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섹시남 VS 다정남2021.09.25.
오후의 햇살이 육중한 마호가니 벽 위로 스며들었다. 벽에 새겨진 정교한 드라곤 조각은 마치 빛 속에서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베르하르트 가문 저택에 있는 여러 개의 응접실 중, 가장 호화로운 응접실 벽면을 장식한 ‘드라곤’은 에크레투스 기사단의 초대 기사단장이 물리쳤다는 전설의 마물이었다. 벽에 새겨진 조각은 줄곧 에크레투스 기사단을 이끌어 온 베르하르트 가문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곳에 베르하르트 가문 사람들은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 정답게 찻잔을 기울였다. 또드락, 또드락. 검을 쥐는 자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쁘고 기다란 손가락이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의 앞에 놓인 찻잔은 입도 대지 않은 채로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때, 풍성하고도 아름다운 금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노부인이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
“차가 다 식어 버렸구나, 레어넌. 리타, 한 잔 더 준비해 주겠니?”
“네, 실례하겠습니다.”
곁에 서 있던 시녀는 능숙한 손길로 레어넌의 앞에 놓인 찻잔을 트레이로 가져갔다. 그제야 그의 고개도 스르르 들어 올려졌다.
“감사합니다.”
말끝에 괜한 헛기침이 따라붙었다. 가족들의 눈이 전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뭐 기다리는 거라도 있어?”
어느새 붉어진 남동생의 목덜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엘리오르가 짓궂게 눈을 반짝였다.
“……아닙니다.”
“마침 배달부가 올 시간인데, 서신이 올 곳이 있나 봐? 요즘 자주 그러잖아. 목을 빼고 뭔가를 기다리다가, 다시 침울하게 가라앉고.”
레어넌의 누나 엘리오르는 가족 중 어머니 다음으로 눈치가 빨랐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쉬이 알아채지 못했을 그의 반응도 그녀는 금방 눈치채곤 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하지만 레어넌은 꿋꿋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누나에게 어린 시절부터 이미 당할 대로 당해 온 그의 내공도 만만치 않은 덕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동생이 넘어오지 않자 엘리오르의 흥미는 금세 다른 곳으로 향했다.
“참, 오늘 아침 의상실에 갔다가 들었는데요. 엊그제 펠리어트 공작의 혼인이 드디어 무효 판정이 났대요.”
그 순간 레어넌의 손끝이 움찔했다.
“펠리어트 공작이 약속도 없이 쳐들어와서 다들 이거 큰일 나겠구나 하고 바짝 겁을 먹었는데 의외로 난동도 피우지 않고 순순히 돌아갔다나 봐요.”
“그곳도 엄연히 황궁 안인걸요. 제아무리 공작이라 해도 함부로 행동하진 못했을 겁니다.”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닌 자비에르 자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엘리오르가 믿음직스럽다는 듯 남편의 손등을 끌어다 귀엽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혼인 서약서를 잿더미로 만들고 도망치다니, 정말 대단해요. 대체 그걸 어떻게 불태웠을까요?”
그녀의 눈은 흥미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조용했던 사교계를 모처럼 떠들썩하게 만든 소식이니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딜 가나 모두가 체임버스 공작 부부에 대한 얘기로 소란스러웠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겠니. 틀림없이 온갖 방법을 찾아봤겠지.”
시녀가 새로 채워 준 홍차를 느긋하게 음미하던 플로렛 베르하르트 공작부인이 그렇게 말하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참으로 강단 있고 용기 있는 아가씨야.”
“……어머니.”
동시에 레어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러니, 레어넌?”
“혹시…… 혼인 서약서를 불태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으십니까?”
공작부인은 아들의 질문에 아주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대답했다.
“물론 있지.”
“컥!”
웬만해선 평정을 잃지 않는 그의 아버지가 순간 입에서 차를 내뿜었다. 그러나 레어넌은 동요도 없이 여전히 진지했다.
“그건 대체 어떤 심정입니까?”
공작부인은 태연한 얼굴로 남편에게 냅킨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죽이고 싶은데 차마 죽일 순 없을 때?”
“여, 여보……!”
온 대륙에 이름을 떨친 용맹함의 상징임과 동시에 부인에게만큼은 꼼짝 못 하는 공처가인 게일 베르하르트 공작의 얼굴은 급기야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도 플로렛은 그저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살인자가 되는 것보다는 혼인 서약서를 불태우는 게 백번 낫지.”
“부인,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부디 알려 주지 않겠습니까?”
울상을 짓는 아버지의 얼굴에 엘리오르는 배를 잡고 웃어 댔다. 그건 자비에르 자작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긴장해 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역시 이제는 완벽히 베르하르트가의 식구가 되어 있었다. 베르하르트 가문의 사람들은 언제나 화목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넘쳤다. 가족들끼리 모여 티 타임을 가질 때면, 늘상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때, 문밖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집사가 편지가 놓인 은쟁반을 들고 정중한 태도로 들어왔다.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레어넌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찌나 급히 움직였는지, 테이블이 심하게 덜컹거려 찻물이 넘칠 지경이었다.
“하나는 황궁에서 온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 초대장이고, 나머지 하나는…….”
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가 재빨리 서신을 낚아챘다. 그리고 서신의 발신인을 확인한 그의 얼굴에 꽃처럼 부드럽고 예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영문을 모르는 가족들은 그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디 가?”
갑자기 등을 돌려 응접실을 나가려는 레어넌의 뒤에다 대고 엘리오르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그가 손도 대지 않은 다른 편지, 황궁 연회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답장을 보내야 해서요.”
“무슨 답장?”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어넌은 그사이에 이미 빠르게 사라진 뒤였으니까.
“대체 뭐지?”
엘리오르가 투덜대는 사이,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대체 언제쯤 인생을 걸고 지켜 줄 상대를 찾을 건지.”
이미 은퇴한 자신의 뒤를 이어받아 기사단장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는 레어넌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만 생각하면 늘 걱정이 앞섰다.
“느긋하게 생각하세요. 그런 건 억지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플로렛 베르하르트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언젠간 용기 있는 아가씨가 나타나겠죠.”
* * *
“좋아, 이 정도면 아주 좋아.”
나는 말끔히 단장한 응접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벽의 구멍을 모두 수리한 것은 물론, 아주 고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품격이 느껴지는 가구도 들였고 예쁜 식기들까지 모두 갖춰졌다. 레어넌 단장님으로부터 초대해 주셔서 무척이나 감사하고 내일 보자는 답신까지 받았으니 그야말로 준비는 완벽한 셈이다. 이제 유일하게 신경 쓸 것이 하나 남았다면……. 「총 판매 주식 : 34,001주」
“제발, 내일은 제발……!”
제발 별일 없었으면! 시스템 창을 띄워 놓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 구역의 폭군, 주접킹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위너드가 얘기해 준 대로 쿠키 보상을 받지 않으면 될 일 같긴 하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아가씨, 이제 슬슬 나가 보셔야죠. 이러다 늦으시겠어요.”
그때, 조이가 외출용 숄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작은 티 파티에 초대를 받아 가는 날이었다. 참석자는 대부분 레아의 가게를 즐겨 찾아주는 단골손님들로, 나와도 여러 번 안면을 튼 귀족들이었다. 대부분 중앙 사교계와는 그다지 연이 없는, 작은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와이너리를 경영하거나, 과수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생계형 귀족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더욱이 초대에 부담 없이 응할 수 있었다. 펠리어트와 나의 관계를 모르는 데다가, 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노골적으로 캐내려 하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마차에 올라 티 파티 장소로 향하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2년 동안 공작저에 갇혀 친구 하나 없었던 내가 드디어 사교 모임을 다 가 보다니. 누군가에겐 소소한 일상이겠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다. 들뜬 마음에 어깨가 절로 들썩일 정도로 말이다. 살다 보니 이런 좋은 날이 오는구나. 크으. 너도 이제 인싸 다 됐다, 로렐라! 소박하고 소탈한 사람들이니만큼, 분명 즐거운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 그렇게 믿었다. 오늘 모임 장소인 살롱의 개인실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기 전까지만 해도.
“펠리어트 공작님의 재혼 상대가 되려고 벌써부터 물밑 경쟁이 아주 치열하대요! 내로라하는 가문의 영애들은 물론이고, 듣자 하니 이웃 나라 왕녀님께서도 구애의 서신을 보내셨다나요?”
“잘생겼지, 젊지, 섹시하지. 게다가 전쟁에서 공로까지 세우셨으니 그럴 만도 하죠. 누가 배필이 될진 몰라도 부러움 살 일이죠.”
“공작님께선 검은 가죽 장갑을 즐겨 끼신다면서요? 머리를 쓸어 넘기시는 게 그렇게 섹시하다던데…… 한 번쯤 눈앞에서 꼭 보고 싶네요.”
“황제 폐하께서 큰 상을 내리겠다 하셨으니 북부는 이제 번창할 일만 남았는데…… 전 공작부인은 대체 어떤 분이기에 혼인 무효 진정서까지 낸 걸까요?”
내 오른쪽에 앉은 여자들이 열띤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 불타는 화제에 끼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몇 마디 안부를 나눈 뒤로 지금까지 그녀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최근에 싱글이 된 잘생기고, 섹시한 북부 공작에 관한 것뿐이었다. 아니, 저기요. 여러분들께서 직접 한 번 겪어 보셔야…….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차마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차만 홀짝였다. 그러자 이번엔 왼쪽에 앉은 여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듣자 하니 공작님께서는 엄청 차가우시대요. 저택에서 오래 일한 고용인들조차 섣불리 말도 제대로 못 붙인다던데. 그런 남자가 자기 여자에게 잘해 주는 법이나 제대로 알겠어요?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다정한 게 최고죠. 레어넌 단장님처럼.”
“그럼요. 다정하고, 젠틀하고, 외모도 성격도 완벽 그 자체인데! 세상의 모든 남자가 레어넌 단장님 같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동감이에요. 아마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하늘의 별도 따다 줄걸요. 아, 난 언제 그런 분하고 데이트 한번 해 보려나. 다음 생애에서라도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컥. 이번에는 찻물을 넘기다 목이 막혀 왔다. 결국 어느 그룹에도 낄 수 없어서, 테이블의 모든 차를 다 마셔 버릴 기세로 그저 찻잔만 기울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로렐라 님은 어때요?”
“네, 네?”
“둘 중 고르라면 누굴 선택하시겠어요? 레어넌 단장님? 아니면 펠리어트 공작님?”
“그러고 보니 로렐라 님의 의견을 아직 못 들었네요. 지금 정확히 4대 4니까 로렐라 님이 선택하는 쪽이 이기겠어요.”
“아이참, 빨리 이야기해 봐요. 다정한 남자가 좋아요, 아니면 섹시한 남자?”
모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그…… 그게…….”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이 상황을 피할 만한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며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있던 그때였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정남과 섹시남에게 동시에 춤 신청을 받아 보는 게 내 꿈인데. 그러려면 최소한 이번에 열릴 황궁 연회 정도는 가야겠죠?”
대답을 기다리다 지루해진 탓에 화제를 돌리려 한 것 같았지만, 지금 내게는 그녀가 구세주로만 느껴졌다.
“황궁 연회요?”
펠리어트와 레어넌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이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 재빨리 물었다.
“네, 승전 기념으로 아주 커다란 연회가 열린대요. 제국 역사상 최대 규모라고 하던걸요? 중앙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전부 참석하는 건 물론이고, 동맹국의 사절단까지 온다고 들었어요.”
“세상에, 너무 근사하겠네요.”
“그래서 말인데요…….”
내가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자, 그녀는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경비병이 동원된다는 소리 들으셨어요? 평소보다 10배쯤 더 많을 거라는군요.”
“저도 들었어요. 성벽과 황궁으로 향하는 길목을 물샐 틈 없이 지킬 거라지요?”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영애 또한 맞장구를 치며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저 대화 주제를 돌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내게도 흥미로운 얘기였다. 나는 그녀에게로 조금 더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커다란 규모의 연회라서 치안에 특히 신경을 쓰나 보네요. 행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말하면서도 조금 이상했다. 보통 그럴 땐 광장이나 번화가에 경비를 늘리지 않을까? 성벽이나 길목을 지킬 필요가 있나? 역시나 내 의문이 정확했는지, 말을 꺼낸 영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황궁 주변의 치안은 늘 안전한걸요. 그날도 아마 기껏해야 수십 대의 마차들로 길이 좀 막힐 뿐이겠죠.”
“그럼 왜 성벽까지 지키는 건가요?”
“검은 뱀 길드요.”
“네?”
“그날 들어갈 진상품 중에서, 검은 뱀 길드가 눈독 들이고 있는 물건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원래는 길드의 재산이었는데, 한 외국의 황족에게 감쪽같이 속아서 빼앗겼다나요?”
“검은 뱀…… 길드요?”
“황궁에선 헛소문이라고 일축했지만, 정말 검은 뱀 길드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렇게 경비를 늘릴 필요가 없었겠죠.”
“검은 뱀 길드가 대체 뭔데요?”
처음 듣는 이름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오히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듯 경악으로 가득 찬 시선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세상에, 설마 그 이름을 들어 본 적 없으세요?”
“아, 제가 그…… 먼 외국에서 자라서…….”
덕분에 나는 코끝을 긁적이며 자연스럽게 얼버무리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길드라고 알려진 곳이에요. 워낙 베일에 가려져 있고, 또 우리 같은 사람하고는 접점이 없어서 얼마나 위험한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요.”
“길드장이 돈 되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한대요. 살인 청부 같은 건 일도 아니랬어요.”
“누구든지 길드장에게 찍히면, 그날로 끝이라고 하더라고요.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할 만큼 사람을 생지옥으로 떨어뜨린다나요.”
“황궁에서 현상금까지 걸었다는데, 마치 놀리듯 유유히 잘도 빠져나간대요. 듣자 하니 추종자들이 엄청 많아서, 주위에 도와주는 손길이 한둘이 아니라더군요.”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앞다투어 쏟아졌다. 물론 나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북부가 워낙 외진 곳이었던 데다가, 이런 정보를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아니, 근데 무슨 길드장한테 추종자까지 있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진짜 존재했군요. 무슨 어둠의 제왕쯤 되는 사람인가 보죠?”
그녀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하던 나는 제법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 사람하곤 평생 가도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에요. 안 그래요?”
뭐니 뭐니 해도 인생은 가늘고 길게 사는 게 가장 좋은 법이다. 나만 해도 주식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살았을 텐데. 새삼스레 차오르는 억울함을 삼키며 홀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로 경쟁하듯 말을 쏟아내던 그녀들이 거짓말처럼 입을 딱 다문 것이다. 심지어는 내 말에 가볍게 동조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다들…… 왜 그러세요?”
의아함을 숨기지 못한 것도 잠시.
“……엮이고 싶다나 봐요.”
“네?”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에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한 번이라도 보면 없는 의뢰를 억지로 만드느라 가산까지 탕진하게 된대요.”
“저도 소문만 듣긴 했지만, 초상화까지 암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던데……. 어느 영애가 상사병에 걸려서 몸져누웠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게 사실이면 진짜 딱 한 번만이라도 지독하게 한 번 엮여 보고 싶네요.”
“저도요.”
“실은 저두…….”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볼에는 어느새 야릇한 홍조까지 피어 있었다.