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행복했던 한때2021.10.20.
“미안……!”
나는 화들짝 놀라서 거의 뿌리치다시피 해 손을 뗐다. 그의 입술에 닿았던 손가락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동시에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화, 화났나 봐.’
금방이라도 ‘감히 내 얼굴에 손을 대?’ 하며 미간을 구길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할까? 아니면 실수였다고 가볍게 얼버무리는 게 나으려나? 까만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펠리어트가 갑자기 작게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샤센이라…….”
빛이 휘장에 가려진 탓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그의 목덜미는 조금 붉게 달아오른 듯했다.
“거긴 웬만한 기사들도 혼자서는 가기 싫어하는 지역인데, 대단하군.”
그가 화제를 돌려 준 덕분에 깜빡 잊을 뻔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펠리어트, 혹시…… 세이블 릴리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어?”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 하지만 릴리가에 대해선 알고 있지. 꽃 이름을 성으로 쓰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뜻밖의 수확에 두 눈이 반짝 뜨였다.
“어떤 가문인데?”
“서부 지방에서 힘깨나 쓰는 후작가야. 릴리 후작은 끔찍할 정도로 탐욕스러운 자라 북부까지 악명이 자자하지.”
“그렇구나…….”
나는 펠리어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인기 많은 사이다 여주다운 설정이다. 주변에 아주 고구마가 널려 있구나. 혹시 이런 설정인가? 원래는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했던 여주가, 자신이 약혼자와 가족에게 이용만 당하다 버려졌다는 걸 깨닫고 회귀해서 복수의 칼을 휘두르는…….
“그런데 그건 왜 묻지?”
한창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펠리어트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알려 줘서 고마워.”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역시나 그는 미심쩍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또다시 가까워진 거리에 나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등 뒤로 단단한 벽이 닿았다.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다 꾹 참았다. 새삼스레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마치 밀회라도 즐기고 있는 것처럼 휘장 뒤에 몰래 숨은 두 사람이라니. 혹시 누군가 본다면 쓸데없는 소문이 퍼져 난처해질 게 뻔했다. 나는 얼른 휘장을 살짝 걷고 밖을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난 이만…….”
뒤에 우두커니 선 펠리어트에게 허둥지둥 인사를 건네고는 최대한 시선을 내리깐 채 재빠르게 자리를 피하려던 그때였다.
“잠깐.”
뒤에서 스윽 뻗어 나온 긴 팔이 다시금 나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휘장이 닫히고 빛이 차단되어, 또다시 사위가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혹시, 세이블 릴리라는 여자가 당신을 괴롭히는 건가?”
펠리어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뭐라고?”
“그래서 숨은 것 아니냐고.”
“아, 아니야!”
어쩐지 오해를 산 것 같아 마구 손을 내저었지만, 여전히 날이 선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말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테지.”
혼잣말을 뇌까리던 펠리어트는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화가 난 사람처럼 이를 으득 갈기까지 했다. ……직접 불러서 족치겠다, 라고 들린 건 내 착각이겠지?
“아니, 안 돼!”
나는 얼른 큰 소리로 외쳤다. 너무 당황해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었다. 세이블 릴리를 불러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몰라도, 괜히 내 이름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게 없었다.
“정말 그런 거 아니야.”
펠리어트가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바라보고 있어서, 더욱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세상이 전부 자기 생각대로 돌아간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이 골치 아픈 북부 대공 놈아!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그는 진위 여부를 파악하려는지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 말…… 사실이어야 할 거야.”
“진짜라고 몇 번 말해야 해. 당신이야말로 왜 이렇게 내 말을 못 믿어?”
원망을 가득 담아 눈을 흘기자 비로소 그가 겸연쩍은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못 믿는 건……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찝찝한 게 남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휘장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몇 번씩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 끝에, 나와 관련된 일에 대해 멋대로 행동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겨우 받아냈다.
“그럼 왜 숨은 거지?
하지만 그의 의문은 풀리지 않아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적당히 변명을 짜내려는데, 복도 끝에서 장정 여럿이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레어넌이 걱정하며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그거야 당신이 곤란할까 봐 그렇지.”
“내가? 왜?”
나는 밖으로 나갈 타이밍을 살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전쟁 영웅이 됐으니 사람들 관심은 다 당신한테 향해 있을 거 아냐. 공녀든 왕녀든 가릴 것 없이 대단한 사람들로부터 구애 편지가 많이 온다는 얘기도 들었어. 괜한 소문이 떠돌면 곤란하잖아.”
“로렐라, 잠깐. 나는…….”
그때 남자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휘장 바로 앞을 지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인기척은 점차 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진짜로 가 봐야겠어.”
나는 지체하지 않고 휘장을 걷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살핀 후 조심스럽게 밖으로 몸을 빼냈다. 멀지 않은 곳에 유리로 만든 커다란 장식장이 우뚝 서 있었다. 그곳에 몹시 잘 차려입은 내 모습이 비쳤다.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장식도. 뒤를 돌아보니, 휘장 뒤에서 나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펠리어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머리 장식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이거…… 고마워.”
아무리 누가 보낸 건지 몰랐다고 한들, 선물을 돌려보내긴커녕, 받아서 착용까지 한 마당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게 맞는 듯싶었다. 그러나 뒤늦게 말을 꺼내려니 어쩐지 쑥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멋쩍게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솔직히 덕분에 살았어.”
펠리어트는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인사는 제대로 했으니까.’
나는 급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펠리어트는, 로렐라가 사라진 복도 끝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느릿한 손길로 마른세수했다.
“하…….”
손 틈새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손을 내려 드러난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거…… 고마워.’
예쁘게 미소 짓던 얼굴과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장식보다 더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제 입술을 지그시 누르던 작고 보드라운 손도, 가슴팍에 닿은 동그란 이마도. 그리고…… 여전히 코끝에 맴돌고 있는 향기까지도. 모든 게 그의 심장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이건 무슨 감정일까. 심지어 ‘감정’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쥐고 흔드는 일도 처음인지라, 펠리어트는 드물게 당황하고 말았다.
‘혹시 취한 건가.’
연회장에서 몇 잔 받아 든 독한 술 때문일까. 하지만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었다. 그가 고작 술 몇 잔에 취할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내가 잠시 미쳤나 보군.”
냉소적으로 중얼거린 것도 잠시. 또다시 속살대던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녀든 왕녀든 가릴 것 없이 대단한 사람들로부터 구애 편지가 많이 온다는 얘기도 들었어.’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다니. 그 편지들은 전부 뜯지도 않은 채 벽난로 행 신세가 됐다고 말해 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로렐라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너무나 기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 될 테니,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음미하는 게 좋겠지. 펠리어트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계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어머!”
그때, 2층으로 막 올라온 누군가와 살짝 부딪히고 말았다. 화려한 장신구를 잔뜩 매단 귀부인들이었다.
“실례했습니다, 공작님.”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그녀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펠리어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 늠름한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들은 발그스레한 얼굴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감탄사를 뱉어 냈다.
“어머나.”
“어쩜…….”
뭐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차갑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펠리어트 공작이 저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게 되다니. 단상 위에서 웃은 일로도 연회에 참석한 영애들이 전부 그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저런 근사한 미소를 보게 된다면 아마 전부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그녀들은 비슷한 생각을 이어 가며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펠리어트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다 마주친 한 남자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두리번거릴 때마다, 단정하게 묶은 긴 금발이 남자의 등 뒤에서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펠리어트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의 고개 또한 살짝 위로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는 마치 나무토막을, 혹은 길가의 바위를 쳐다보는 것처럼 무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불꽃이 튀는 듯 팽팽한 분위기가 저변에 가득했다. 먼저 펠리어트가 등을 곧게 편 채,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흔들림 없이 걸음을 옮겼다. 레어넌도 마찬가지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온한 기색으로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나 서로의 어깨가 스치던 그 순간만큼은, 베이기라도 할 것 같은 날 선 기운이 두 사람의 어깨에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 * * 연회장으로 돌아왔지만 레어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르웬 백작 부인에게 물어도 보았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혹시 날 찾고 있는 걸까? 파트너를 너무 오래 혼자 내버려 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를 찾으러 나가 봐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냥 연회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괜히 움직였다가, 또다시 길이 엇갈리면 안 되니까. 즐겁게 환담을 나누는 사람들과 쉬지 않고 연주되는 곡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로 인해 연회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황실의 시종들은 조금의 쉴 틈도 없이 고급 샴페인을 끊임없이 나르고, 또 날랐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연회장의 구석구석을 모두 살폈지만, 레어넌은 물론 펠리어트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 뭐, 워낙 연회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대로 돌아간 것인지도…….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단장님!”
반색하며 뒤로 돌자, 다정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죠?”
“아닙니다. 혹시 지치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지치긴요. 이렇게 힘이 넘치는걸요.”
나는 그 말이 진짜라고 어필하고자 더 씩씩하게 활짝 웃었다. 마침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진 김에 우리는 한 번 더 춤을 추었다. 내 서툰 춤에 완벽히 적응한 그 덕분에, 나는 처음처럼 긴장하지 않고 동작을 제법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봤자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몸을 움직일 때마다 꽃잎처럼 사르르 퍼지는 드레스 치마도 예뻤고 즐거운 듯 미소 짓는 레어넌의 얼굴에 절로 흥이 났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손님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불어났다. 나는 레어넌과 함께 혼잡한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장미 정원으로 향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붉은 꽃송이 위로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은 풍경은, 입이 벌어질 만큼 아름다웠다.
“오늘…… 즐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미향을 가득 머금은 시원한 바람을 흠뻑 쐬고 있는데, 레어넌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누군가를 에스코트한 건 처음이라, 혹시라도 로렐라 님을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네? 아니에요, 저는 덕분에 너무 재미있었는걸요!”
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진심을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나 역시 에스코트를 받은 건 처음이었지만, 그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써 줬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을 만큼요. 춤추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이렇게 즐거운 하루는 처음이에요.”
그러자 레어넌이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앞으로는 더 즐거운 일만 있으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다정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순간 몽글몽글한 기분이 가슴 속에 가득 퍼져 내려갔다. 어쩐지 얼굴에 살짝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유독 따스하게 느껴지는 선한 눈빛을 마주한 채, 그저 고개만을 끄덕였다. * * *
“아가씨, 연회는 어떠셨어요? 즐거우셨나요? 승전 연회는 열흘이나 열린다는데 더 즐기고 오시지 않고요.”
늦은 새벽까지 자지 않고 날 기다려 준 조이가 방으로 향하는 내 뒤를 따르며 쉼 없이 재잘거렸다.
“응, 엄청 재미있었어.”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또 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어.”
“어머,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앞으로도 단장님께서 분명히…….”
조이는 말을 하다 말고 은근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나를 데려다줄 때, 손등에 길게 입 맞추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게 틀림없었다.
“난 이제 잘 거니까 조이도 얼른 쉬어.”
또다시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조이를 얼른 돌려보내고는 황급히 방문을 닫았다.
“후우…….”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그제야 비로소 사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잠이 쏟아져 자꾸만 무거워지는 눈으로 훅 불어난 주식을 살폈다. 잠들기 전에 하는, 습관처럼 굳어진 행동이었다. 이젠 주식 창을 볼 때마다 초조하기보다는 숫자가 점점 늘어가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스템 창을 끄고 멍하니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 아득한 꿈 같았다.
‘정말 즐거웠지…….’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깜빡 움직이던 내 입가에 사르르 미소가 떠올랐다.
‘세이블 릴리에 대한 정보도 알아냈고.’
곧 샤센에 간다는 것과 약혼자를 빼앗은 이복동생이 있다는 것 등을. 그리고 또 하나의 수확이 있다면, 펠리어트와 자연스럽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내게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대화가 통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물론, 심지어 그 대화가 즐겁기까지 하다니. 그저 미친 사이코라고 생각했던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변화였다. 계속 이럴 수만 있다면, 펠리어트의 주식을 파는 일이 그렇게 괴롭지는 않을지도……. 즐거웠던 시간 덕분일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쭉 이대로만 하는 거야, 로렐라.”
나는 행복한 기분에 휩싸여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내게 그런 일이 닥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