좀 더 주무시지 않고요.”
아침 시중을 돕던 조이가 조심스레 권유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할 일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내게 살갑게 말을 붙여 주고 사람들을 잔뜩 소개해 준 르웬 백작 부인과 만찬에 초대해 준 에른 후작가의 그레이스 부인에게 감사 편지를 써야 했다. 물론 나와 동행해 준 레어넌 단장은 말할 것도 없고.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에 보내는 거긴 하지만, 그게 아니어도 귀족 사회에서는 이렇게 하는 게 기본 예의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갇혀 지냈어도 2년간 공작저에서 보고 배운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하녀에게 얘기해 작은 선물도 함께 준비했다. 그렇게 여러 통의 서신을 공들여 작성하고 나니, 오전 시간이 금방 지나 버렸다. 하지만 내겐 여전히 쉴 틈이 없었다. 나는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바로 레아의 가게로 향했다. 그동안 무도회 준비다 뭐다 해서 너무 오랫동안 가게에 얼굴을 내비치지 못했으니까.
“로렐라 님!”
문을 열자마자 홀에 서 있던 레아가 반색하며 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언제 오시는지 목을 빼고 기다렸어요.”
늘 반갑게 맞아 주긴 했지만, 오늘은 유달리 더 들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뭐지? 왜 그러는 거지? 하지만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나를 이끌어 의자에 앉히자마자 레아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낸 덕분이었다.
“황궁 연회에 가셨다면서요? 레어넌 단장님께 춤 신청을 받으셨다는 소식 들었어요!”
“네……?”
발을 동동 구르는 레아의 뒤로 어느새 직원들까지 모여들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뿐만 아니라, 가게 안에 있던 몇몇 손님들도 대화를 멈춘 채 이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티가 났다.
“빨리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네?”
“아, 아니. 그게…….”
순간 당황해 말을 더듬고 말았다. 레아의 가게는 워낙 여러 손님이 드나드는 곳인지라, 평소에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들려오곤 했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런 이야기가 퍼지다니. 이래서 발 없는 말이 무섭다고 하는 거구나. 나는 진땀까지 흘리며 그저 있었던 사실만을 아주 간략히, 그리고 담백하게 전달했다. 그런데도 레아는 여전히 두 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연신 채근했다.
“그래서 레어넌 단장님하고는 설마 춤만 추고 헤어지신 건 아니겠죠? 아이참, 우리 사이에 숨길 게 뭐가 있어요. 속 시원히 말씀 좀 해 보세요.”
춤만 추고 산책 좀 하다가 헤어졌는데요. 혹시 제가 잘못한 건가요……? 괜히 머쓱해져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얼버무릴 수 있을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 반가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앞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였다.
“어머, 손님이 오셨나 봐요.”
나는 얼른 말하며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서 오세…… 어?”
인사를 끝까지 하지도 못한 채 그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갈색 머리,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초록빛 눈동자. 값비싸 보이는 의복. 긴 다리로 성큼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위너드였다. 아니, 니가 왜 여기서 나와? 하마터면 소리 내어 말할 뻔해서 황급히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하는 나 대신, 레아가 그쪽으로 재빠르게 다가갔다. 잠깐만. 지금 레아의 눈에도 위너드가 보이는 건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혹시 저희 가게는 처음이신가요?”
“네. 차를 좀 마시려고 하는데, 주문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메뉴판을 가져다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쪽에 앉으시면 돼요.”
……아주 잘 보이는 모양이다. 당황해서 입만 뻐끔대는 사이, 위너드는 레아가 안내한 자리에 앉아 우아하게 턱을 괴고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위너드는 항상 나 혼자 있을 때 유령처럼 나타나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이렇게 누가 있을 때 나타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는 홀린 듯 위너드가 앉은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싱긋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야, 로렐라.”
“왜 갑자기…… 혹시 무,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그냥 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도통 불러 주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올 수밖에.”
그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레아가 메뉴판을 놓친 것이다. 휘둥그레진 눈을 보니 방금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긴 하지. 나는 얼른 레아를 주방으로 밀어 넣다시피 한 뒤, 떨어진 메뉴판을 주워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위너드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니. 그나저나 여긴 무슨 차가 괜찮지?”
미간을 구긴 내 표정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는 그저 태연자약했다. 그런데 어쩐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늘 과할 정도로 화려하게 갖춰 입은 차림새라든가 유들유들한 미소에도 변함이 없었는데, 평소와는 느낌이 좀 다른 듯했다. 나는 한껏 소리를 낮추며 그에게 말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 네가 이렇게 갑자기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이상해서 그래. 거기다 여기는…….”
주변을 힐끗 보자 직원들은 물론, 가게의 손님들도 우리 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나를 아는 사람들이란 말이야. 안내자는 후보의 상황에 일체 영향을 주면 안 되는 거 아냐?”
물론 레아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지만, 가게의 다른 점원들은 어떨지 솔직히 알 수 없었다. 만약 오늘 일에 대해 누군가 살을 붙여서 귀찮은 소문이라도 내면 뒷수습은 온전히 내 몫이 될 테니까.
“뭐, 일이 생기긴 했지.”
하지만 위너드는 속 시원한 대답은커녕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나직한 그의 말이 귀에 내리꽂힌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그런데도 위너드는 여전히 뭐라 말해 줄 기미가 없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에 있는 레아에게 최고급 홍차를 부탁했다.
“로렐라 님! 저 잘생긴 신사분은 또 누구예요? 무도회에서 만난 분인가요?”
“세상에, 저 고급스러운 차림새 좀 봐요. 혹시 왕족이신가요?”
홀에 나와 있던 직원들이 어느새 안 보인다 했더니, 죄다 주방에 몰려와 있었다. 레아를 포함한 직원들은 홍차를 준비하면서도 소란스럽게 굴며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을 빛냈다.
“아뇨, 그냥 아는 지인이에요.”
나는 어색한 미소로 답하며 두 개의 찻잔과 포트가 갖춰진 쟁반을 손에 들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그리고 곧장 위너드의 앞에 그걸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와 그의 찻잔에 짙은 호박색 홍차가 채워졌다. 위너드는 무척이나 고상하고 품위 있는 동작으로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그러더니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도회가 즐거웠나 봐? 얼굴이 무척 좋아 보이네.”
고요히 가라앉은 시선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푹푹 발이 빠지는 늪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입술을 꾹 깨물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위너드가 작게 한숨을 흘렸다.
“좋아,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니, 더 시간 끌 것도 없겠지.”
위너드는 결심한 듯 잔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규칙이 바뀌었어, 로렐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규칙이라니, 무슨 규칙?”
급히 되물었지만, 생각할 수 있는 대답은 딱 하나뿐이었다.
“혹시 주식…… 시스템을 말하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위너드는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기 없이 싸늘한 얼굴과 무섭게 굳은 초록빛 눈동자를 보니 뭔가 좋은 소식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입술을 움직였다.
“어, 어떻게 바뀌었는데……?”
“이게 곧 알게 될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게의 종이 또다시 딸랑, 하고 울렸다. 문이 열리고 외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서너 명의 젊은 여자들이 우르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 가게를 찾는 손님 중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유형의 무리였다. * * *
“이 가게 꼭 와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분위기가 참 좋네요.”
그녀들은 무척이나 친한 사이인 듯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테이블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냥한 미소로 능숙하게 주문을 받은 레아는, 나와 위너드를 힐끔대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엔 그게 난처하지도,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위너드가, 그 테이블을 눈짓한 탓이었다. 나는 그저 그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위너드 역시 묵묵히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 무뚝뚝한 로건 백작님이 클레어에게 먼저 춤을 신청하다니!”
“그러니까요. 아무리 봐도 백작님이 클레어를 좋아하시는 게 분명해요.”
다른 손님들이 계속해서 들어온 탓에 가게는 좀 어수선했지만 근처에서 들리는 대화를 엿듣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야기로 미루어보건대 그녀들은 나처럼 황궁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 영애들인 듯했다.
“클레어, 그러지 말고 이참에 고백하는 건 어때요?”
누군가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아까부터 조용히 듣고만 있던 한 여자가 입을 가린 채 조용히 웃었다. 수수한 차림새였지만, 아름답고 청초한 분위기 덕분에 그중에서도 무척이나 돋보이는 여자였다.
“백작님과 저는 그냥 소꿉친구라니까요.”
그녀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게다가 백작님께는 이제 곧…… 정해진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 거예요.”
그 말에 두 귀가 쫑긋 섰다. 정해진 운명의 상대라니?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설마…….’
불현듯 든 기시감에 조금 더 그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그때.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클레어라고 불린 여자가 머리끝부터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헛것을 본 건가 싶어 재빠르게 눈을 비비는데, 눈앞에 반짝거리는 빛무리가 생겨나더니……. 그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헉!”
나는 외마디 비명을 차마 삼키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사라진 게 맞았다. 분명 멀쩡하게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과 자연스레 대화도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래알 흩어지듯 사라진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그저 허상에 불과한 신기루였다는 듯이!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 덕분에 내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테이블이 흔들리며 싸늘하게 식어 버린 찻잔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충격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찻잔을 꽉 그러쥐며 애써 감정의 동요를 감추려는데, 그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말이 이어졌다.
“다음 주에 있을 티 파티는 어떻게 할까요? 초대장을 미처 다 돌리지 못했는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얼른 보내는 게 좋겠어요. 하아, 우리는 왜 이렇게 일을 만들지 못해 안달일까요? 다음부턴 조촐한 모임 아니면 열지 말아야겠어요. 다들 어서 약속해 주세요.”
“산통을 깨는 거 같아 미안하지만, 우리 저번에도 똑같은 다짐을 하지 않았나요……?”
까르르, 하는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이, 그것도 방금까지만 해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자신의 친구가 사라졌는데도 그녀들은 처음부터 자기들끼리만 있었던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하얗게 텅 비어 가는 머릿속에 남은 건, 오로지 한 줄의 문장뿐이었다. 그동안 수백 번도 넘게 읽고 또 읽어서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는 바로 그 문장이.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는 전부 소멸될 것이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완벽하게 지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설마…… 벌써 주인공이 결정된 건가? 그럼 나도 사라지는 거야?
“이게 바뀐 규칙이야, 로렐라. 이제부터 주식을 가장 적게 판 후보부터 차례대로 사라지게 될 거야.”
“나, 나는 후보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갈라진 목소리가 높이 올라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가 한 사람 더 있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린 영애들이 나를 흘끗댔다. 패닉으로 인해 텅 비워진 머릿속에 남은 건,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불합리해.’
가장 먼저 후보가 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 최초의 후보가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난 주식을 팔기 시작한 지 겨우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만약 그걸 10년째 계속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누적 판매량이랑은 상관없어. 모든 후보가 일정 기간 동안 판매한 주식을 집계한 뒤, 그중 가장 적게 판 후보가 소멸 대상자가 될 거야.”
“일정 기간……? 정확히 얼마 동안인데?”
“그건 매번 다르겠지. ‘그분’들의 마음에 달렸거든. 그러니 나도 몰라. 한 달 뒤일 수도 있고, 일주일 만에 다시 심판의 날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고저 없이 덤덤한 위너드의 목소리가 소름이 끼칠 만큼 서늘하게 들렸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지루해하는 분들이 많아서 추가된 페널티니까.”
챙그랑! 동시에 놓쳐 버린 찻잔이 아래로 떨어져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분홍빛 하이힐 위로 짙은 색깔의 찻물이 축축하게 배어들었다. 나는 무너지듯 테이블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시나무처럼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귀에 막이라도 씐 듯 소란은 멀게만 느껴졌다.
“로렐라 님, 괜찮으세요?”
그때 레아가 깨끗한 천을 들고 급히 달려와 나를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공포는 가시질 않았다. 그녀 역시 손님이 사라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을 텐데도 그쪽 테이블은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나만을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위너드가 레아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리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리고 반듯한 미소와 함께 천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레아는 말없이 주춤주춤 발을 물렸다. 그녀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간 것은 위너드가 가 보셔도 좋다 눈짓한 다음이었다.
“내가 퀴즈 하나 내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위너드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음에 저 페널티를 받게 되는 건 누구일까?”
마치 독침에 쏘여 딱딱하게 굳은 채 서서히 죽어 가는 짐승처럼, 나는 눈조차 깜박이지 못했다.
“뭐,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조금만 적게 팔았더라도, 네가 사라지는 걸 그녀가 지켜보고 있었을 거란 것만 알아 둬.”
“나, 나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 보려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마저 이윽고 나오지 않게 되었다.
“사라진 후보의 안내자는, 그녀의 곁을 떠나는 걸 선택했어. 함께 소멸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위너드는 축축한 물웅덩이가 생긴 바닥 위로 하얀 천을 떨어뜨리며, 무언가 억누르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절대 널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걸 번복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으니까. 물론 네가 짧게나마 남은 삶을 즐기겠다면, 그것 또한 운명이니 말리진 않을게. 하지만 그 전에 딱 하나만 물어보고 싶군.”
마구 화를 내긴커녕, 한없이 잔잔한 음성이 귓가에 고요히 파고들었다.
“네가 처한 상황이 어떤 건지, 정말 다 이해하고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거야?”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시선을 내리니, 손등에 뼈가 불거질 정도로 꽉 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펴니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든 자국이 붉은 초승달 모양으로 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 버린 드레스 치맛자락도, 서늘한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느낌도, 새하얗게 될 때까지 꽉 깨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마치 모든 감각이 통째로 소멸한 듯했다. 조금 전, 내 눈앞에서 사라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