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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그거면 충분합니다 (29/173)

29화. 그거면 충분합니다202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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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향기로운 꽃내음이 저택 안쪽까지 가득 밀려들어 왔다. 오늘따라 유독 푸르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매우 화창한 날씨였다. 그러나 저택은 마치 태풍이 휘몰아치는 듯 어수선했다.

16550617544684.jpg“빨리, 빨리……!”

내 재촉에 한쪽으로 예쁘게 땋아 올린 머리를 마무리하던 하녀들의 손길이 매우 분주해졌다. 조이도 기다리지 못하고 앙증맞은 리본이 달린 레이스 장갑을 얼른 내게 끼워 주었다. 이윽고 손길들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16550617544689.jpg“아가씨, 그러다 넘어지시겠어요!”

뒤에서 조이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뛰다시피 하는 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약속 시간에 늦은 건 아니었으나 누군가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마냥 급했다. 아니, 사실은 들떴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응접실 문 앞에 도착해 다급히 노크하자마자 곧바로 안에서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16550617544684.jpg“실례합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문을 열자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스윽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16550617544684.jpg“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

16550617544709.jpg“아닙니다. 제가 너무 일찍 와서 오히려…….”

우리는 동시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멈췄다.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두 눈을 깜빡이는 게 고작이었다. 흰색 정복을 입은 건 이미 여러 차례 보았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 건 어깨에서 시작해 허리까지 사선으로 길게 떨어진 푸른색 띠였다. 그 위에 새겨진 금빛 무늬는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진 어깨 견장과 재킷에 달린 반짝거리는 사파이어 단추들 또한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평소보다 단정하게 묶은 금발과 다정함을 듬뿍 담아 웃고 있는 푸른 눈동자 역시 화려한 정복에도 밀리지 않고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16550617544709.jpg“정말 잘 어울리시는군요.”

레어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칭찬을 건넸다. 덕분에 나는 좀 부끄러웠다. 선물을 해 준 당사자 앞에서, 그 옷을 입고 서 있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쑥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바로, 예쁘게 땋아 올린 내 머리…… 아니, 다이아몬드가 박힌 머리 장식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나을까?

16550617544709.jpg“무얼 입으시든지 다 잘 어울리시지만 말입니다.”

말문을 열려는데, 그가 상냥한 미소로 또다시 낯간지러운 말을 던졌다. 그제야 아직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떠올린 나는, 허둥지둥 풍성한 주름이 잡힌 보랏빛 치맛자락을 쥐고 인사를 건넸다.

16550617544684.jpg“이, 이렇게 예쁜 옷을 선물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이런 걸 그냥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16550617544709.jpg“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해 드리고 싶어 해 드린 것이니 부디 편하게 받아 주세요.”

그는 내 곁으로 성큼 다가와 말을 이었다.

16550617544709.jpg“앞으로도 계속 그래 주신다면, 오히려 제가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군요.”

단호한 말끝엔 짧은 헛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목 부근은 어느새 살짝 붉어져 있었다.

16550617544684.jpg‘앞으로도 계속이라고?’

이걸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나. 다음에도 또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걸까? 그도 아니면……. 묻고 싶었지만, 대놓고 입에 올리자니 어쩐지 좀 뻔뻔한 질문이 될 것 같았다.

16550617544709.jpg“준비가 다 되셨으면 출발할까요?”

레어넌은 평소보다 들뜬 기색으로 덧붙였다.

16550617544709.jpg“오늘 연회는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덕분에 머리 장식에 대해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지만, 나중에 꼭 설명해야지.

16550617544684.jpg“저도 그래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내밀어진 그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꼈다. * * * 저택을 출발한 마차는 수도 중심부에 위치한 커다란 성문 안으로 들어선 뒤에도 계속해서 길을 따라 달렸다. 유일하게 눈에 익은, 일전에 이혼 서류를 제출하러 방문했던 건물은 이미 지나친 지 오래였다.

16550617544684.jpg“와아……!”

더 안쪽으로 가자 눈길이 닿는 곳마다 화려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창문가에 붙어 밖의 풍경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16550617544684.jpg“황궁은 정말 큰 곳이네요! 이렇게 오래 달렸는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걸 보니…….”

16550617544709.jpg“이번 연회 장소가 황궁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건물이라 더욱 그렇게 느끼실 겁니다. 아, 거의 다 왔군요. 이제 잠시 후면 도착할 겁니다.”

그의 친절한 설명대로 마차는 얼마 가지 않아 어느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먼저 내린 레어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밖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16550617544684.jpg“세상에…….”

마차 밖의 세상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아름다운 커다란 대리석 외벽과 첨탑에 걸린 깃발,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장미 정원. 심지어는 정원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분수의 물줄기마저도 타는 듯한 저녁노을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그만 교양 없이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때, 우리 앞으로 빳빳한 초록색 정복을 차려입은 시종이 다가왔다.

16550617544689.jpg“레어넌 베르하르트 님, 로렐라 메이레드 님. 어서 오십시오. 연회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은 정중한 태도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쭈뼛대는 내 손을 자신의 팔에 다시금 얹은 레어넌이 부드럽게 웃으며 정원 쪽을 눈짓했다.

16550617544709.jpg“이곳은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입니다. 대륙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장미를 심어 놓은 장미 정원이 특히 유명하지요. 조금 이따 저와 함께 가 보시겠습니까?”

평소와 똑같은 다정한 목소리에 긴장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 입구를 향해 당당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간신히 다물어진 입이 또다시 살짝 벌어졌다. 붉은 주단이 깔린 기나긴 복도 양옆으로 위엄 넘치는 황가의 초상화가 진짜 금으로 만든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기둥을 휘황찬란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은, 제국의 각 영토를 상징하는 동물들을 보석으로 알알이 수놓은 거대한 태피스트리였다. 어찌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창문에는 하나도 겹치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색깔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었으며, 난생처음 보는 거대한 샹들리에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빛의 파편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에 그만 순식간에 압도되고 말았다. 부끄럽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변방에서 열리는 아주 작은 무도회조차 참석해 본 적 없던 내가, 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건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관문은 이제부터였다. 복도를 지나 커다란 홀에 들어선 순간 레어넌과 함께 서 있는 내게로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시선이 동시에 꽂혀 들었다. 어찌나 강렬한지 정말로 피부가 따끔거리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빙의하기 전에도 ‘로렐라 메이레드’는 사교계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메이레드 백작가는 힘없고 가난한 가문이었으니까. 오죽하면 2년간 누구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체임버스 가문의 전 공작 부인’이라는 명칭이 더 유명하겠는가. 반면에 레어넌은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에크레투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고, 심지어 이번 전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도대체 저 여자는 누구기에 단장님 곁에 서 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없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지.

16550617544709.jpg“괜찮습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여 준 레어넌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대로 조용히 백스텝 해서 연회장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이미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16550617544684.jpg“후우…….”

하지만 이대로 어깨를 움츠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파트너로서 동행한 레어넌에게도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그래, 로렐라. 오늘만큼은 네가 이 제국 최고의 인싸라고 생각하라고! 뻔뻔하게 나가는 거야, 뻔뻔하게. 스스로에게 최면까지 걸며, 크게 심호흡하던 그때였다.

16550617544709.jpg“로렐라 님, 마침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이 계십니다.”

레어넌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우아한 연녹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내 나이 또래의 여자가 앞에 서 있었다.

16550617544709.jpg“르웬 백작 부인입니다.”

레어넌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먼저 상냥한 인사를 건넸다.

16550617544689.jpg“처음 뵙겠어요, 로렐라 님. 정말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혹시 나를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16550617544684.jpg“아,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주 인사를 하지 않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그러나 격식을 차려 예를 갖춘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부드러운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16550617544689.jpg“다짜고짜 인사를 드려 놀라셨죠?”

백작 부인이 눈을 빛내며 돌연 내 손을 꼬옥 잡았다.

16550617544689.jpg“제가 실은 그 디저트 가게의 엄청난 팬이랍니다. 단장님께서 알려 주시기에 가 보았는데, 그만 푸욱 빠졌지 뭐예요……!”

16550617544684.jpg“네? 가, 감사합니다…….”

16550617544689.jpg“듣자 하니 로렐라 님께서 직접 투자하신 곳이라지요? 타고난 사업 감각이 아주 훌륭하신 것 같아요. 부디 괜찮으시다면, 사업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시지 않겠어요?”

단번에 거리를 확 좁히는 스킨십 기술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는 스몰토크 능력까지. 타고난 인싸라는 건 바로 이 백작 부인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구나.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순간 레어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장님이 알려 주셨다고? 시선이 닿았지만, 그는 모른 척 입꼬리를 위로 빙긋 끌어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얼떨결에 백작 부인과 말문을 트게 되었다. 온갖 메뉴를 꿰고 있는 걸 보니 그녀가 우리 가게 디저트에 푹 빠졌다는 건 확실했다. 타고난 사교가와 함께하는 자리에서 공통된 화제까지 있었으니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나중에는 입고 온 드레스며 앞에서 본 장미 정원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 그녀가 원하던 대로 사업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는 새 주위에는 어느덧 서너 명의 부인들이 더 몰려들었다. 모두 르웬 백작 부인의 인맥이었다.

16550617544684.jpg“자금은 한정되어 있는데, 제시하는 아이디어마다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함께 일하는 동업자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가고…….”

망설이던 처음과 달리 어느새 나는 그들 앞에서 열띤 무용담을 이어 갔다.

16550617544689.jpg“어머, 정말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16550617544689.jpg“그러게 말이에요. 처치 곤란인 재고가 쌓이는 것만큼 난감한 일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해결하신 건가요?”

16550617544684.jpg“이게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던 게, 다행히 엄청난 호응을 얻기 시작했죠.”

16550617544689.jpg“그럼 그게 바로!”

16550617544689.jpg“‘그 커피’군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던 부인들이 순간 너도나도 입을 모았다.

16550617544684.jpg“네, 맞아요.”

나는 뿌듯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코끝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대화를 경청하던 레어넌 단장도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16550617544689.jpg“가게를 제대로 운영하게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처음 듣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다정한 미소를 담뿍 머금고 있는 입매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마주한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상황을 미루어 봤을 때, 레어넌 단장이 일부러 르웬 백작 부인을 소개시켜 준 게 틀림없었다. 내가 이런 곳에서 인사를 나눌 만한, 이렇다 할 친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16550617544689.jpg“로렐라 영애는 정말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듣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어요.”

함께 대화를 나누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부인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져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16550617544689.jpg“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군요. 나는 에른 후작가의 그레이스라고 해요.”

16550617544684.jpg“아, 에른 후작 부인. 칭찬 너무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16550617544689.jpg“과찬은요. 다음번에 우리 저택에 놀러 와요. 만찬회가 있는데, 괜찮다면 꼭 참석해 주면 좋겠군요. 물론 단장님도 함께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듣고 있던 영애들도 까르르 웃으며 에른 후작가의 만찬회에 대해 한마디씩 보탰다.

16550617544684.jpg“만찬……회에요?”

16550617544689.jpg“네. 저도 커다란 공방을 몇 개 운영하고 있어서 사업 이야기에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군요. 폐가 안 된다면, 영애와 좀 더 깊은 대화를 하고 싶어요.”

16550617544684.jpg“폐, 폐라니요! 그렇지 않아요. 단장님만 괜찮으시다면, 꼭 가고 싶어요!”

나는 뛸 듯이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레어넌이 기다렸다는 듯 씨익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16550617544709.jpg“초대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로렐라 님께서도 가신다니, 저도 함께 방문하겠습니다.”

우리 둘 다 제의를 즉각 수락한 것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후작 부인은 활기가 가득한 모습이 보기 좋다며 활짝 웃었다. 그녀를 포함한 영애들은 우리와 더 대화를 나누다가 각기 흩어졌다. 워낙에 많은 사람이 온 연회인지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레어넌과 함께 홀의 중앙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를 발견하고 눈웃음 지어 주는 르웬 백작 부인이 보였다. 나 역시 그녀를 향해 마주 웃어 주고는 레어넌에게 작게 속삭였다.

16550617544684.jpg“제일 처음으로 르웬 백작 부인을 소개해 주신 이유가 있었군요. 정말 감사해요.”

16550617544709.jpg“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16550617544684.jpg“아우레아에 있는 가게도 일부러 알려 주셨잖아요. 아닌가요?”

16550617544709.jpg“하하…… 단 걸 좋아하시는 분이시라 솔직히 다행이었습니다.”

굵고 짧게 털어놓은 진실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음이 터졌다.

16550617544684.jpg“사교계와 친하지 않다고 하시더니, 역시 단장님은 대단한 분이세요. 데뷔탕트를 치르는 분들이 너도나도 단장님께 도움의 손길을 청하겠는걸요?”

16550617544709.jpg“친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본 게 없는 건 아니니까요.”

하긴. 그 말에 나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황제의 조카이자, 베르하르트가의 차기 가주 아닌가. 분명 어렸을 때부터 적지 않은 연회에 참석해 가며 직접 보고 배웠을 것이다. 덕분에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한 나는 몸을 곧게 편 채 모르는 사람들과도 제법 능숙하게 눈인사를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 오는 새로운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고, 가벼운 대화를 이어 가는 건 무척이나 즐거웠다.

16550617544709.jpg“모두가 로렐라 님을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레어넌은 그런 날 보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내게 이렇게까지 잘해 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어떻게든 가라앉히려 가슴께를 손으로 꾹꾹 누르는데, 레어넌이 걱정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16550617544709.jpg“혹시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장 시종을 불러서…….”

16550617544684.jpg“아, 아니에요. 그냥 고민이 있어서요.”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그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16550617544709.jpg“고민이라면, 어떤……?”

16550617544684.jpg“단장님께 어떻게 하면 이 고마움을 다 갚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요.”

그 말에 레어넌은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16550617544709.jpg“이미 넘치도록 갚아 주셨으니 걱정 마십시오.”

16550617544684.jpg“네? 하지만 전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그 말에 의아함을 가득 담아 그를 올려다본 그때였다.

16550617544709.jpg“당신의 이런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지닌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귓가에 울려 퍼졌다.

16550617544709.jpg“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유독 반짝이는 눈동자라든지, 즐거울 때 경쾌하게 터지는 웃음소리라든지.”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을 고스란히 품은 한낮의 바다처럼 푸른 눈 속에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16550617544709.jpg“그거면 충분합니다.”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궁정 악단이 연주하는 기분 좋은 선율이 귓가를 적셨다.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테라스 근처에 연주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더불어 주위 사람들의 분위기도 아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내게 레어넌이 손을 스윽 내밀었다.

16550617544709.jpg“저와 첫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듣기 좋은 저음인지. 나는 레어넌과 잘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흰 장갑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결국 그 위에 살포시 손을 포갰다. 그러자 단단한 팔이 기다렸다는 듯 허리 부근을 감싸 안았다. 띵동. 띵동. 띵동. 아름다운 왈츠 선율과 하모니를 이루듯, 은은한 종소리가 쉴 새 없이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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