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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처음으로 마주한 것 (30/173)

30화. 처음으로 마주한 것2021.10.13.

빙의한 후로 한 번도 춰 본 적 없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춤에 매우 서툴렀다. 지금 발이 리듬에 맞춰 저절로 움직이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몸에 각인된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로렐라 메이레드는 귀족 영애로서 교육받고 자라 왔으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움직’이는 거지, 제대로 추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하지만 무도회에서 춤추는 걸 너무나 동경해 온 내게 다정하고 잘생기기까지 한 유일한 친구가 춤 신청까지 해 줬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해?

16550617782951.jpg‘또 밟았어, 또!’

아니다. 그냥 거절할걸. 급하게 나간 발이 레어넌의 발등을 꾸욱 누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와, 아프겠다. 이번 건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제대로 아팠을 거야.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마흔아홉 번째 사과를 내뱉었다.

16550617782951.jpg“죄송합니다……!”

16550617782962.jpg“아닙니다. 당연히 실수할 수도 있는걸요.”

의연한 목소리였지만, 레어넌은 애써 참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자 등에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레어넌의 어깨 너머로 뻣뻣하게 굳은 나와는 달리 우아하게 사뿐사뿐 춤을 추는 커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엔 아까 소개받은 르웬 백작 부인도 있었다. 역시 인싸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어.

16550617782962.jpg“이마에 땀이 나는데……. 아무래도 잠깐 쉬시는 편이 좋겠군요.”

다른 사람들의 춤을 구경하느라 발을 잠시 멈추자 레어넌은 정복 안쪽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살짝 두드려 주며 날 걱정했다.

16550617782951.jpg“그럼 조, 조금만…….”

나는 얼른 그의 손에서 손수건을 넘겨받아 이마를 훔쳤다. 사실 쉬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오십 번쯤 발을 밟힌 레어넌 단장이겠지만, 나 역시 하도 힘을 주느라 다리가 덜덜 떨렸다. 결국 그의 부축까지 받아 꼴사납게 절뚝거리면서 연회장에 마련된 편안한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는 게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느껴졌다.

16550617782951.jpg“하아…….”

소파에 앉아 레어넌이 가져다준 시원한 음료를 마시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16550617782962.jpg“괜찮으십니까?”

그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나는 얼른 자세를 바로잡으며 변명을 웅얼거렸다.

16550617782951.jpg“실은 2년 만에 춤을 추는 거라서…….”

그나마 내가 북부에서 어떻게 지내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레어넌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2년이 아니라 23년 만에 처음 춰 보는 춤이긴 하지만, 그것까지 솔직히 말할 순 없으니까.

16550617782951.jpg“옛날부터 몸으로 하는 건 워낙 못했거든요.”

나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멋쩍은 미소까지 덧붙였다.

16550617782962.jpg“누구나 잘하는 게 있으면 못하는 것도 있는 거니까요.”

부드러운 위로를 건넨 레어넌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제안했다.

16550617782962.jpg“괜찮으시다면, 제가 연습 상대가 되어 드릴까요?”

16550617782951.jpg“네? 바, 바쁘신 분께 그런 것까지 부탁할 수는…….”

16550617782962.jpg“연습하면 금방 좋아지실 겁니다. 꼭 도와드리고 싶군요.”

다정한 목소리에는 어딘가 모르게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문득 그가 기사단장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평소 기사들의 훈련을 참관하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했던 것도.

16550617782951.jpg“설마 검술 훈련처럼 막 굴리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16550617782962.jpg“예?”

진심을 반쯤 담아 농담을 건네자 레어넌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16550617782962.jpg“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저 로렐라 님과 함께…….”

하지만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급히 다물었다. 동시에 얼굴이 확 붉어지기까지 했다.

16550617782951.jpg“저랑요? 그게 무슨 말씀…….”

이어지지 못한 뒷말이 궁금해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보던 찰나, 연회장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더니 갑자기 수많은 시종이 일렬로 줄지어 등장했다. 나는 말을 멈춘 채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165506178124.jpg“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커다란 외침이 울려 퍼지기 무섭게 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황제 부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화들짝 놀랐지만, 얼른 소파에서 일어서 주위 사람들을 따라 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살짝 들어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양옆으로 늘어선 시종들 사이로 두 사람이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흰색과 금색이 조화를 이루는 아주 화려하면서도 고결하게 느껴지는 정복 차림의 황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황가의 문양을 수놓은 망토가 위엄 있게 펄럭였다. 그에 맞춰 금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황후는 인자하면서도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두 사람의 희끗희끗한 머리 위를 장식한 보석이 가득 박힌 커다란 왕관이었다. 그들의 뒤로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화려하게 꾸민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아마도 황제 부부를 보필하는 사람들인 듯했다. 처음으로 알현하는 황제와 황후의 행차였다. 나는 순식간에 압도되어, 황제 부부가 홀의 가장 안쪽에 마련된 단상 위로 올라가 커다란 의자에 앉을 때까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잠시 좌중을 둘러보던 황제가 엄숙한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165506178124.jpg“다들 고개를 드시오.”

그제야 사람들이 굽혔던 허리를 조심스럽게 폈다.

165506178124.jpg“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 아닐 수 없소. 오랜 전쟁 끝에, 그토록 염원하던 선조들의 영토를 되찾았으니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이오.”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기쁨의 탄성과 함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황제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165506178124.jpg“오늘은 부디 그 기쁨을 함께 누려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그럴 자격이 있는 분들입니다.”

곧바로 황후가 말을 받자, 황제는 지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178124.jpg“기쁨을 함께하기 전에 큰 공을 세운 이의 업적을 치하하는 게 우선이 되어야겠지. 제국을 더욱 강건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이름들을 모두 똑똑히 새기도록 하시오.”

그때 레어넌이 나지막이 귓가에 속삭였다.

16550617782962.jpg“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내게 양해를 구하곤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건, 나도 신전에 있을 당시 얼굴을 본 적 있던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제국을 수호하는 에크레투스 성기사단이 황제에게 치하받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니, 놀라워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웃는 얼굴이 어쩐지 보기 좋았다. 고급스러운 두루마리를 들고 있던 시종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165506178124.jpg“체임버스 가문의 펠리어트 공작님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뭐?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귓전을 강타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들뜬 목소리로 소곤대던 좌중도 마치 찬물을 맞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윽고 훤칠한 키를 가진 남자가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천천히 황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세상에. 금빛 연회장 한가운데를 조용히 가로지르는 사람은 정말로…… 펠리어트였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날, 그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열렸던 연회에서조차 그는 짧게 인사만 건네고 그대로 서재로 올라가 버렸다. 내가 알고 있는 펠리어트는, 자신을 위한 자리도 피할 정도로 연회를 싫어했다. 물론 이건 일반 연회도 아니고, 황제의 부름까지 있었을 테니 불참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놀라운 풍경이었다. 펠리어트와 연회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도 고급스러운 연회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평소 즐겨 입는 것과는 다른 짙은 자줏빛 재킷과 그 안에 받쳐 입은 검은 실크 셔츠에는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다. 처음 보는 검은색 어깨띠를 두르고 다이아몬드 장식까지 달린 크라바트를 한 차림은, 마치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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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런데 잠깐만. 저 자줏빛은…… 어디서 많이 본 건데!?

165506178124.jpg“가까이로 오게, 펠리어트 공작.”

그때 황제가 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름에 맞추어 긴 다리 역시 움직였다. 무거우리만치 가라앉은 공기와 얼어 버린 사람들의 표정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당당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발걸음은 마치 한 마리의 우아한 맹수와도 같았다. 오늘따라 부드러운 흑발 아래 자리 잡은 완벽하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 때문일까. 딱딱하게 굳었던 사람들의 눈빛이 어느새 경탄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상당수의 영애는 발그스레한 얼굴로 그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렬한 시선을 보내기까지 했다. 이윽고 단상 위로 올라간 펠리어트가 황제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세를 낮추었다.

16550617840372.jpg“황제 폐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넓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165506178124.jpg“잘 와 주었소, 펠리어트 공작!”

황제는 반색하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165506178124.jpg“그대를 만나길 학수고대하였소. 공작은 이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16550617840372.jpg“과찬의 말씀이십니다.”

165506178124.jpg“황실은 북부에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겠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증인이 되어 줄 테지. 공작에게도 큰 상을 내리고 싶은데, 뭐든 좋으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빠짐없이 이야기해 보시오.”

16550617840372.jpg“영광입니다, 폐하. 다만 생각할 시간을 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예의 바른 태도와 품위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말투까지. 그래서인지 도통 펠리어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어서 말이다.

165506178124.jpg“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시간을 들여 생각하시오. 크고 좋은 그림일수록 원래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황제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지 큰 소리로 껄껄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펠리어트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 뒤로도 숱한 칭찬이 이어졌지만, 눈빛은 그저 잔잔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듣는 사람이 다 낯뜨거워지는 극찬이 끝난 뒤에야 물러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한 그가 몸을 쓱 돌린 순간이었다.

16550617782951.jpg‘앗.’

깊고 그윽한 검은 눈동자가 하필이면 이쪽을 향했다. 마치 사냥감을 찾는 맹수의 눈 같아서 나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워낙 짧은 순간이라 날 발견하진 못했겠지만, 어쩐지 자꾸만 서늘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설마 착각이 아닌가?

165506178124.jpg“어머, 조심하세요.”

주위를 살피지 않고, 계속 주춤주춤 물러나느라 옆에 서 있던 한 부인과 부딪히기까지 했다.

16550617782951.jpg“죄, 죄송합니다.”

165506178124.jpg“괜찮으세요?”

고개를 푹 수그린 내 모습이 심상치 않다 생각했는지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걱정해 주었다. 나는 제대로 된 대답도 못 하고 수차례 끄덕이기만 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지고 나서야 내 뒷걸음질도 멈추었다. 이제는 고개를 들어도 되지 않을까? 인파 속에 섞여 있으니 나를 봤을 리가 없고, 또, 이쯤 하면 내려가지 않았을까? 수많은 갈등 끝에, 결국 고개를 위로 스르륵 든 그때였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영롱한 빛을 띤 새카만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향해 있었다. 제법 먼 거리에서도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입고 있는 옷, 하고 있는 장신구 모두를 샅샅이 훑는 듯한 강렬한 시선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면서 천천히 발을 물렸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이윽고 그 시선이 내 머리카락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다이아몬드 장식 위로 박혀 든 순간. 펠리어트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황제의 온갖 치하를 받았을 때조차 조금의 움직임도 없던 입술이. 여기저기서 술렁거리는 목소리가 신경을 잡아끌었다. 더불어, 어디선가 거세게 쿵쿵대는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믿기지 않지만,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손등이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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