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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뜻밖에 알게 된 사실 (31/173)

31화. 뜻밖에 알게 된 사실20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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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어트는 곧 단상 밑으로 내려섰다. 혹시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닐까 잠시 괜한 걱정을 했으나, 다행히 시종이 안내한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예법인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과는 달리 그쪽에서는 사람들 뒤에 선 내가 보이지 않을 테니까. 펠리어트 다음으로 등장한 건, 내 예상대로 에크레투스 기사단이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하게 선 기사들은 모두 상냥한 미소와 선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곧고 바른 기세와 강인함이 더욱 돋보였다. 그 뒤로도 계속 줄줄이 치하가 이뤄졌다. 그 시간은 내게 지루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별세계처럼 느껴졌다. 모든 하례가 끝나고, 황제와 황후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축언을 건넨 뒤 외국 사절단과 만나기 위해 특별 만찬장으로 측근들을 이끌고 이동했다. 연회장에는 다시 즐거운 웃음소리와 함께 연주가 울려 퍼졌다. 홀로 남은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 보이는 펠리어트는 놀랍게도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매일 도도한 까마귀인 양 혼자 있는 것만 보다가, 사람들에게 질문 공세를 받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발이 묶인 건 레어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양해를 구하며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인사를 하려는지 마구잡이로 몰려들어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나는 레어넌에게 웃는 얼굴로 살짝 눈짓하고는, 홀 밖으로 빠져나갔다. 솔직히 말해, 예전 호숫가에서 있었던 일이 재연될까 걱정됐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내게로 올 거란 보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화근이 될 만한 일은 미리 싹을 잘라 두고 싶었다. 내가 도끼병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안 그래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 보이던 두 사람인데, 그런 일까지 겪었으니 뒤끝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 아닐까. 게다가 장식이나 옷이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확인도 하고 싶었다. 긴장한 탓에 땀도 나서 마스카라가 번져 판다가 되어 있을까 봐 염려되기도 했고.

16550617947864.jpg‘한 층 위에 하녀들이 상주하는 파우더룸이 있다고 했지.’

르웬 백작 부인이 알려 준 정보를 따라 밖으로 나가니 바로 옆에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이 보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성하게 퍼지는 보랏빛 치맛자락을 살짝 잡은 채 계단을 오르던 그때였다.

16550617947868.jpg“……가까이서 보니 정말 더 뻔뻔하게 생겼네요.”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50617947868.jpg“공작님과 이혼한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거라지요? 게다가 천박한 붉은 머리 좀 보세요! 세상에, 어쩜 그리 촌스러운지.”

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가 귓전을 잡아끌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니, 계단 근처에 마련된 높은 장식 테이블에 서서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심술궂은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었다. 나를 두고 하는 소리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이혼 이야기가 나온 걸 보니 무늬만 공작 부인이었던 날 용케도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마도 저들 중, 2년 전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이 있는 거겠지.

16550617947868.jpg“왜 그러시죠? 혹시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내가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중 한 명이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눈빛에는 여전히 노골적인 무시와 경멸이 묻어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 하나가 뇌리를 반짝 스치고 지나갔다. 아! 이거 혹시 그런 건가? 무도회나 연회 때 꼭 한 번쯤 등장하는, ‘주제도 모른 채 까불다 본전도 못 찾는 애들’. 이번 화에 작가가 정말 쓸 거 없었나 보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장면을 이렇게 눈앞에서 목격하다니. 거기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다른 쪽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16550617947864.jpg‘혹시 주식 좀 팔 수 있으려나?’

세이블 릴리에게 크게 한턱 쐈던 ‘사이다 만수르’가 생각났다. 노골적인 이름 덕분에 뭘 바라는지 모를 수가 없는 분이다.

16550617947864.jpg‘하지만 많이 팔릴 것 같진 않은데…….’

왜냐하면, 지금 줄 수 있는 ‘사이다’는 한계가 있으니까. 너무 흔한 장면이라 임팩트도 좀 약할 텐데. 오죽했으면 나까지 ‘작가가 쓸 게 없었구나’라고 생각했겠는가. 10주 정도면 많이 팔리는 수준일 거다.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16550617947864.jpg‘그럼 일단 좀 팔아 볼까?’

내가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깔깔거리는 사악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16550617947868.jpg“어머, 가여워라.”

16550617947868.jpg“가엽긴요. 수치심도 모르고, 자존심도 없는 거겠죠.”

16550617947868.jpg“그저 아는 거라곤 교태부리는 것뿐인가 봐요.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해 저 꼴이 된 거겠지만요.”

상처를 입긴커녕, 나는 주먹을 꼭 쥔 채 속으로 마구 외쳤다.

16550617947864.jpg‘그래, 그거야. 더 욕해 줘! 맞아도 싸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심하게 욕하라고!’

우선은 마음껏 떠들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절정에 달했을 때 화려하게 팰(?) 생각이다. 물론 주먹 말고 말로만 조곤조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뚝배기를 후려갈기고 싶지만, 이런 곳에서 그럴 수는 없다. 나는 품위를 지켜야 하는 주인공 후보니까.

16550617947868.jpg“주제 파악도 못 하는 한심한…….”

그런데 그때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이죽대던 말소리가 갑자기 뚝 멈췄다. 동시에 나를 비웃던 그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16550617947868.jpg“이만 가야겠어요!”

16550617947868.jpg“조, 좋아요……!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네요.”

그들은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나 하나둘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16550617947864.jpg“어……?”

어디 가! 내 주식! 애타게 손을 뻗었지만, 눈앞의 테이블은 금세 텅 비어 버렸다. 하지만 어쩐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불안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16550617947864.jpg“아.”

내 뒤에 있던 건, 삐딱하게 선 펠리어트였다. 줄곧 그들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던 펠리어트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0617978196.jpg“……감히.”

만약 어린아이가 봤다면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을 만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16550617947864.jpg“아, 내 주식.”

동시에 내 입에서도 한탄이 흘러나왔다.

16550617978196.jpg“뭐?”

16550617947864.jpg“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짧게 혀를 차더니 내 곁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0617978196.jpg“당신답지 않게 왜 저런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 건데, 네가 뭘 알겠냐…….

16550617978196.jpg“다음부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마구 욕을 하든지, 소리를 치든지 해.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16550617947864.jpg“그래……. 너무나도 고마워…….”

영혼 없는 대답에 펠리어트의 입에서 낮은 헛기침이 터졌다.

16550617978196.jpg“고작 이런 일에 고마워하긴. 일일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쩐지 뿌듯해하는 것 같아 더욱 속이 끓었다.

16550617947864.jpg‘아오, 아까워!’

얼마 안 팔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막상 기회를 놓치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단 10주라도 그게 어디 땅 파서 나오는 거냐고! 아무튼 도움이 안 된다니까, 도움이.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펠리어트를 한번 슬쩍 흘기고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차가운 눈빛을 받은 그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16550617978196.jpg“로렐라, 잠깐만.”

2층 복도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펠리어트가 내 이름을 부르며 긴 다리로 나를 금세 따라왔다.

16550617947864.jpg“왜?”

16550617978196.jpg“궁금한 게 있어서.”

16550617947864.jpg“뭔데?”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나를 불러 세워 놓고도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한참 만에 열린 입술 사이로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 흘러나왔다.

16550617978196.jpg“다이아몬드 말고 또 뭘…… 좋아하지?”

16550617947864.jpg“그게 무슨 소리야?”

16550617978196.jpg“당신 마음에 드는 걸 전부 이야기해. 좋아하는 색깔이라든가, 드레스 스타일 같은 거 말이야.”

아니, 내가 왜?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그의 시선이 내 머리 장식에 꽂혀 있는 게 보였다. 덕분에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다.

16550617947864.jpg“잠깐. 그 옷, 역시 당신이 보낸 거였어?”

16550617978196.jpg“그럼 나 말고 보낼 사람이 또 누가 있지?”

펠리어트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16550617978196.jpg“어떤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면 좋겠군. 저택의 드레스 룸을 채워 넣을 때 참고해야 하니까.”

16550617947864.jpg“뭐, 뭐라고?!”

황당한 나머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16550617947864.jpg“설마 그 저택이란 게…… 고, 공작저를 말하는 건…….”

16550617978196.jpg“원한다면 물론 거기도 가득 채워 주고.”

태연자약한 얼굴로 내 말을 가로채는 펠리어트를 보니 또다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그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자꾸만 맴돌았다. 동시에 짙은 후회가 엄습했다. 이게 다 머리 장식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조이가 아무리 두 팔 걷고 말려도, 그냥 아무것도 꽂지 말걸……!

16550617978196.jpg“다른 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이런 걸 선물하는 건 처음이라 착오가 좀 있던 모양이군. 하지만 다음엔 완벽할 거야.”

어이없는 말에 당혹스러워 이마를 감싸 쥔 나와는 달리, 그는 끝까지 당당했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2,000주를 구매합니다.」 「인생 첫 선물. 존맛.」 「‘저 새끼 남주 아니죠?!’ 님이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2,000주를 구매합니다.」 「우웩. 먹으면 백퍼 배탈 날 듯.」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발끈하여 1,000주를 추가 구매합니다.」 「님, 취존해 주시죠?^^」 「‘저 새끼 남주 아니죠?!’ 님이 코웃음 치며 1,000주를 추가 구매합니다.」 「앗, 죄송. 제가 못 먹을 거 보면 구역질이 나와서.^^」 시스템 창에서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울리는 알람 때문에 나도 모르게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경쟁하듯 주식을 많이 사는 건 좋은 일이지만, 설마 싸우는 건 아니겠지?

16550617978196.jpg“로렐라, 괜찮나?”

그런데 그때, 딱딱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16550617978196.jpg“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거지? 혹시 어디 아픈 건가?”

퍼뜩 정신을 차리니 내 얼굴을 걱정스레 응시하고 있는 다정한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미쳤나 봐.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다정하다니. 늘 차갑고 모질었던 눈이 갑자기 다정하게 느껴지다니! 심지어 내 안색을 살피려는 듯, 펠리어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16550617947864.jpg‘아니, 또 왜 이러는 거야!’

아무래도 빨리 파우더룸으로 가서 화장을 고치는 척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50617947864.jpg“아, 아무 데도 안 아파. 그럼 나는 이제 그만 가 볼게!”

그 일념으로 허둥지둥 몸을 돌리려는데……. 계단 밑에서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니 몇몇 영애들이 이쪽을 향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동시에 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50617947864.jpg“앗!”

화려하고 고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서너 명의 젊은 여자들 중,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다. 비단결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세련되면서도 발랄한 느낌을 자아내는 살굿빛 드레스, 그리고 새하얀 진주로 만든 장식이 달린 긴 레이스 장갑까지. 바로…… 그녀였다. 내 라이벌인, 세이블 릴리!

16550617978196.jpg“……로렐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펠리어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곁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주변을 다급히 둘러보니, 커다란 기둥 사이에 가림막처럼 쳐 있는 붉은 휘장이 보였다.

16550617947864.jpg“이쪽으로 빨리!”

나는 그의 팔을 막무가내로 잡은 채, 그쪽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 * *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으나 곧 깨달았다. 그녀가 내 얼굴을 아는 것도 아니니 굳이 숨을 필요 없었다는 사실을.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하는 건가…….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밖으로 나가면 더 이상하게 보일 게 분명했다. 원래 조각상이 놓여 있던 자리였는지 휘장 뒤는 텅 비어 있었지만, 무척이나 좁았다. 덕분에 펠리어트의 탄탄한 가슴팍에 거의 이마가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러나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지금 나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16550617978196.jpg“대체 무슨 일…….”

16550617947864.jpg“쉿!”

컴컴한 공간 속에서 조용한 음성이 나지막이 울렸다. 나는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봐 펠리어트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여자들의 말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16550617947868.jpg“아무리 명의라지만, 진찰을 받기 위해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다니요. 아버님의 병환이 얼른 좋아지셔야 할 텐데…….”

바로 그날 밤, 소름 끼치게 웃던 목소리다.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16550617947868.jpg“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곧 털고 일어나시겠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세이블 님.”

16550617947868.jpg“괜찮으시다면 제가 샤센 지방에 가서 의사를 한 번 만나 볼까요? 어떻게든 직접 모셔 올 방법이 있을 거예요.”

16550617947868.jpg“네? 아, 아니에요! 거긴 무척이나 험한 지역인걸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시는 거구요.”

16550617947868.jpg“샤센에 볼일이 있거든요. 어차피 제 일이 있어 가는 건데, 간 김에 라피체 영애에게 도움까지 줄 수 있다면 제가 더 기쁠 것 같아 그래요.”

16550617947868.jpg“세이블 님…….”

감격에 차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617947868.jpg“이렇게 감사한 일이…….”

16550617947868.jpg“우린 친구잖아요. 친구 사이에 감사하다는 인사는 없어도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는 정말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찬 것처럼 느껴져서, 정말 그날 봤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역시 세이블도 나처럼 연기하는 건가 봐. 아니, 근데 뭐 저렇게 잘해? 혹시 전생에 배우였던 건 아니겠지?

16550617947868.jpg“아무래도 한시가 급한 일이니, 일정을 좀 더 앞당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올게요.”

이윽고 앞으로 급하게 걸어가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남은 여자들은 휘장 근처에 멈춰 서서 저마다 세이블을 칭송하기 바빴다.

16550617947868.jpg“세상에 저렇게 천사 같은 분이 또 있을까요.”

16550617947868.jpg“아마 온 대륙을 뒤져도 세이블 님처럼 좋은 분은 없을 거예요.”

16550617947868.jpg“그렇고말고요. 심지어 약혼자를 빼앗아 간 이복동생이 있는데도, 여전히 그 가문과 잘 지내시는 걸 보면 정말이지…….”

16550617947868.jpg“쉿. 우리 그 이야긴 꺼내지 않기로 했잖아요.”

잠시 서서 환담을 나누던 영애들은 이윽고 휘장을 지나쳐 계속 걸어갔다. 이윽고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잠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약혼자를 빼앗아 간 이복동생과 잘 지낸다니, 저 악녀가? 황당함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나, 그 설정……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16550617978196.jpg“……로렐라.”

그런데 그때, 억눌린 듯한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시선을 드니 살랑거리는 짧은 흑발과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새카만 눈동자가 보였다.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천천히 다가와 내 손목을 살포시 잡은 순간, 살짝 위로 들려 있는 그의 입술이 또다시 부드럽게 움직였다.

16550617978196.jpg“아직도 말하면 안 되는 건가?”

입술을 꾸욱 누르고 있던 검지 위로 얕은 숨결과 함께 부드러운 살갗이 스쳤다. 마치…… 불에 닿은 것처럼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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