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당신이 제일 예뻐2021.09.29.
“아니, 역시 다른 걸로 해야겠어요.”
미간까지 찌푸린 채로 한참이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조이가 이내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이 머리 장식은 예쁘긴 한데, 너무 신경 쓴 느낌이 들어서 별로예요.”
그런 그녀의 앞에는 틀어 올리거나 땋은 머리에 꽂아 장식하는 각양각색의 헤어핀이 가득했다.
“이건 어때요? 적당히 귀여우면서도 무엇보다 아가씨 머리 색에도 잘 어울리잖아요.”
“흠, 괜찮기는 하지만……. 머리 색이랑 완전히 똑같은 건 좀 그렇지 않나?”
벌써 몇십 분째 나를 둘러싼 하녀들의 옥신각신이 계속되고 있었다. 덕분에 꽤 오랜 시간을 꼼짝없이 의자에만 앉아 있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들 해.”
“어머, 아가씨. 안 돼요!”
하지만 저항은 부질없었다. 조이뿐 아니라 다른 하녀들도 합심해서 내 어깨를 황급히 눌러 다시 자리에 앉혔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죠!”
“그럼요! 저택에 도착하신 그 순간부터 절대 아가씨께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들 거라구요.”
아니, 그러니까 대체 무슨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건데……. 알 수 없는 의문으로 가득했지만, 잔뜩 흥분해서 주먹까지 떠는 그녀들의 기세에 눌린 탓에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조용한 저택이 아침부터 이렇게 소란해진 건, 오늘 오는 손님 때문이었다. 주인이 바뀐 메이레드 저택의 첫 손님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어넌 베르하르트 성기사단장이라는 소식을 들은 고용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분주해졌다. 오후에 단장님이 오실 테니 평소보다 다과를 좀 신경 써 달라고 부탁하자마자 조이의 입에서 터져 나왔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해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체 몇 벌의 드레스를 갈아입었는지 모르겠다. 장신구도 몇 번이나 바꿔 껴 봤다. 그뿐이랴. 머리도 올렸다가 내렸다가, 땋았다가 풀었다를 온종일 반복했다. 심지어 귀걸이 한쪽, 머리에 꽂는 핀 하나까지 의견이 갈리기라도 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오늘을 위해 신경 쓴 티가 나고, 화려한데도 심플해서 한번 보면 절대로 눈을 떼지 못하는 스타일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청순하면서 섹시하게!”
조이가 그렇게 다짐하자 주위를 둘러싼 하녀들의 눈에도 결의의 빛이 차올랐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듣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민망해졌다.
“아니, 단장님과는 그냥 친구 사이라니까…….”
그러나 내 주장을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다시 풀어 내리는 하녀들의 손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귀여운 프릴이 달린 연노랑빛 드레스를 입고, 반만 묶어 땋아 올린 머리를 한 채 레어넌을 기다렸다. 평소 입는 것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라 어색했지만, 다들 입을 모아 예쁘다고 칭찬해 주니 괜히 자신감이 생겼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현관 옆 장미 덤불 위로 길게 드리워졌을 즈음, 하얀색 말 두 필이 이끄는 커다란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크레투스 기사단의 마차였다. 레어넌 단장은 미리 약속했던 시간에 딱 맞추어 찾아왔다. 바퀴가 현관 앞에 멈춰 선 순간, 내 옆에 함께 서 있던 조이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힐끔 바라보니 손끝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덕분에 나까지 긴장돼서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마차에서 내린 기사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문을 열었고, 레어넌 단장이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나.”
“세상에…….”
그러자 여기저기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주름 하나 없는 새하얀 정복 뒤로 강렬한 붉은색 안감을 덧댄 망토가 펄럭였다. 평소보다 훨씬 더 단정하게 묶은 금발과 화려한 금빛 견장이 햇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남자답게 선이 굵지만 수려한 얼굴에서도 한눈에 띄는 푸른 눈동자는 너무나 맑아서, 보기만 해도 온갖 고민이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눈길을 빼앗은 건 그의 손에 들린, 내 머리색과 기가 막히게 똑같은 붉은 장미 꽃다발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커다랗고 예쁜 상자를 든 기사들이 줄지어 섰다. 레어넌은 나를 발견하고는 환히 웃음 지으며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광경이 아름다운 신록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커다란 꽃다발이 불쑥 내밀어졌다. 동시에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엉겁결에 그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들자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저야말로,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또다시 한없이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며 겨우겨우 대답했다. 곁에 선 하녀들의 눈길이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었다.
“어,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나는 모두의 시선을 등진 채 황급히 레어넌을 저택 안으로 이끌었다.
“바쁘실 텐데 폐가 되진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폐라뇨. 제가 먼저 단장님을 초대했는걸요. 아, 그렇지. 다과를 드시기 전에 먼저 저택 구경부터 하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로렐라 님이 안내해 주신다면 꼭 그러고 싶군요.”
그 말에 나는 곁에서 따라오던 조이에게 꽃다발을 맡기고 응접실로 향하려던 발길을 살짝 틀었다. 꽃다발을 대신 받아 든 조이는, 응접실에 다과를 준비해 놓겠다는 말과 함께 연신 기웃거리는 하녀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러자 레어넌도 커다란 선물 상자를 들고 있는 기사들을 모두 물렸다. 어느새 텅 빈 복도에는 나와 레어넌, 단둘이었다. 오랜만에 봐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일전에 기사단에서 일어났던 사고가 아직 잊히지 않은 탓일까. 자꾸만 심장이 뛰고 긴장이 돼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게 됐다.
“여기가…… 1층 홀이에요. 이 뒤쪽으로는, 후원으로 나가는 복도가 있는.”
심지어는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괜한 헛기침을 하며 가다듬어 봐도 좀처럼 나아질 생각을 않는다. 하지만 나와 천천히 보폭을 맞춰 주던 레어넌은 내색하지 않고 그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받아 주었다.
“소박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좋은 곳이로군요.”
“사실 예전에는 더 화려했어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좀…… 살풍경하죠.”
틈날 때마다 수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부는 여전히 허전했다. 귀족 저택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게다가 성기사단 관저가 얼마나 고풍스럽고 화려한 곳인지 직접 보았기에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레어넌 단장이 물질로 타인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어쩐지 좀 주눅이 들어 어색하게 웃음만 짓고 있는데, 레어넌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무턱대고 화려한 저택보단 지금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집은 보통 주인의 느낌을 따라가기 마련이니까요.”
진심이 가득 담긴 말 덕분일까.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지려던 고개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자,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따듯한 눈동자가 날 마주하고 있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레어넌 단장이 말하면 정말로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 그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허튼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레어넌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내 미소를 본 그도 화답하듯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니, 저택 구석구석을 안내하는 일에도 거리낌이 사라졌다. 분위기가 편안해져서인지 대화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어요. 일전에 서신에 짧게 쓰긴 했지만, 황궁에 가서 일도 무사히 마무리 지었고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레어넌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당연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렇게까지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레어넌은 민망하다는 듯 내 어깨를 잡고 날 가볍게 일으켰다.
“저한텐 정말 큰일이었는걸요. 단장님께서 인사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실 일은 얼마나 대단한 일일지 상상이 안 가네요.”
“그건…… 글쎄요.”
내 농담에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는 레어넌과 또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렇지.”
저택을 한 바퀴 빙 돌아 응접실로 돌아가는 길. 문득 어제의 일이 생각나 그에게 재잘거리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저 어제는 처음으로 사교 모임에도 다녀왔어요.”
“사교 모임을요?”
“네, 일하다가 알게 된 귀부인들의 티 파티에 초대받았거든요.”
레어넌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겠지만, 나는 무척이나 자랑하고 싶었다. 비로소 허수아비 공작 부인이 아니라 당당한 한 사람으로서 인정받은 기분이었으니까.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앞으로도 종종 모임을 갖기로 했답니다.”
“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좋은 일이 있었군요. 다행입니다.”
딱히 그에게는 흥미로운 화제가 아닐 텐데도, 레어넌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물어봐 주었다.
“그런 모임에서는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십니까?”
정말 이런 이야기가 궁금할까 싶어 슬쩍 쳐다보자, 그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전 여성분들의 모임에 가 본 적이 없어서요.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지 궁금하군요.”
“특별할 건 없었어요. 아, 거기서 단장님…….”
“네?”
나는 순간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모두가 입을 모아 당신을 다정하고, 잘생기고,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만 같은 남자라고 칭송했다는 이야기를 할 뻔했다.
“어, 얼마 후면 황궁에 연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잽싸게 말을 돌리자, 레어넌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승전 기념 연회 말이군요.”
“건국 이래 가장 화려한 연회가 될 거라면서요? 다들 부러워했어요. 저도 한 번쯤은 그런 곳에 가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가 보고…… 싶으십니까?”
나는 그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다들 기대하니 궁금하기도 하고요. 북부에 있을 땐…… 그런 자리에 간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초대장은 한정되어 있을 거다. 황제와 황후를 직접 알현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외국 귀빈들까지 온다니 말해 무엇 할까. 중앙 사교계를 주름잡는 귀족들, 그도 아니면 전쟁에서 지대한 공을 세운 가문이 아니고서야 참석은 꿈도 못 꿀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새 우리는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활짝 열린 문으로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힘준 테이블 세팅이 보였다. 레어넌이 가져온 꽃다발도 커다란 화병 여러 개에 나뉘어 예쁘게 꽂혀 있었다. 그 옆으로는 그가 가져온 선물인 예쁜 상자들이 차곡차곡 놓였다.
“어서 들어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비켜섰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레어넌이 몇 발자국 뒤에 서서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장님?”
“아, 죄송합니다.”
작게 부르자 그가 퍼뜩 사과를 건넸다. 그러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예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다과가 가득 차려진 테이블 앞에서 레어넌은 또 다른 선물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 바로 풀어 보시지 않겠냐면서 부드러운 미소로 권유했다. 저 많은 상자에 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하던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하나하나 그가 전해 준 상자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엔 몹시 기쁘기만 했으나, 상자를 열면 열수록 점점 고개가 숙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상자 안에는 화려하고도 예쁜 선물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뭐, 뭘 이런 것까지…….”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알록달록한 설탕을 입히고 견과류가 쏙쏙 박힌 고급스러운 초콜릿부터 시작해서, 감미로운 오렌지 향이 나는 달콤한 술, 손에 껴 보기가 겁날 정도로 촘촘하게 짜인 예쁜 레이스 장갑과 장미 무늬 자수가 놓인 양산, 진짜 보석이 박힌 작은 보석함까지. 그저 차 한 잔 대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고자 했을 뿐인데, 어쩐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입술만 벙긋거리며 그를 바라보자 레어넌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에 주신 선물에 대한 보답입니다. 제가 직접 고른 건데,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내가 준 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깃털이 달린 펜대였을 뿐인데 돌아온 보답이 너무 과했다. 하지만 내 입술을 더더욱 벌어지게 만든 건, 그가 선물을 직접 골랐다는 말이었다.
“이 많은 걸…… 직접 고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혹시…….”
그의 눈에 우려가 깃드는 게 보여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평소에도 충분히 다정했지만, 이런 세심한 센스까지 갖춘 줄은 몰랐다.
“정말 이렇게 예쁜 것들은 처음 봤어요. 전부 제 마음에 쏙 들어요!”
활짝 웃으면서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곁에서 차 시중을 들어 주던 이도 덩달아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제야 레어넌의 입가에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었다.
“평소에 누나의 잔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던 게 도움 될 때도 있군요.”
“누나분께서 잔소리가 심하신가 봐요.”
“말도 마십시오. 제대로 들어 주지 않으면 들어 줄 때까지 말하시거든요.”
찻잔을 들어 올리던 레어넌이, 보기 드물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우리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되어 조이를 비롯한 다른 시녀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화 주제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했고, 덕분에 나는 평소 듣지 못했던 레어넌의 이야기를 잔뜩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여자한테 반말해 본 적 없으세요?”
“네, 없습니다.”
깜짝 놀라 되물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레어넌은 곰곰이 다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역시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릴 적에 절 돌봐 주시던 가정 교사는 물론, 유모에게도 해 본 적 없군요. 남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친우나 기사들에게는 말을 놓지만요.”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짓궂은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럼 저한테 한번 해 보세요.”
“네?”
“단장님이 평소와는 다르게 말을 편히 낮추시는 걸 들을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죠. 어서요.”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뭐 여러 가지 있잖아요.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예를 들면 ‘꽃이 예쁘네, 로렐라.’라든지 아니면 ‘이 차 이름이 뭐야?’라든가…….”
펠리어트에게도 서슴지 않고 반말을 해 대던 나로선 솔직히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반말이 그다지 격조 있는 말투는 아니지만,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인 나는 그쪽이 더 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평생을 존댓말만 써 온 사람이 있다니.
“꽃이 예쁘…….”
레어넌은 붉어진 목덜미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가, 결국 다 잇지 못하고 이내 말을 돌렸다.
“……예쁩니다.”
꿋꿋하게 존대하는 그 모습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처음이라서 많이 어렵죠? 대신 단장님이 처음으로 반말을 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제가 잊지 않고 꼭 기억할게요.”
그렇게 부추기자 레어넌이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러더니 무언가 큰 결심을 마친 듯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예뻐.”
“그것 봐요. 하면 되잖아요.”
묘한 승리감이 들어 까르르 웃음이 터진 그때였다.
“당신이 더 예뻐, 로렐라.”
“……네?”
나지막한, 그러나 한 자 한 자 힘주어 똑바로 읊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은은히 울려 퍼졌다.
“당신이 제일 예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